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모방꾼의 부탁은 간단했다.
바로 꽃 하나를 가져다주는 것.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모종삽과 화분을 챙기고서 탐색에 나섰다. 이 꽃은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만 자란다.
게다가 굉장히 특별한 조건 아래서만 꽃을 찾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흔하디흔한 잡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가 오로지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꽃.
달바라기.
이러한 특징 때문에 달바라기는 반드시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찾을 수 있다.
내가 후불로 계산하겠다고 했을 때 모방꾼이 흔쾌히 허락한 이유 역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작에서 주인공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탓에 달바라기를 구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아마 이쯤에 있을 거예요.”
런던의 외곽 지역 이름 없는 숲.
문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의 터전에서 달바라기를 찾아 돌아다녔다.
[만약 없으면 어쩔 생각이냐?]
“찾을 때까지 돌아다녀야죠.”
오늘을 놓치면 30일 동안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한다.
당연히 밀린 외상을 갚지도 않고서 모방꾼과 다음 거래를 할 수도 없을 테니 괴도 활동에도 차질이 생기겠지.
최대한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달바라기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달바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거대한 참나무 밑에 수줍게 얼굴을 내민 은색 빛의 꽃망울.
수수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을 풍겨 마치 주변을 밝게 빛내는 듯했다.
저것이 바로 달바라기. 여러모로 판타지 배경에 어울리는 신비한 꽃이다.
단순히 외형만 아름다운 걸 넘어 빼먹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최고의 약초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 효능이 얼마나 사기적이냐면 굳이 가공할 필요도 없이 꽃잎을 달여 마시기만 해도 통증을 완화해주거나 재생력을 올려주는 등의 성능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 수준을 넘어 진짜 심각한 질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건 무리지만. 애초에 그 정도라면 전설에 나오는 엘릭서 수준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찾았으니까 챙겨가야죠.”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주변의 흙을 한꺼번에 파내 화분에 옮겨 담았다.
이렇게 해둬도 당연히 보름달이 저물면 꽃도 시들어버린다.
화분에 옮겨 담은 달바라기가 계속 꽃을 피우도록 유지하기 위해선 ‘월광석’ 빛이 있어야만 한다.
그건 모방꾼이 알아서 준비해놨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받은 부탁은 달바라기를 가져와달라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 뒤부터는 상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신경쓸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제 돌아가죠.”
[생각보다 쉽게 끝나서 다행이구나.]
“그러게요.”
화분을 소중하게 안아 들고서 숲을 떠나려 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쪽의 수풀이 흔들리며 누군가 기척을 드러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미묘한 대치가 이어지다 마침내 상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여우네요.”
[그렇구나.]
조그마한 새끼 여우였다.
다만 흔히 여우 하면 떠오르는 붉은색 털이 아니라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백여우였다.
깜빡깜빡.
나와 시선을 마주친 채로 푸른 눈을 깜빡이는 털 뭉치.
귀엽다. 데려가서 키우고 싶어.
순간 욕망이 들끓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금방 포기해버렸다.
분명 근처에 부모가 있겠지.
괜히 데려가봤자 내가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흠. 분명 저 아이는···.]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뭐야. 의미심장하게 말해놓고는.
그냥 귀여운 여우를 잠깐 구경한 셈 치고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여우의 앞다리에 살짝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털이 새하얗다 보니까 더 눈에 잘 띄네.
피가 살짝 맺혀서 붉은 자국이 찍혀 있지만 다행히 크게 심각한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놀다가 다친 건가? 가시덤불 같은 거에 찔린 걸수도.
잠시 녀석을 내려보다가 달바라기의 꽃잎 하나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괜찮은 것이냐? 값으로 지불할 꽃을 사용해도.]
“겨우 꽃잎 하나인데 뭐 어때요.”
쭈그리고 앉아서 여우를 불러보았다.
“이리 와. 하양아.”
[참 센스없는 작명이구나.]
이 여신이 뭘 모르네. 원래 동물 이름은 단순해야 더 귀여운 법이다.
털이 새하야니까 하양이. 얼마나 직관적이고 귀여워.
손짓을 하니 자기를 부른다는 걸 이해한 건지 조심스레 나에게 다가오는 하양이.
야생동물치고는 사람한테 겁이 없는 녀석이네. 아니면 머리가 똑똑해서 내게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걸 눈치챈 걸지도.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예쁘긴 예뻤다. 그냥 평범한 길거리 동물이 아니라 마치 영험한 신수 같은 분위기랄까.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조심스레 여우의 앞다리를 잡아서 떼어낸 꽃잎을 상처 부위에 문질렀다.
“······.”
안 아픈가? 그러고 보니 얘. 여태껏 한 번도 안 울었구나.
여우 울음소리는 원래 듣기 희귀하다던데. 개처럼 멍멍 짖으려나?
그렇게 한 10초 정도 문지르고 떼어내니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역시 달바라기 꽃이야. 엄청난 성능에 감탄하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로 가볼 시간이다. 새끼가 사라졌으니 부모 여우도 분명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작별을 고했다.
“하양아. 잘 먹고 잘살아.”
녀석은 특유의 신묘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볼 뿐 그 외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오. 정말로 가져오셨군.”
“거래였으니까요.”
모방꾼은 내가 들고 온 달바라기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얼굴을 붕대로 완전히 덮었는데도 표정이 보이는 느낌이다.
실제로 보이는 건 눈동자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꽃잎 하나를 사용한 건가?”
“상태가 괜찮나 성능 시험 겸으로 써봤어요.”
“흠. 뭐 한 장 정도라면 문제는 없겠지. 아무튼 고맙군.”
섬뜩할 만큼 예리한 감각이네. 겨우 꽃잎 한 장이 사라진 걸 단숨에 눈치채다니.
“더 필요한 건 없나요?”
“물론. 이거면 충분하다네.”
모방꾼이 달바라기를 모으는 이유는 원작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게 있다면 그가 여태껏 모아온 달바라기의 양은 한둘이 아니라는 것.
가짜를 만드는 예술가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러면 치졸한 괴도여. 다음에도 부디 잘 부탁하겠네.”
“앞의 수식어는 빼시라니까요.”
무사히 거래를 끝마치고서 모방꾼의 지하를 빠져나왔다.
***
[오늘은 여기서 끝낼 것이냐?]
벌써 야심한 시각이었다.
마녀의 가게에서 그림도 처분하고 숲속에 들어가 달바라기도 채집한 다음 모방꾼의 지하까지 들렀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래도 이왕이면 확실하게 끝맺음을 짓고 싶었다.
“처분한 돈을 어디에 기부할지 생각 중이에요.”
항상 이게 고민이었다. 그냥 무턱대고 주기엔 너무 단위가 큰 액수다 보니 최대한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게다가 항상 똑같은 곳에 주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여러 후보지를 물색해야 한다.
나 혼자서 관리하기엔 너무 바쁘다고 해야 하나.
[지난번 고아원은 어떻겠느냐?]
“글쎄요. 연속은 아니니까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또 거기에 줘야 할까요?”
[저번에 봤을 땐 돈이 꽤 많이 필요해 보이지 않았더냐.]
확실히 그건 그랬다. 고아원의 사정이 워낙 팍팍해서 저번에 기부한 돈만으로는 부족할 가능성도 충분하지.
“그러면 직접 가서 슬쩍 보고 올까요?”
[그게 좋겠구나.]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저번에 기부했던 고아원이 어떻게 됐나 확인하러 이동했다.
적어도 내가 꼼꼼히 조사했을 때 그곳의 원장님은 매우 청렴한 사람이었다. 내가 기부한 돈을 뒤로 꿀꺽하거나 개인의 욕심을 위해 빼돌릴 인간은 절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아원의 모습은 저번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걸까.
“······.”
솔직히 꽤 크게 충격받았다. 여태까지의 활동에 회의를 느낄 만큼.
항상 낭만과 로망에 따라 괴도로 살면서 내심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나쁜 도둑이라 몰아가며 비난할 때도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넘겼다.
어차피 나 자신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움직였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고아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정말로 원장이 돈을 빼돌린 걸까?
의문은 생각보다 금방 풀렸다.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는 두 명의 사내들.
그들의 복장은 당당히 직업을 드러내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재무부 관하 국세청 소속.
쉽게 말하자면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이 왜 이런 허름한 고아원에 친히 행차한 걸까. 낯선 이의 등장에 아이들은 벌벌 떨며 원장은 초연한 태도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나는 방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기 위해 천장을 통해 고아원 안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모든 전말을 깨닫게 되었다.
“어이 영감. 숨겨놓은 돈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이미 전부 드리지 않았습니까···.”
“얕은 꼼수 부리다간 바로 철창행이라고. 정말로 괴도 놈과 한패인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정말로 믿어주십시오. 나으리.”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어쩌면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도.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나의 아이야.]
여신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어떻게 할 거냐고?
그야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전부 되돌려야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국세청 공무원의 등장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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