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5
“좀 괜찮냐?”
레이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율리아가 애써 웃으며 답했다.
“응. 좀 쉬니까 나아진···. 우읍!”
“어휴. 나아지긴 개뿔.”
배는 멈춰있지만 넘실대는 파도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반나절이나 지났으면 적응될 법도 한데 율리아는 여전히 뱃멀미의 악몽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그녀를 전담 간호하게 된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홀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얘네들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대뜸 살인 사건을 목격했다면서 따로 불려가질 않나 갑자기 자기들끼리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몰래 식당 밖으로 나가질 않나.
이 크루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그 두 사람이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듯했다.
즐거워야 할 수학여행이 어쩌다 이리 꼬이게 된 걸까. 벌써 하루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크루즈에 더 오랫동안 타 있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식당 안에 억류된 채 자유를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객들의 불만 또한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정이 완전히 망가졌는데 신속하게 대처가 이뤄지긴커녕 외부와 연락조차 두절된 채 밤이 찾아와버렸으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몇 차례 대놓고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아카데미 교수진들 역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선원들에게 해결책을 요구해보았으나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고작 불편하다는 이유로 통제를 풀어달라는 겁니까? 당장 이 밖을 나돌아다니다 괴도가 또 누군가를 더 죽여야 입을 다무실 겁니까?”
“그렇다고 천년만년 괴도를 찾을 때까지 바다 위에 영원히 떠다닐 생각이오?”
“동이 틀 때까지 범인을 찾지 못하면 선장님이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하셨으니 그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허···. 이러고도 반나절을 더 있어야 한단 말인가?”
꼼짝없이 하루 전체를 날려버릴 처지가 되자 사람들의 민심은 바닥으로 치달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선장을 믿고 기다려보자던 몇몇 사람들조차 실망감에 등을 돌려 사실상 승객 전체의 반감을 사게 된 상황.
그런 와중에서 알음알음 출처 모를 소문이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뭐? 새로운 카드?”
레이첼은 자신들에게 문제의 뜬소문을 알려준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응! 아무래도 괴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
“확실해? 카드가 어디 있는데?”
“한 선원이 식당 바깥 문 앞에 꽂혀있던 걸 발견했다던데? 그래서 바로 선장한테 가져갔다고.”
“그러면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래서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거구나. 괴도가 이 안에 숨어있다는 명분으로 지금껏 억압했던 건데 그게 전부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는 게 밝혀진 셈이니 말이다.
“카드의 내용은?”
“그거까지야 우리도 모르지.”
“아니. 반드시 알아야지. 선장한테 강하게 요구해서라도.”
처음 발견됐다던 카드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괴도이며 이 배에 있는 보석을 훔치겠다는 아무 영양가 없는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카드가 등장했다는 건 괴도가 다른 할 말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승객들 역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선장이 그마저도 협조하지 않고 카드의 내용을 비밀에 부친다면 그때야말로 크루즈 내의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화르륵 불타오르리라.
그리고 나름 머리가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선장 본인 또한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저 선장님···. 승객들이 카드의 내용을 밝히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도 알아! 벌써 그 얘기만 몇 번째야!?”
“하지만···. 정말 무시하면 문이라도 부술 기세여서···.”
선장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독한 럼주를 위장 속으로 때려 부었다.
어디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 거지? 분명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을 텐데.
그 망할 괴도가 이 배 안에 타고 있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하필 변명으로 둘러댄 괴도가 진짜 있느냔 말이다.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다. 승객들을 억류해놓으면 반발이 뒤따르리란 것쯤은 진작에 예상했었다.
그럼에도 감행한 이유는 살인 사건이라는 무게감과 괴도 레이븐의 이름값이면 사람들을 공포로 찍어눌러 움츠러들게 할 수 있으리란 계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계획은 잘 먹혀든 것처럼 보였다. 승객들은 무려 반나절이나 식당 안에 갇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음에도 자리에 앉아 투덜거릴 뿐 그 이상의 과격한 항의는 뒤따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런 변수가 뒤따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진짜 괴도가 나타나서 새로운 카드를 남겨 놓다니. 이걸 대체 무슨 수로 예측한단 말인가?
덕분에 모든 계획이 꼬이고 말았다. 그 망할 카드 한 장 때문에 여태껏 억눌려왔던 승객들의 공포와 분노가 임계점을 뚫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당연히 승객들의 요구에 따라 카드를 공개하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카드에 적혀있는 내용이 아무리 봐도 공개했다간 더 쫄딱 망하는 지름길이었으니 그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였다.
[거짓말쟁이 독재자는 언제나 대가를 치른다. 그의 권력은 덧없이 무너질 것이며 그가 챙긴 보화는 가짜 돌멩이가 되리라.]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쟁이 독재자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것이다. 당장 이 크루즈선에서 독재자라 칭할 만한 인물은 한 명뿐이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거짓말쟁이가 뜻하는 바도 눈치채게 되겠지. 그 순간 자신은 끝난다.
바다 위에 고립된 배라는 환경은 큰 무기가 될 수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되려 자신의 미간을 겨눌 수도 있으니.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카드를 보여주지 않고 대충 말로 둘러대봤자 사람들은 실물을 보여줄 때까지 진정하지 않으리라. 지금 와서 카드를 날조하자니 꾸며낼 재간이 없다. 준비해뒀던 가짜 예고장은 한 장밖에 없었으니까. 카드 자체가 없던 거라고 부정하기엔 이미 카드를 발견해 이곳까지 건너오며 봤던 선원들의 눈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 그를 더 옥죄어오는 예고장의 뒤의 문구.
[그가 챙긴 보화는 가짜 돌멩이가 되리라.]
괴도가 자신의 보석을 노리고 있다. 언제 가짜와 바꿔치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선장은 당장이라도 비밀 금고를 열어 보석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괴도는 못 배운 하층민이라 말도 똑바로 못하는가?”
한편 세상 태평하게 예고장을 이리저리 살피며 헛소리를 나불거리는 보석 주인.
저 식당 안에 억류된 승객들이 다 저자처럼 머릿속이 텅텅 비어있으면 좋으련만.
상류층은 대체로 배움의 기회가 많은데다 저기엔 마법 아카데미 학생들까지 섞여 있지 않던가. 본래 마법사란 쓸데없이 머리만 좋아 음흉하기 그지없는 작자들이니 카드의 문구도 금방 해석해낼 것이다.
고민이 거듭되며 그의 미간 주름이 깊어져 가던 때 선장실을 들락거리며 상황을 보고해주던 부선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주저하다 얘기를 꺼냈다.
“선장님. 이젠 승객들뿐 아니라 밑의 선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른 조처를 취하시지 않으면···.”
배 위에선 언제나 상명하복의 규율이 진리처럼 받들어진다. 바다 한가운데서 반란이라도 일어났다간 모두가 물고기 밥이 되는 끔찍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런 선원들 사이에서 선장을 향한 의문이 발생했다는 건 최악의 사태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망할 괴도 레이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카드 한 장 끄적인 걸로 자신의 완벽했던 계획을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있는 녀석의 술수에 이젠 무섭기까지 할 지경이다.
선장은 파이프 담배를 꼬나문 채 한참을 사색에 잠겨있다 부선장에게 말했다.
“카드엔 혼란을 부추기기 위한 불온한 내용만 있으므로 공개하지 않겠다고 승객들에게 말해라.”
“···네.”
“그리고 지금 당장 프랑크에 지원을 요청해야겠다. 괴도가 변장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내가 직접 다녀오지.”
“알겠습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보석 주인이 소리쳤다.
“나도 같이 가겠다!!”
“프랑크 왕실에 직접 도움을 요청할 생각인데 정말 같이 가실 겁니까? 보석을 잃어버렸다고 전하께 직접 말씀하셨다간···.”
“으음. 생각해보니 나는 여기를 지키고 있는 게 좋겠어···. 혹시 괴도가 난리를 피우면 내가 제압해야 할 테니까 말이지.”
순식간에 태도가 급변하는 보석 주인을 빤히 쳐다보던 선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이 늦었습니다. 피로하실 텐데 슬슬 객실로 들어가 잠을 주무시죠. 저는 나갈 채비를 마쳐야 해서. 부선장은 보트를 준비해주게.”
“네. 바로 준비해놓겠습니다.”
불청객들을 억지로 내보낸 뒤 혼자 남게 된 선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전 변경이다. 끝내 요구를 거절당한 승객들의 반응이 걱정되지만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
보석을 챙겨 육지에 숨겨둔 다음 지원을 요청하고 다시 배로 돌아오면 된다.
그땐 누가 뭐라 하던 시치미를 잡아떼면 끝이다. 어차피 확실한 물증이 없는 이상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질 리는 없다. 괴도가 이 배에 진짜 있는 이상 범인은 무조건 녀석이 될 테니까.
선장은 얼른 출발하기 위해 서둘러 비밀 금고를 열어 보석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거기 숨겨뒀었구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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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네임]님도 감사한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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