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9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기억 속에서 잊고 지냈었다.
드레이크와 라파노.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밀회.
그 현장을 훔쳐보다 정원에서 맞닥뜨린 압도적인 기세를 풍기던 존재.
간신히 도망친 뒤에 대체 상대의 정체가 무엇일까 추측해보았으나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었지.
그 이후 드레이크가 완전한 광신도로 각성한 추종자들에게 당한 뒤 다른 사건들을 겪으며 자연스레 그날의 살 떨리던 순간은 기억 저편으로 흐릿해져 버린 것이다.
왜 그리 안일하게 까먹은 걸까. 생각해보면 나를 위협할 압도적인 강자. 못해도 드라칸이나 집행자와 견줄 정도의 상대가 누구인지 가늠조차 못 하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와서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들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날의 잘못이 현재 실시간으로 나를 위기에 빠트리고 있었다. 몸을 돌려 정면을 마주 본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그때와 같은 압도적인 기세를 풍겼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나는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 단순히 보석들을 통해 마력을 키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신을 비롯한 초월적인 존재와 몇 번이나 마주하며 일종의 격 자체가 상승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렇다 해도 상대는 너무 강했다. 지금껏 내가 마주친 적들 가운데 이렇게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던가? 적어도 내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상대 중에선 분명 첫 손에 꼽히겠지.
기억을 떠올려보자. 지금과 맞먹는 수준의 위기가 닥쳤던 상황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초창기 레이첼을 구출해낼 때다. 난데없이 드라칸의 표적이 되어버린 그녀를 구하려고 드라칸의 일원인 지크프리트와 대치했었지.
사실 그때는 전투라는 표현이 민망한 수준이다. 내가 한 거라곤 상대를 알아차리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 게 전부니까. 그마저도 중간에 레이첼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으면 무조건 죽었을 테고.
두 번째는 궁전에서 집행자 부장인 에반 레지널드와 싸우던 순간이다.
이때는 그나마 전투라고 할 법한 공방이 몇 번 이어지긴 했지만 시종일관 구도는 압도적이었으며 그마저도 상대가 내내 봐줬기 때문에 이어진 구도였다.
애초에 에반은 나를 스카우트할 속셈이었으니 내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적당히 어울려준 것뿐이겠지.
그 후로도 몇 차례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위기 순간은 있었으나 그 둘만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압도적인 격차를 느끼게 한 상대는 없었다.
한마디로 눈앞의 적은 그 둘과 최소한 동급 수준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
“무얼 그리 깊게 생각하느냐. 그리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확신이 섰다. 지금의 나는 저자를 이길 수 없다. 아마 무슨 수를 써도 상대를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와 별개로 도망은 가능할 것이다. 이미 지난 두 차례의 압도적인 강자에게서 도망쳤듯 이번에도 내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면 그로부터 달아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샤론이 붙들려 있으니까.
그녀를 챙겨서 함께 도망칠 수 있을까?
글쎄. 전투에서 이기는 것보다야 가능성이 크긴 하겠지만 솔직히 큰 자신은 없었다.
내 몸 하나만 건사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의식을 잃은 소녀까지 책임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갖 방법을 떠올려보았으나 무엇을 선택하든 눈앞의 백작이 그걸 순순히 허용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전투도 도주도 아니었다.
잠깐의 유예. 선고가 내려지길 최대한 늦추며 어떻게든 시간을 질질 끄는 것.
“···하나만 물어볼게.”
“그래. 무엇이 궁금한가.”
다행히 백작은 순순히 내 문답에 어울려주었다. 나 같은 것쯤은 언제든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강자의 여유일까? 오만한 방심에 불과한 걸까? 그게 아니면 상대도 무언가 숨겨진 속내가 있는 걸지도. 뭐가 됐든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샤론은 왜 납치한 거지? 네 목적이랑은 아무 관련 없을 텐데.”
“우스운 말이구나. 네까짓 게 내 목적을 간파했다는 말이냐? 넌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조종당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을.”
“······.”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최근 겪어온 사건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급물살에 휘말려 원하지도 않게 이리저리 휩쓸린 모양새니까.
특히 시간의 여신을 만나 얘기를 나눈 뒤부터는 그런 불길한 생각이 더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설령 내게 이미 비참한 최후가 정해진 운명이라 하더라도.
나는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움직일 것이다.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지금 샤론을 구하려는 것은 오롯한 내 자발적 의지였으니까.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됐어.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상대는 처음으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호오. 제법 의연한 태도구나. 정말 궁금하지 않은 것이냐? 너를 둘러싼 기묘한 일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을 터인데?”
“듣다 보니 거슬리는데 너는 마치 전부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마녀와 신조차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는 ‘예언’을 한낱 인간이 무슨 수로 파악했을까. 내가 보기엔 너도 그냥 적당히 주워들은 키워드로 장난질을 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
하물며 예언의 주인공으로 점찍어진 나조차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이 수상쩍은 반동분자 테러리스트가 모든 진실을 파악했다고?
이건 전투력과 별개의 문제다. 드라칸은 물론 집행자 역시 예언에 관해서는 전혀 모를 테니까.
확신할 수 있다. 예언의 내용은 초월적인 존재만이 알아낼 수 있다고. 또한 그런 초월자들조차 그 내용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내 지적을 들은 백작은 허를 찔렸단 반응과는 전혀 동떨어진 오히려 기세등등한 미소를 더욱 선명히 그려내었다.
“궁금하다면 알려주마. 내 정체와 예언의 내용까지도.”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리는 제안. 얼핏 그 말은 달콤하면서 아찔한 속삭임과도 같았으나 이미 내 마음속의 저울추는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필요 없어. 네가 하는 말은 별로 믿을 만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너와 함께하는 거짓의 여신이 하는 말은 믿을 만한가?”
나는 순간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방금 그가 꺼낸 한마디는 지금까지 나눈 무의미한 대화를 전부 무너뜨리고 폐부를 비수처럼 찔러 들어왔다.
그 누구도 나와 함께 있는 여신님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은 지크프리트와 에반 레지널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사람은 절대 불가능한 일. 그렇지만 단 두 가지의 예외 경우가 있었다.
첫째는 초월자. 마도공학 협회의 부회장인 오퍼레이터와 호수의 요정 비비안은 나를 보자마자 여신님의 존재를 깨달았었지.
하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초월자일 리는 없다. 이미 몇 차례나 초월자와 대면하며 그들이 내뿜는 아우라는 절대 잊을 수 없다. 전투력의 수준을 떠나 아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반신적인 존재.
상대는 절대 그와 같지 않았다. 그를 마주했을 때 느낀 기운은 차라리 드라칸과 집행자에 훨씬 가까웠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다.
“···사도.”
여신님의 정체를 눈치챈 또 다른 한 명.
빅토리아 공주. 운명의 여신의 사도였던 그녀는 예지몽을 통해 나와 여신님이 자신에게 찾아오리란 사실을 깨달았었다.
“눈치가 제법 빠르군. 정체를 이리 쉽게 간파당할 줄은 몰랐는데.”
이제야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가 여신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예언에 대해 알 수 있는 이유. 그와 함께하는 신이 정보를 귀띔해준 거겠지. 대체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왜 샤론을 납치한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크로.]
그때였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여신님이 평소답지 않게 딱딱한 어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상념을 깨트렸다.
‘네?’
[당장 도망치거라. 저자는 위험하다.]
갑작스러운 경고에도 내 몸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는 자리에 뿌리박힌 듯 꼿꼿이 서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저택에 진입하기 직전 늦어도 백작과 맞닥뜨리자마자 그런 경고를 내뱉었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창 얘기가 진행되고 나서야 뒤늦게 위험하니까 도망치라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면 지금의 의문은 단순한 내 피해망상일지도 모른다. 나와 여신님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시간의 여신이 뿌려둔 함정에 너무 휘둘리고 있는 걸 수도 있다.
뭐가 정답인지 몰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상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꽤 즐거운 담소였으나 더는 시간이 없군. 해가 뜨고 있어서 말이지.”
그 순간 기묘한 감각이 내 전신을 휘감았다. 백작이 등지고 있던 창가로부터 서서히 찬란한 동이 트기 시작하며 내 몸이 발끝에서부터 불타오르는 듯한 작열의 고통이 엄습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 태양이 내 몸을 환히 비추는 순간 나는 죽고 말 것이란 사실을.
그때 여신님이 다급히 외쳤다.
[거울을 꺼내라!!]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품에 넣어두었던 손거울을 꺼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한밤의 시계탑 광장이 나를 반겨주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너무 더운 거에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