EP.223
“···나?”
샤론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내 가슴팍이 도달하였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고 찰나의 순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게 무슨 뜻이지?’
설마 내 정체에 대해 눈치챈 건가?
아니 아까 전의 반응을 보면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그러면 말 그대로 나를 미끼로 삼겠다는 뜻인가? 그런 위험한 일을 부탁하는 것치곤 너무 뻔뻔하지 않나?
“네 마법이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아?”
그때 상념을 깨트리는 그녀의 물음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내 마법···?”
“예전에 레이어드랑 대련할 때 봤어.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뒤에서 나타났었잖아.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거지?”
“···아 그때.”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가야 겨우 희미하게 떠오르는 옛 기억.
확실히 학기 초에 샤론이 설명한 대로의 구도가 펼쳐진 적이 있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주인공인 레이어드의 관심을 끌게 됐었지.
나도 까먹고 있던 옛날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설마 그때부터 나를 주의 깊이 봐왔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괴도일 때의 나와 맞붙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말한 건 아닐까.
자꾸만 그런 의심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를 않는다. 이미 그녀는 내가 아닌 이 배에 탄 살인마를 괴도로 의심 중인데도.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황당할 지경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지금은 이 사건에만 오롯이 집중하기도 벅찬 상황이니까.
까딱 잘못했다간 내 목숨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챙겨야 할 때였다.
“알았어. 한번 해보자.”
우리는 먼저 구체적인 작전을 세웠다. 일단 내 투명 마법은 나 혼자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
즉 샤론까지 투명하게 만들어 손쉽게 식당을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현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작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선 내가 먼저 마법을 통해 문이 열린 틈에 식당을 빠져나간다. 그런 다음 최대한 은밀하게 선원 유니폼을 구해 갈아입어 변장한다.
자연스레 선원인 척 연기하며 다시 식당으로 당당히 걸음을 옮긴 후.
“무슨 일이지?”
“선장이 최초 목격자인 여학생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내가 데리고 가지.”
“뭐?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그래서 내가 직접 내려왔잖아. 뭣하면 네가 직접 올라가서 물어보던가 선장께서 상당히 급해 보이셨는데 어떤 반응이실지 궁금하네.”
“···알았으니까 얼른 데리고 가.”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넘겼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신감이거든.
물론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시도한 건 아니었다. 작전을 실행하기 전까지 선원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면서 분위기를 미리 파악해뒀었으니까.
그렇게 선원 행세를 하며 샤론을 데리고 나가자 그녀가 뒤따라오며 작게 속삭였다.
“연기가 자연스럽네.”
“그래? 나도 몰랐던 재능이 있나 보지.”
최대한 능청스럽게 넘긴 뒤 우리는 슬쩍 경로를 이탈했다.
“변장은 유지하는 게 좋겠어. 순찰 중이던 다른 선원이랑 마주칠 때 변명거리가 필요하니까.”
“어디부터 갈 생각이야?”
식당을 몰래 빠져나오는 건 성공했지만 이건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독자적인 수사를 진행할 차례였다.
“역시 사건 현장부터 확실히 뒤져야겠지.”
“경비가 삼엄할 수도 있어.”
“일단 내려가 본 다음에 생각하자.”
아마 저들도 본인들 나름대로 범인을 수색하고 있을 테니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샅샅이 뒤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단서를 찾기 위해선 그리로 가야 하지만 잘못했다간 선원들한테 발각되어 괜히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크루즈가 상당히 넓어서인지 순찰하는 선원의 눈을 피하기가 생각보다 수월했다. 적당히 인기척이 들리면 아무 객실 방문이나 열고 대충 구석에 웅크리고만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 흐름이 이어졌다.
“흠···.”
“왜 그래?”
“뭔가 이상해서.”
단순히 크루즈가 넓다는 이유 하나 때문인 건가?
그렇다기보단 뭐랄까···. 선원들이 그냥 순찰을 대충대충 하는 느낌인데?
상식적으로 숨어있는 범인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거라면 객실 침대 밑 구석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게 정상 아닌가?
그냥 복도만 어슬렁거린다고 범인이 제 발로 튀어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의문을 얘기해주니 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하네.”
“군기가 빠진 건가? 사실 방금 식당에서도 좀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
지금은 명백한 비상사태다. 고립돼서 도망칠 수도 없는 배 위에 살인마가 숨어있다.
당연히 선원들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범인을 수색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저런 허술한 보안 체계라니. 하다못해 피아식별을 위한 암구호 정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텐데.
하물며 범인이 그냥 일반적인 살인마가 아니라 괴도 레이븐이라고 밝혀진 상태 아닌가.
괴도가 변장과 속임수에 능숙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낯선 선원에게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건 꽤나 의아했다.
“일단 계속 가자.”
“···응.”
의문은 잠시 접어둔 채 우리는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예상과 달리 지하는 딱히 경비가 특출나게 삼엄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더 한산하다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점차 짙어지는 의구심과 함께 도착한 지하 창고.
비밀방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활짝 열려있는 채였다. 달라진 거라곤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뿐.
“이건 말이 안 돼.”
다른 건 전부 그러려니 넘길 수 있어도 이 비밀방에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수사를 하려면 당연히 범죄 현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모든 범행의 결정적인 단서는 현장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비밀방을 방치 해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을 잡을 의지가 없다는 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샤론은 비밀방의 중심에 서서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아무 흔적도 없어.”
“응?”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도 보석을 억지로 훔치려던 흔적도 없어. 여긴 밀실이라 입구를 지키던 피해자가 범인을 못 봤을 가능성도 없는데 말이야.”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피해자가 범인을 마주치고도 가만히 있었다는 거야?”
“맞아. 보석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를 받은 피해자가 이곳에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도 저항하지 않을 만한 사람.”
이 배에 그럴 만한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다.
“꼭대기로 올라가자.”
이 배의 꼭대기 층 즉 함교엔 선장실이 있었다.
***
참 아이러니하게도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경계가 삼엄해졌다.
어차피 이곳에는 범인이 숨어들지도 못할 텐데 선원들은 함교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범인을 수색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곳을 중심으로 마치 지키는 듯한 배치와 움직임.
그런 모습을 볼수록 우리의 추측은 더욱 확신을 더해갔다.
지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난이도의 잠입에 힘겹게 성공하여 마침내 도달한 선장실 앞.
때마침 거기엔 용의자로 좁혀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범인은 언제 잡히는 거야···!?”
보석 주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닦달하자 선장은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며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제 선원들이 열심히 수사하고 있으니 조만간 범인이 밝혀질 겁니다.”
“그 그 보석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거지?! 나만 아니라 너희 목도 싹 다 날아갈 거라고!”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은 협박에 선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일갈했다.
“말은 똑바로 하시지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보석을 운반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습니까. 불안하시면 저희한테 보석을 맡겨달라고. 저 말고 웬 이상한 놈팡이를 믿으시니까 이런 사단이 발생한 겁니다. 처음 보는 놈한테 저희 배의 유니폼을 입히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쯧.”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 짧은 사담만으로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발견했던 시체는 배의 선원이 아니라 보석 주인이 따로 데려왔던 경비였던 모양이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선원 유니폼을 입혔던 거고.
덕분에 둘 중 범인이 누구인지 답이 나온 것 같다.
내가 알아낼 정도라면 당연히 샤론 또한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으리라.
문제는 이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인데···.
선장이 범인인 걸 알았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진 않는다. 지금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배 위에 갇혀 있으니까.
여기서 무작정 선장을 제압한 다음 범인인 걸 밝힌다고 해서 평화롭게 끝날 수 있을까?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간 돌이키기 힘든 혼란이 터져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샤론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제 치과에 갔다왔는데 충치가 없대용!
그런데 스케일링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온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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