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8
하. 하하.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되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올 뻔했다.
54명 중 52명이 간첩이었다고?
나랑 레아를 제외한 모두가 전부 줄리엣이 심어놓은 프락치였다는 뜻이잖아.
어쩐지 급하게 뽑은 직원들이 수상하리만치 다들 유능하길래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냥 좋은 일을 하니까 인복이 찾아오나보다 여기면서 넘겼는데.
생각해 보면 면접부터 채용까지 전부 줄리엣이 담당하긴 했었다. 그때는 일을 너무 많이 떠넘기는 것 같아서 미안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아니 애초에 인과응보인 건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고도 너무 유능해서 그냥 믿고 맡겼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말았다.
배신감과 자괴감이 뒤섞인 채 줄리엣을 원망하다가도 그럴 자격이 있느냐며 회한에 잠기는 식으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다 뒤늦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고작 간첩이 기업에 뒤섞여 있었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론 집행부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든 간에 그것이 신비와 연관되어야지만 관여하는 조직이니까.
즉 줄리엣과 아이들은 간첩 활동과는 별개의 이유로 집행부의 타깃이 된 것이리라.
내가 마른세수와 함께 한숨을 내쉬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캐서린이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걸었다.
“생각 정리는 다 끝나셨습니까? 의외로 덤덤하게 순응하시는군요.”
순간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 알려줘야 하나 갈등했지만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끝낼 수 있던 것도 어디까지나 줄리엣이 나와 갈라섰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였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재단 내부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직원이 있다는 건 짐작했었다네. 설마 그렇게 많은 숫자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지 확실한 물증은 없었으니 섣불리 행동하기가 애매했다네.”
그녀는 내 변명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 주었다.
일단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집행부는 아직 내가 괴도라는 사실을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이유로 재단을 뒤집어놓은 거였다면 내가 제 발로 직접 찾아오자마자 성대하게 환영해주었을 테니.
분명 무언가 더 숨겨진 진실이 있다. 단순히 간첩 체포라는 이유로 집행부가 움직일 리 없다.
그게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나는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로 전환하였다.
“그럼 그 간악한 녀석들은 전부 체포된 건가?”
“현재 조사 중입니다. 더 자세한 사안은 기밀이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나는 결백하다는 게 입증된 거겠지? 그러니까 체포되지 않은 걸 테고.”
언뜻 들으면 완곡한 도발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아슬아슬한 수위.
캐서린은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눈가를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다 덤덤히 대답했다.
“당신은 압수 수색 당시 출장 중이라 자리를 비웠고 저희는 굳이 당장 당신을 찾는 수고를 들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우선순위가 밀렸을 뿐 당신 역시 엄연히 조사 대상이란 걸 잊지 마십시오.”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싸한 분위기를 느끼고 서둘러 발을 빼겠지만 지금의 나는 오히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액셀을 더 지그시 밟아버렸다.
“어이가 없군. 그쪽도 직원들을 심문했다면 다 알 텐데. 난 아무 잘못도 없는 선량한 시민이야! 그 망할 반동분자 놈들한테 억울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내 뻔뻔한 태도가 그녀의 스위치를 제대로 눌러버린 건지 무표정 속에서 흘러넘치는 냉기가 순간 흠칫할 정도였다.
“그 말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아르센 뤼팽 당신의 신분을 조회한 결과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에서 건너온 몰락 귀족이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신분 정보원을 따로 활용해봐도 뤼팽이란 귀족 가문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죠. 설령 당신이 이번 수사에선 무고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밀입국과 신분 세탁 역시 엄연한 불법 행위입니다.”
···이거 잘못 건드린 걸지도.
설마 벌써 거기까지 파악했단 말이야? 고작해야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과연 집행부라고 감탄해야 할까. 경이로울 정도의 정보 수집력이다.
그나마 완전히 위조된 가짜 신분이라는 점은 아직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어중이떠중이한테 맡긴 게 아니라 그 분야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위조자한테 직접 맡겼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들킬 가능성이 있다. 위조 신분이 완벽한 것과 별개로 내 행적을 좇다 보면 꼬투리가 잡힐 여지는 충분할 테니.
“지 진정하라고. 나는 그쪽을 도발하려던 게 아니라 좋은 의도로 얘기한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요.”
“정말이라니까. 적어도 내가 이 사건에 한해선 무고한 피해자라고 당신도 인정했잖아? 그러니 내가 대표자로서 부하 직원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면서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도 있다고.”
나름 매력적인 제안처럼 꾸며냈으나 사실 이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집행부는 어차피 나를 강제로 끌어앉혀 수사에 협조하도록 압박할 권리를 정부로부터 보장받았으니까.
단지 차이라고 한다면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적극성의 유무.
정확히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 집행부는 이번 수사에 상당히 진심인 듯했다. 즉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을 고양이 손이라도 지금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그 간절함을 이용해 내 신분을 높인다. 체포당해 진술하는 용의자가 아니라 수사에 협력하는 정보 제공자로.
캐서린은 푸른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뜨며 대답했다.
“참 얄팍한 수로군요. 그런다고 저희가 당신을 향한 경계를 풀 것 같습니까?”
“이런. 그렇게 쌀쌀하게 반응하면 서운한데.”
뭐 상대가 눈치채는 것쯤이야 예상한 상황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건 눈치채도 피할 수 없는 가불기와 같으니까.
상대는 내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내 정보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절대 거절할 수 없다. 설령 그 손에서 더러운 냄새가 풀풀 풍긴다고 해도.
“그럼 바로 얘기해보시죠. 제가 수사 담당관이니 바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 전에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아···.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 낯짝이 두껍군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무섭지도 않습니까?”
“하하. 공무원 나리가 선량한 시민을 협박하면 안 되지. 나는 우리 자랑스러운 브리타니아의 공권력을 믿는다고.”
내가 능청맞게 흘려넘기자 그녀의 입에서 ‘프랑크 출신 주제에···.’ 라는 중얼거림이 조용히 내뱉어진 것 같았지만 분명히 내 착각일 테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궁금한 건 딱 하나야. 대체 왜 경찰이 아니라 당신들이 이 사건을 조사하는 거지?”
질문을 내뱉음과 동시에 방의 분위기가 한층 싸늘해진 기분이었다. 아까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그리워질 만큼 냉랭해진 그녀가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집행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질문의 의도가 명확하잖습니까. 경찰과 집행부의 목적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그야 목적이 다르니까 이름도 다르겠지.”
“집행부는 경찰청 소속입니다. 당신이 건물의 정문부터 방에 들어오기까지 보았을 모든 요소에서도 집행부를 경찰과 분리해서 볼 정보는 없었습니다.”
얘기를 듣고 나니 약간 실수한 것 같긴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래. 사실 원래부터 조금 알고 있긴 했어. 애초에 내가 집행부까지 곧바로 찾아온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잖아?”
“일반인은 집행부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일반인이 아니면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거잖아? 나도 그쪽 세계에 반쯤 발을 걸쳤다고 할까. 자세히 설명해주긴 어렵지만.”
집행부는 마법 아카데미 학생처럼 신비와 관련되어 있어야지만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다.
신비로부터 세상의 질서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만큼 일반인에겐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집행부가 병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계 등급을 1단계 상승시켜야겠습니다.”
“그거 뭔진 몰라도 좋은 뜻 같지는 않네. 아무튼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캐서린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새침하게 답했다.
“기밀입니다.”
“아니 나는 나름 비장의 카드도 까면서까지 물어본 건데 그렇게 나온다고? 잘 생각해봐. 나도 최소한의 정보는 알아야 당신들한테 쓸만한 정보를 골라서 줄 수 있을 거 아니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해선 어떤 협상의 여지도 없으니 억지를 부린다 해서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니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이건 어떻게 찔러 볼 틈도 없을 만큼 너무 완고하네.
적어도 집행부의 목적에 대해 알아야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방향을 정할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뒤 문이 살짝 열렸다.
“집행자님. 얘기하셨던 피보호자가 도착했습니다.”
“금방 끝내고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닫힌 문.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들었죠? 더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죠. 저희 쪽에서 나중에 출석 요구할 테니 그때 다시 찾아오시면 됩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실루엣뿐이었지만 분명 확실했다.
방금 문밖에 경비와 함께 서 있던 것은 지나 그레인저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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