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3
“···하아.”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상황은 내 생각과는 너무 다른 흐름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뒤에 아카데미 일행과 합류해 힐링 수학여행을 즐기고 있어야 할 텐데.
막상 현실은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답을 보류한 상태로 왕실 별채에 들어와 버렸다.
줄리엣이라는 이름 단 하나 때문에.
나는 괜스레 그녀와 쌍둥이처럼 똑 닮은 샤론을 흘깃거렸다. 이런 순간에서조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마음을 읽기 힘든 무표정.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괜찮아?”
“어떤 게 말이니?”
“내가 상의도 없이 혼자 대답해버렸잖아.”
내 얘기를 들은 샤론은 되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내가 기억하기로 너는 알겠다고 대답한 게 아니라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여기 우리가 온 이유도 지금부터 상의하기 위해서 아니니?”
“아니 뭐···. 그렇긴 한데.”
내 시원찮은 반응에 그녀는 살짝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구나.”
“···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이런 천재지변 같은 상황에서 나한테 사과할 이유가 전혀 없잖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논리적 압박에 허둥대다 겨우 변명을 내놓았다.
“그거야 나 때문에 지금 여기서 기다리게 됐으니까···.”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걸 네 책임이라 할 수는 없어. 그렇게 따지면 처음에 왕이 초대했을 때 거절하지 못한 건 왜 사과하지 않았니? 그랬다면 애당초 지금 여기 이러고 있을 이유도 없었을 텐데.”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샤론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과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이 상황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뜻이겠지. 즉 방금 여왕이 얘기한 상황에 어느 정도 엮여있다는 뜻이려나?”
감탄이 나오다 못해 어이가 없게 만들어버리는 그녀의 추리력에 반박할 의지조차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뭐 어떻게 하면 말 한마디에서 저런 결론을 도출해낸단 말인가.
“여왕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아마 레지스탕스라는 조직에 대해 알고 있거나 줄리엣이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구나.”
혹시 내 속마음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완벽한 추리였다.
이윽고 샤론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뭐가 정답이니?”
어떻게 해야 좋을까.
솔직히 말해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끝까지 잡아떼면 샤론으로서도 뭔가를 더 알아낼 방법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심증적으로는 거의 다 까발려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 거기다 현재로서는 그녀만큼 믿을 만하고 든든한 아군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미 내 정체가 괴도 레이븐이라는 가장 큰 비밀도 까발려진 마당에 다른 걸 굳이 악착같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줄리엣의 안위였다.
막말로 그녀가 타국의 스파이든 레지스탕스건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싶다. 그런 복잡한 문제에 엮이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그런데 이미 엮여버렸잖아. 너무 유능해서 수상하다 싶던 부하 직원이 알고 보니 타국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전복하려는 반동분자였다니.
자칫 잘못하면 이 불길이 나한테까지 번질지도 모르는 수준의 규모다. 게다가 줄리엣이 없으면 뤼팽 재단 역시 더는 지금처럼 잘 굴러가긴 힘들겠지.
한참의 고민 끝에 일단 샤론에게는 전부 사실대로 얘기해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하나씩 설명하려니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졌다.
괴도로 훔친 장물을 처리하기 위한 신분인 뤼팽과 그를 위한 재단의 설립. 후원하던 고아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셜록을 닮은 여인. 비서로 영입한 뒤에 발견해낸 수상한 정황. 그리고 방금 여왕의 얘기를 통해 깨닫게 된 정체까지.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던 샤론은 턱을 짚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살짝 의심은 했었는데 정말 네가 뤼팽이었구나.”
“···그것까지 눈치챘었다고?”
“확신은 없었어. 긴가민가해서 혹시나 하는 정도였지.”
정체를 숨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런데도 완전히 속이는 건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상황은 대충 이해했어. 네 재단에서 일하는 여직원이 아까 여왕이 말했던 조직의 간부라는 거지?”
“응. 나도 몰랐는데 아마 그런 것 같아.”
사실 여태까지는 그냥 프랑크 왕국에서 건너온 스파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타지에 숨어 혁명을 꿈꾸는 레지스탕스였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샤론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는 솔직한 본심을 털어놓았다.
“줄리엣이 이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건 런던에 있을 땐 뤼팽 재단의 유능한 비서야.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나도 그녀를 먼저 배신할 생각은 없어.”
“즉 숨겨주겠다는 거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들은 샤론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됐네.”
“···됐다고?”
“응. 우리가 손댈 영역이 아닌 것 같다고 거절한 다음 돌아가면 되잖니.”
이게 그리 쉽게 끝낼 수 있는 문제였었나?
“여왕이 순순히 받아 들여줄까···?”
“못 받아들여도 뭐 어쩌겠어. 타국 출신에다 아카데미 학생 신분인 우리를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가 건넨 부탁을 이렇게 거절해도 괜찮은 걸까.
현대에서 건너온 내가 오히려 왕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걸지도.
“그래. 거절하자.”
마음을 굳게 먹은 뒤 우리는 다시 여왕을 마주하기 위해 알현실로 향했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맞이해주었다.
“오! 왔구나. 그래. 마음은 정하였느냐?”
말을 꺼내기가 꽤 힘들었지만 최대한 예의 바른 태도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둘이서 상의해봤으나 아무래도 저희가 끼어들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 같습니다. 당장 학업에 집중하기도 벅찬 상황인지라 도와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안색이 눈에 띄게 침울해지는 여왕. 괜히 죄책감이 슬그머니 피어오를 만큼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짐도 많은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줄리엣이라는 이름을 지닌 자를 발견하면 알려줄 수 없겠나···?”
이것까지 거절하기엔 딱히 둘러댈 명분도 마땅찮은데다 솔직히 울먹이는 눈망울로 간절히 쳐다보는 여왕이 너무 불쌍했다.
하긴 그녀로서는 하루하루 살 떨리고 무서울 수밖에 없으리라. 잘 자다가 대뜸 암살자가 들이닥쳐 칼을 꽂을 수도 아니면 매일 먹던 식사에 맹독을 타 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매일 느낀다고 생각해봐라.
결국 여왕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대충 말끝을 흐리며 적당히 대답했다.
“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 고맙다. 역시 그대들을 만나길 잘한 것 같구나.”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다시 처음 봤을 때의 여유롭고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게 만들어진 가면이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속내는 아까 봤던 울먹이는 표정과 비슷하겠지.
그 뒤로도 몇 차례나 도와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전해 듣고 난 뒤에야 우리는 겨우 왕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막상 시간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진이 싹 빠진 기분이다.
“폐하와 얘기는 잘 나눴나?”
접객실에서 여유롭게 우리를 기다리던 엑쥐페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내역이던 자기까지 물려놓고 여왕과 무슨 밀담을 나눴는지 궁금한 거겠지. 미안하지만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아마 본인도 생각이 있다면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폐하가 뭐라던?”
“······.”
음. 깜빡했다. 이 작자는 생각이란 걸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려드리는 건 상관없는데 여왕님께서 싫어하실 수도 있어요.”
“크흠! 그 그러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확실히 여왕의 말이 이해가 간다. 멍청해서 반란을 작당할 그릇이 되지 않으니 믿을 만하다고 했던가. 자기보다 윗사람이라고 인식하면 무조건 넙죽 엎드리는 타입인 듯했다.
“흠흠. 아무튼 수고했다. 지금 아카데미는 에펠탑을 구경 중이라더군. 거기까지 내 마차로 데려다주마.”
“감사합니다.”
뭐가 됐든 드디어 끝이구나. 기나긴 인고 끝에 마침내 달콤한 휴식을 맛볼 시간이었다.
엑쥐페리의 마차를 타고서 파리 풍경을 둘러보며 에펠탑 앞에 도착했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오면 좋겠군.”
글쎄. 나는 두 번 다시 안 보면 좋겠는데.
“그럼 조심히 가라!”
“네. 감사합니다.”
적당히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에펠탑의 마르스 광장을 가로질렀다.
“애들은 어디 있지?”
“조용하네.”
샤론의 말대로였다. 한낮의 파리라기엔 어쩐지 너무 고요한 주변.
그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던 순간 눈앞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여인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어머 오랜만에 뵙네요.”
예언의 마녀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용??
뮹뮹은 쪼끄마한 사촌동생과 놀아주느라 너무 힘들었던 거에용..
그치만 귀여우니까 용서해주기로 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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