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4
“잠시 뒤로.”
그녀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내게 눈빛으로 신호했다. 일단 뒤로 빠져서 얘기를 나누자는 뜻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들의 눈을 피해 조용한 공간에 다다른 뒤 우리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선장이 범인인 것 같지?”
“아마도.”
우리가 찾아낸 대부분의 단서가 선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특히 방금 엿들은 얘기로서 거의 확실시해진 상황.
하지만 샤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직 부족해.”
지금까지의 단서들은 범인을 유추할 심증으로 써먹기엔 충분했으나 남들을 확실히 설득할 물증으로 삼기엔 2% 모자랐다.
막말로 선장이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해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면 역시.
“보석을 직접 찾는 게 확실하겠지.”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보석을 훔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즉 선장에게서 보석이 발견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어디에 있을 것 같아?”
“선장실.”
아무래도 우리의 생각은 일치한 듯했다. 하긴 지금 이 크루즈에서 그곳보다 남의 손길이 닿기 힘든 장소는 없으리라. 경비 인력이 위쪽에만 몰려있는 것도 설명 가능하고.
문제는 선장이 두 눈을 부라린 채 보석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석 주인까지 같은 공간에 머물게 하고 있으니 마법을 쓴다 해도 보석을 슬쩍하는 게 쉽지는 않으리라.
물론 내가 괴도 레이븐으로서 진심을 다한다면 그깟 보석 하나 훔치는 거야 일도 아니다.
하지만 샤론이 옆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어서 대놓고 그렇게 하기도 불가능한 상황.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직접 나가도록 유도하는 거겠지.”
그녀의 말대로 선장이 자리를 비워준다면 남은 문제는 가볍게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보석이 선장실 안에 있는데 순순히 밖으로 나올 리 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짱박혀 있으려 할 텐데.
“선장의 계획을 우리가 역이용하면 돼.”
“선장의 계획?”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그 계획이란 게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범인을 찾기 전까지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있겠다고 했지.”
“그렇지···? 그런데 정작 범인은 본인이잖아.”
말을 듣고 나니까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선장 자신이 범인이니 그냥 빨리 육지에 도착해서 보석을 빼돌리는 편이 훨씬 안전할 텐데 왜 굳이?
잠시 고민해보니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구나.”
“맞아. 보석이 도난당하고 살인까지 발생했는데 그냥 무시하고 육지에 도착해버리면 본인이 제일 먼저 의심받을 테니까.”
“즉 선장으로선 우리가 현장을 목격한 게 악수로 작용했다는 건가.”
만약 우리가 지하에 내려가 비밀방 내부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소란 없이 육지에 도착해 보석을 빼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거면 왜 현장을 엉성하게 방치 해둔 걸까?”
처음 사건 현장을 목격했을 때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현장의 흔적을 지우지 못할 만큼 어설픈 초짜 범인이거나 그마저 계획 일부로 이용할 정도의 노련한 범죄자거나.
지금까지 선장이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면 답은 명백히 후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방금의 추측 내용과 완벽히 어긋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 깊게 생각해보렴. 보석의 가치를 생각하면 결국 범행은 밝혀지게 되어 있어. 중요한 건 타이밍이야.”
그녀가 슬쩍 귀띔해준 힌트를 곱씹으며 추론을 이어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알리바이를 쌓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수사를 진행해놓으면 수사망에서 벗어나기 쉬울 테니까.”
어차피 이 배에서 진행 중인 수사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연출에 지나지 않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과연 그게 생각대로 술술 풀릴 수 있을까?
“프랑크 왕국은 범인을 체포하는 것보다도 보석을 되찾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길 텐데. 선장이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해봤자 순순히 그걸 믿어줄까?”
“선장이 범인으로 지목한 용의자가 누군지 생각해보렴.”
“···아.”
괴도 레이븐. 그 이름은 모든 기본 전제를 송두리째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범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스포트라이트는 보석이 아니라 범인 자체에 집중될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보석이 사라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납득하겠지.
왜? 범인이 괴도니까. 또 무슨 신묘한 수를 써서 훔쳤으리라고 지레짐작할 테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선장으로 향해야 할 의심의 눈초리도 옅어질 수밖에 없을 테고.
진실을 깨닫고 나니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왜 선장이 우리를 딱히 의심하지도 않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나 했더니 어차피 범인을 잡을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 오히려 그로서는 우리가 고맙게 느껴졌겠지. 그가 바라던 대로 범죄 현장을 목격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런 교묘한 간계를 단번에 알아차린 샤론의 추리력에 감탄이 나왔다.
나를 잡으려 할 때도 항상 이런 두뇌 플레이를 펼치고 있던 건가? 내가 밤낮을 새워가며 고심해서 짠 트릭이 왜 매번 그리 쉽게 간파당하나 했더니.
“그래서 선장의 계획을 어떻게 역이용하겠다는 거야?”
내 물음에 샤론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진짜 범인이 되어주는 거야.”
***
“조사는 얼마나 진행됐지?”
“이제 절반 정도 끝마쳤습니다.”
어느새 바다 위에는 화창한 햇살 대신 은은한 달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배가 대양 한가운데 정박한 지 반나절이 넘게 지났지만 선장에게 있어 이 정도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의 맞은편에 있던 보석 주인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다.
“이제야 겨우 반절이라니! 이래서 대체 언제 수사가 끝난다는 거야?! 애초에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건 맞긴 해!?”
신경을 긁는 기분 나쁜 목소리에 선장은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침착하게 상대했다.
“진정하십시오. 범인이 무슨 수로 이 바다 한가운데서 도망치겠습니까?”
“괴도라며! 그놈이면 또 신묘한 마술로 탈출할지 어떻게 알아···!!”
“제아무리 괴도라 할지라도 바다에 빠져 죽으면 익사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도 배의 전속력으로 1시간은 가야 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 건널 거리가 아니죠.”
대충 건성으로 대답을 내뱉으며 선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진짜 괴도가 훔쳤다면 어떨까? 정말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삼엄한 경계를 뚫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뭐 고민해도 아무 의미 없는 잡설에 불과하겠지만.
그의 계획은 너무나 간단했다. 이 웃기지도 않을 수사를 동이 틀 때까지 진행하다가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적당히 지원 요청을 보내는 것이다.
어차피 보석은 오로지 자신만 꺼낼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금고에 넣어두었으니 그 누구라도 찾아내지 못하니 문제없다.
경찰들은 이 사건을 괴도의 소행으로 마무리 짓고 관심을 거두겠지. 녀석에게 훔쳐진 보석을 되찾은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보석은 안전하게 자신이 꿀꺽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완벽한 계획이군.’
자신이 감당해야 할 거라곤 눈앞의 사내가 쫑알대는 불평을 들어주는 것뿐이다. 아직도 몇 시간이나 더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그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면 보석이 제 손에 떨어질 테니 참아낼 수 있었다.
선장이 승리의 축배를 들 듯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던 와중 갑자기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와서는 허락도 없이 선장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뭐 하는 짓이지?”
“죄 죄송합니다! 급히 보고드려야 할 게 있어서···!!”
선원의 무례한 행동에 눈을 찌푸리던 그는 보석 주인을 상대하며 기른 참을성을 나타내었다.
“쓸데없는 일이면 바다에 빠트려주마. 얘기해라.”
“그게···. 괴도의 카드가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푸웁!
마시던 차를 그대로 보석 주인의 얼굴에 뿜어버린 선장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된다. 그야 예고장은 자신이 위조한 가짜였으니까.
그가 준비한 카드는 한 장밖에 없었다. 다른 카드가 추가로 발견될 리 없었다.
순간적으로 선장은 아주 끔찍한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았다.
정말로 괴도가 이 배에 탑승해있을 경우를.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자신의 손에 들어온 보석이 얼마나 값진 놈인지 떠올리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려 일국의 왕에게 진상할 만큼 중요한 보석이 아니던가.
“그 발칙한 괴도 놈이 움직이나 보군!! 아직 이 배에 남아있다는 뜻이니 우리에겐 희소식이야!!”
보석 주인이 얼굴에 뿌려진 홍차 향 에센스는 신경 쓰지도 않고 희희낙락하던 와중 선장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눈을 번뜩였다.
‘그래. 오히려 희소식일지도 모르지.’
감히 겁대가리도 없이 자신의 배에 올라탄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뮹뮹뮹
욤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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