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2
“···반란이요?”
“그렇다.”
순간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나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고 말았다.
그만큼 너무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막말로 이 나라에 반란을 작당하는 역모들이 있건 혁명의 불씨를 꿈꾸는 저항군이 있건 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
특히 괴도 추종자 때 비슷한 일로 골머리를 썩였던 경험 때문에 정치·사상 문제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뭐가 됐든 그냥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내가 속한 자국 브리타니아에서도 그럴진대 전혀 관계없는 이웃 나라 사정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지금 이 여왕님은 내게 이런 얘기를 꺼내시는 걸까.
“···이건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직 부탁의 내용을 다 듣지도 않고 어떻게 그걸 확신하느냐?”
아니 끝까지 듣고 자시고 간에 첫마디만 들어도 알 수밖에 없잖아.
일국의 반란을 무슨 수로 학생 둘이서 해결하란 말인가?
“일단 얘기만 들어보거라. 거절은 그 이후에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왠지 함정에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본인이 직접 언제든 거절해도 된다고 말했으니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설마 한 나라의 군주가 쪼잔하게 한 입으로 두말하겠어?
“사실 짐도 반란에 대한 정보를 건네받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감히 짐의 등에 칼을 꽂으려 하는 잔악무도한 무리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지.”
쓸데없이 서론이 기네. 그냥 본론만 말해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조용히 그녀의 얘기가 이어지길 기다렸다.
“짐이 반란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제 손에 들린 붉은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가져온 블러드문이 반란의 열쇠였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살짝 불길하다 싶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더럽게 꼬여있었을 줄이야. 그냥 괜한 호기심 갖지 말고 수학여행이나 즐기는 게 답이었는데.
“본래 이 보석을 챙겨오는 역할은 다른 자가 맡고 있었다. 당사자가 없으니 하는 말이지만 엑쥐페리 자작은 아둔하고 이기적인 작자니까. 그런 얼간이한테 중책을 맡길 수는 없지.”
“······.”
너무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거 아니야?
물론 그 말 자체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그래도 자기한테 충성하는 신하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원래 임무를 맡았던 백작이 반란 세력을 지원하는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더군. 이 보석 역시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가짜와 빼돌리다 짐이 붙여놨던 심복에게 덜미를 붙잡힌 거지.”
과연 그래서 블러드문이 반란을 눈치채게 해준 단추였다는 거구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브리타니아에 나가 있던 엑쥐페리 자작을 사용한 거고. 그는 멍청하고 배포가 작아 반란에 가담할 만한 용기가 없을 테니. 자기보다 위라고 판단되면 바짝 엎드리는 사람이거든.”
그런 이유로 왕한테 신임을 받다니. 장본인인 엑쥐페리가 이 사실을 들으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그래도 왕이 자기를 믿는다고 하니 어쩌면 좋아할지도.
“그 탓에 바보같이 뱃사공 따위한테 보석을 뺏길 뻔하긴 했지만. 쯧.”
음. 역시 그냥 모르는 채로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세상에는 괜히 알아봤자 좋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도 있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크루즈 선장이 이렇게 무시 받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는데. 우리가 우연히 배에 타 있지 않았다면 보석을 영영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상당했다. 물론 지금 여왕의 반응을 보니 어떻게서든 다시 찾아냈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지만.
“아무튼 이 보석 덕분에 짐을 끌어내리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그 후견인인 백작을 심문해 최대한 정보를 뜯어내려고 노력 중이지.”
당연하게도 저 심문 과정이 평화로울 리는 없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싹한 고문이 얼마나 이어졌을지.
“다만 같잖게도 체계를 꽤 잘 잡아놓은 건지 후견인인 백작조차 조직의 모든 걸 알진 못하는 모양이더군. 얼마나 많은 귀족이 엮여있는지조차 섣불리 확신할 수 없다 보니 누군가를 함부로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단순히 평민들만 뭉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차라리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 그것도 백작이라는 꽤 높은 신분의 귀족이 연관된 이상 다른 귀족 또한 엮여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밝혀낸 건 단 세 가지. 첫째는 그놈들은 스스로를 ‘레지스탕스’라 부른다는 것.”
레지스탕스.
너무나 익히 들어본 유명한 명칭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선 사실상 저항 조직 자체를 뜻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은 단어이며 그 시작이 다름 아닌 프랑스라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다.
아마 시간대는 지금보다 좀 더 뒤인 2차 세계 대전쯤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 세계에서는 벌써 등장한 모양이다.
“둘째로 레지스탕스는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퍼져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
두 번째 정보 역시 여왕이 해줬던 얘기 속 정보를 토대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브리타니아에 파견되어 있던 백작이 그곳에서 덜미를 붙잡혔다는 건 그와 협업해 보석을 빼돌릴 연결책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바다 건너 런던에도 있다면 국경선이 붙어있는 다른 유럽 국가도 레지스탕스들이 점조직으로 퍼져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리고 셋째. 런던에 있는 조직의 수장이 줄리엣이라는 이름의 여성이라는 것까지.”
···뭐라고?
잠깐만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은.
‘미친.’
맙소사.
***
크로가 샤론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알현실에서 여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같은 시각 바다 건너 런던의 한 회사에서 은밀한 밀담이 오갔다.
“보석이 파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번 임무는 실패군요.”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에요. 설마 거기서 덜미를 붙잡힐 거라곤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요.”
한 소녀와 매우 닮은 외형 금발에 녹안의 소녀는 차를 홀짝이며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요. 이사님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라면 제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데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으니까요.”
뤼팽 제단의 대표 이사는 현재 개인적 용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 그 덕에 재단의 업무는 비서인 줄리엣이 전부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녀 혼자서 해내기엔 버거울 수 있는 업무량이었으나 수상할 만큼 유능한 신입 직원들을 대거 채용한 덕분에 재단은 매우 성황리에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이사님은 지부장님을 신임하는 것 같습니다. 벌써 이렇게 모든 걸 믿고 맡길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요.”
“여기선 비서실장님이라고 부르세요. 남들이 들을 수도 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부하의 말을 들은 줄리엣은 잠깐 생각에 잠겨 그녀의 상사인 뤼팽을 떠올렸다.
“착한 사람이죠. 세계 평화라는 바보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당장 이 재단만 하더라도 영리를 최우선으로 추구한다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뤼팽 재단은 그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비영리 즉 사회 공헌에 맞춰져 있다.
고아원을 지원하며 병원과 연계하고 학교를 설립한다. 돈을 버는 거야 어디까지나 앞선 봉사 활동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걸로도 부족해 자신의 개인 재산까지 털어 넣으니 어떻게 저럴 수 있나 감탄이 나올 정도.
그런 순수한 사람을 이용하는 듯한 느낌에 살짝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재단 기금에 손을 대거나 재단의 이름을 자신들의 활동에 써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자신과 부하들이 런던에서 지낼 일자리와 자금을 정당하게 벌 뿐이다. 그 대가로 직원으로 일할 동안에는 최선을 다하니 말하자면 서로 이득을 보는 공생 관계라 할 수 있겠지.
“혹 그분이 비서실장님의 정체를 눈치챌 위험은 없으십니까?”
“음···.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살짝 걸리는 점이 있긴 하네요.”
얼마 전 자신의 집에 누군가 침입했던 것 같은 흔적을 발견했었다. 처음에는 본국에서 파견 나온 요원이 아닐까 했으나 무언가 손댄 것 같지도 않고 그 이후로 자신에게 이렇다 할 변화가 생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의혹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구일까? 생각이 이어질수록 용의자로 떠오르는 사람은 뤼팽밖에 없었다.
이 런던에서 그녀의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해봤자 고아원 원장과 그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 범인이라면 무슨 이유로? 왜 확인을 하고서도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결국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할 증거도 없으니 일단 덮어두고 지켜보자는 미봉책 정도가 현시점의 최선이었다.
줄리엣은 상념을 그만두고 다시 한번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한가롭게 잡담이나 떠들자고 비서실까지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뭔가요?”
“본국에서 새로운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남자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프랑크로 이동하십시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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