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6
[자유 평등 우애]
그 세 단어의 나열을 보는 순간 지금 사태의 배후가 어디인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레지스탕스.
프랑크 왕실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설립하려는 그들이 아니고서야 현실 프랑스의 이념을 똑같이 언급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용의 선상을 좁혔으나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체 왜 레지스탕스가 난데없이 우리를 습격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낙서가 새겨진 현장을 둘러보았다.
일단 이곳에서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 바깥에서 터진 듯한 폭발의 흔적을 살펴보다 아래쪽 마당에서 웅성대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내렸다.
3층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여학생들이 다들 어느 틈엔가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유의미한 단서를 더 얻기는 어려울 거라는 판단하에 나도 바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즉시 창가로 뛰어내려 풀밭에 사뿐히 착지하자 아이들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쏠렸다.
원래라면 이런 불필요한 관심은 최대한 지양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쪽에 신경을 쓸 타이밍이 아니었다.
“크로! 무사했구나! 그런데 방금 3층에서···.”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는 율리아와 레이첼. 다행히 두 사람을 비롯해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전부 무사한 듯했지만 막상 가장 중요한 한 명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넘실대던 불안한 예감을 애써 억누른 채 물어보았다.
“샤론은···?”
그러자 레이첼이 인상을 한껏 찡그리며 되물었다.
“방금 네가 내려온 곳이 걔가 머물던 방이잖아. 너야말로 못 봤어?”
“······.”
간신히 혼란이 잦아들고 인원 체크를 끝내고 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샤론을 제외한 모두가 무사하다. 오로지 샤론 단 한 명만이 사라졌다.
이로써 레지스탕스가 테러를 일으킨 이유가 샤론 때문이었음이 확실해졌고 정황상 그녀가 납치당했으리란 예측도 가능했다.
그녀는 룸메이트 없이 혼자 방을 쓰고 있었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긴 힘들었다.
당연히 아카데미 측은 난리가 났다. 수학여행으로 다른 나라에 머무는 동안 학생을 상대로 테러 납치 사건이 벌어지다니.
첫날 크루즈 사태도 사소한 해프닝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수준마저 넘어서 버렸다.
교수진은 즉시 비상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샤론과 가장 친분이 있으며 사건에 대해 잘 알만한 동급생 나 역시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모리스 군. 혼시아 양의 행방이나 범인에 대해 짐작 가는 내용이 있습니까?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뭐든 얘기해주십시오.”
잠시 고민했다. 과연 이걸 사실대로 말해도 좋은가? 애초에 내가 용의자를 레지스탕스로 판단한 근거부터가 현실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 이상 교수들은 내 주장을 납득하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무작정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다른 건 둘째치고 아카데미는 지금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 중 하나다.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면 샤론을 구할 가능성도 대폭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적당히 진실을 섞어서 말하는 거였다. 이튿날에 여왕의 초대를 받아 레지스탕스라는 조직에 대한 정보를 듣고 도움을 요청받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언급했다.
어쩌면 그 정보가 새어 나가 위협을 느낀 상대 쪽에서 먼저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함께.
웬만해선 굳이 밝히려 하지 않았던 내용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샤론을 구하기 위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얘기를 들은 교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해결책을 논의해갔다.
“일단 프랑크 아카데미와 궁정 마법부 측에 도움을 요청합시다. 또한 모리스 군의 말이 사실이라면 왕실 측에도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겠죠.”
왕이 아무런 절차도 밟지 않고 학생들에게 위험한 정보를 떠들어댄 바람에 위험해지고 말았다.
만약 이 일이 공론화되면 자칫 잘못했다간 양국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 그런지 아카데미 역시 추격과 탐색에 특화된 교수들을 선발해 따로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라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 측에 전부 맡긴 다음 느긋하게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뭐? 잠깐. 이런 상황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위험해. 자네 역시 표적일 수 있으니 그냥 안전하게···.”
교수들이 무어라 말하며 떠들어댔으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꾸물거릴 틈이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 샤론이 어떤 상태일지 알 수 없으니.
동이 트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만 한다.
***
범인이 레지스탕스인 건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작 며칠 지낸 게 전부인 낯선 타지에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꼭꼭 숨어있을 비밀 결사의 아지트를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막막함이 앞섰지만 돌이켜보니 단서가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왕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막고 있는 경비병은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잠입했다. 지금 의례적인 절차를 전부 밟으며 입성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와 달리 옆에 신분을 보증해줄 만한 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여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그냥 무시당할 가능성이 컸다.
왕궁의 대략적인 구조는 어제 눈으로 전부 훑어놓은 상태였다. 가장 경비가 허술한 루트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여왕이 있을 침소로 향했다.
아직 여명도 밝지 않은 한밤이다 보니 여왕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태평 좋게 꿈나라를 여행 중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지막이 그녀를 깨웠다.
“일어나십시오.”
다행히 여왕은 곧장 일어났다. 원래부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 걸까? 완전히 깨지 못해 반쯤 뜬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둠 속에 숨어있던 나를 한동안 바라보던 여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짐을 죽이러 온 것이냐.”
“그런 거였으면 깨울 필요도 없이 바로 죽였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네놈의 목적은 무엇이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그녀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었다. 내 정체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커다래진 눈동자를 몇 차례 깜빡거리던 여왕은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직 꿈속인 건가? 꽤 귀엽다곤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꿈으로 떠올릴 정도였다니.”
“제 친구가 레지스탕스에 납치당했습니다.”
“······.”
그제야 지금 상황이 현실이란 걸 깨달은 건지 여왕의 표정이 다소 딱딱하게 굳었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자세히 물었다.
“놈들이 확실하나? 그자들이 왜 너희를···. 아니 알 것도 같군.”
여왕 또한 내가 변명으로 둘러댄 이유와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먼저 움직였다.
언뜻 들으면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정말 그런 이유였다면 왜 나를 빼고 샤론만 납치한단 말인가? 정작 내가 여왕과의 대화를 주도했고 샤론은 그냥 옆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파괴된 파리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이상하다. 만약 그들이 정말 우리가 방해될 것 같다는 목적으로 움직인 거라면 굳이 그런 미래를 보여주며 나한테 경고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실제로 줄리엣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동이 트기 전까지 샤론을 찾아내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뭐가 됐던 이유는 샤론을 찾아낸 다음에 천천히 밝혀내면 된다. 지금은 우선 레지스탕스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내는 게 먼저였다.
방법은 이미 생각해두었다.
“어제 저희한테 했던 부탁 들어드릴게요.”
“그건 이미 얘기가 끝난 문제 아니더냐?”
“줄리엣에 대해 알려드릴 만한 정보가 있어요.”
내 말을 들은 여왕의 기세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까까지의 느슨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날카롭게 벼려진 군주의 카리스마였다.
“왜 어제 얘기하지 않았지?”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거든요.”
“지금은 다르다는 건가. 그래. 뭘 원하나?”
번거롭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
상대가 미사여구 없는 즉답을 원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런던에서 잡았다던 그 귀족 배신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내가 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레지스탕스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감히 괴도의 것을 훔치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되찾아주고 말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뮤우웅…
덥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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