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냥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준다고 끝이 아니었다.
장물을 통해 벌어들인 이득을 국가에서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으니까.
쉽게 말해 내게 돈을 받기만 해도 애꿎은 사람들이 대신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발견했다면 고쳐야 한다.
잘못은 전부 되돌려야만 한다.
어떻게? 그 질문에 답을 내리는 건 확실히 쉽지 않았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판을 키우는 수밖에.
나는 고아원 건물의 옥상에서 국세청 공무원이 유유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뒤쫓지 않는 것이냐?]
“네.”
저들을 추격해 국세청을 털어버리는 것도 물론 방법의 하나일 수 있지만 고작 그런 방법을 통해선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더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그거 기쁜 소식이구나.]
여신님은 내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뭐든 좋다. 내가 옆에서 지켜봐 줄 테니 마음껏 날뛰거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조금 전에 들렀던 모방꾼의 지하로.
***
“또 보자고는 했지만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은 몰랐군.”
“그러게나 말이에요.”
설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 부담스러운 미라를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금은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내 계획의 가장 핵심은 모방꾼이 만드는 ‘가짜’니까.
“그래. 치졸한 괴도 양반. 이번에는 뭐가 필요하지?”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그거 재밌군.”
여러모로 많이 고민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어지간한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최대한 판을 키워서 본격적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공무원이 가져간 돈을 다시 훔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봤자 내가 후원한 금액을 다시 국세청에서 압수하는 결과가 반복될 뿐이니.
물론 감히 내 돈을 훔쳐 간 파렴치한 놈들에겐 보복해줄 생각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이게 더 중요했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결국 내가 괴도 레이븐이란 점에 있다.
도둑이 훔쳐서 번 돈은 기부금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해결법은 간단하다. 도둑이 아닌 다른 사람이 후원하면 그만이다.
“알고 있겠지? 단순히 그림 하나 그리는 것과 신분을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르다.”
“물론 압니다. 값은 얼마든지 치르죠.”
“좋아. 훌륭한 자세군.”
모방꾼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려는 신분의 인적 사항을 알려주게. 구체적일수록 좋겠지.”
나는 하나씩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로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모든 세세한 부분을 전부 얘기하며 가짜 신분을 창조해나갔다.
내가 설명하는 얘기를 빠짐없이 적던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 신사의 이름은 무엇이지?”
“뤼팽. 아르센 뤼팽입니다.”
머릿속으로 계획은 모두 짜두었다. 새롭게 만들어낸 뤼팽의 신분을 통해 익명으로 운영되는 재단을 설립할 생각이다.
이 재단은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아 브리타니아 각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무상으로 도와줄 것이다.
자금 경로를 들킬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녀의 가게는 손님에 대한 정보를 절대로 유출하지 않으니.
“멋진 이름이군. 사흘 뒤에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이번 거래의 값은 꽤 비쌀 거야. 단단히 각오해두라고.”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괴도에게 돈 걱정을 하는 건가요?”
“괴도니까 걱정하는 거 아니겠나.”
“하하.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에 바로 다음 계획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건투를 빌지.”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뵙죠.”
이제 뜯어먹힌 내 돈을 다시 되돌려 받으러 갈 시간이다.
감히 누구의 돈을 훔쳐 간 건지 똑똑히 알게 해주지.
***
나는 언제나 낭만을 중요시했다.
애초에 훔치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처럼 비효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겠지.
굳이 눈에 잘 띄는 복장만을 고수하고 미리 예고장을 보내며 레이븐의 이름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도. 전부 괴도라는 로망을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여신님이 그러길 원했고 또한 나도 그걸 좋게 받아들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괴도로서 무언가를 훔치러 가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돈의 소유주로서 내 돈을 훔친 도둑에게 다시 돌려받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낭만을 챙기지 않고 진심으로 나선다면 어떨지 말이다.
분명히 국가 정부 조직인 국세청을 털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평소처럼 낭만을 챙기면서 행동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으리라.
“여기군요.”
[과연.]
국세청 건물에 도착했다.
여태까지 털었던 어떤 곳보다도 가장 클래스가 높은 존재.
쉽게 말해 브리타니아 전국의 돈이 이곳을 거쳐 지나간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 중 하나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저 안에 내 돈이 있다는 거군. 괜히 머뭇거릴 필요도 없다.
바로 시작하자.
***
야심한 시각.
공무원 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직장 동료와 잡담을 떠들고 있었다.
“그 노인네가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었다고?”
“그렇다니까. 전부 그 괴도 녀석한테 받은 거라던데.”
“그래서 전부 회수는 한 거야?”
동료의 물음에 사내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본인은 다 내놓았다고 하지만 더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알아? 애초에 괴도가 돈을 얼마나 준 건지도 모르니까.”
“쯧쯧. 그 할배도 완전히 잘못 걸렸구만. 하필 너 같은 놈이 담당을 맡았으니 팬티 하나 남김없이 빈털터리가 될 거 아니야.”
내용은 고아 원장을 걱정하는 듯했지만 막상 말하는 어투는 걱정보다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결국 남자와 동료 둘 다 똑같은 부류인 것이다.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나는 최대한 열심히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수고비 느낌으로 조금만 내 뒷주머니에 챙기는 것뿐이니까.”
“아주 브리타니아의 영웅이 납셨군.”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겠다 선언하면서도 사내는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는 한가득 미소를 띤 채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뱉었다.
“애초에 괴도의 돈을 낼름 받아먹었다는 것만 봐도 그 영감 역시 범죄자나 다름없지.”
“하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정상적인 선량한 시민이라면 당연히 신고하고 국가에 반납해야지. 아니면 괴도 추종자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차라리 추종자면 다행이지 괴도 녀석과 따로 커넥션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니까.”
원장이 그 돈을 받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놓인 결과만을 보고서 자신이 편한 대로 해석해버리는 두 사람.
“그러면 돈은 전부 금고로 들어갔나?”
“그렇지. 1차 방문 때 내뱉은 돈은 빼돌릴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오늘 한 번 더 찾아가 봤는데 노인네가 정말로 돈이 없는 건지 아무리 협박해도 내놓지를 않아.”
“그럴 때는 조금 더 강하게 나가란 말이야. 너는 예전부터 마음이 너무 상냥해서 문제야. 흐흐.”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던 그들의 잡담도 슬슬 마무리되어 갔다.
남자가 시계를 바라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동료에게 말했다.
“아 시간이···! 교대 시간 늦었네.”
“어휴. 벌써 5분이나 지났잖아.”
고작 5분 정도 늦은 걸로 무슨 일이 생길 리는 없겠지만.
사내는 허겁지겁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갔다 올 테니까 야식이나 준비해 놔.”
“오케이. 맡겨만 두라고.”
금고 앞의 경비를 서기 위해서 휴게실에서 빠져나오는 사내.
긴 복도를 걸으면서 조그마한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물론 이런 야밤에 시끄럽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그럼에도 오늘따라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오로지 자신의 발소리와 심장 박동만이 귓가를 맴도니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쳐버렸다.
그는 휙휙 고개를 내저으며 불길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지워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차라리 얼른 이동하자. 금고 앞에선 두 명이 같이 경계를 서니까 훨씬 낫겠지.
그렇게 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 사내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금고의 문 앞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이 경계를 설 동료도 교대하기 전 타임에 서 있었을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절대 열려 있어선 안 될 금고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다.
“······.”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지금 가장 올바른 대응법은 곧바로 비상 알람을 울리고 보안 팀에 지원 요청을 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교대에 늦은 자신에게 책임이 향해질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에 사내는 직감이 외치는 경고를 애써 무시하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부디 아무 일도 아니길 바라며 그저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하기를 기도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그는 금고실 내부의 풍경을 목격하였다.
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흑색의 신사.
“···괴도 레이븐.”
“꽤 늦었네. 네 얼굴은 기억해뒀거든.”
이내 괴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내 돈을 돌려받으러 왔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셜록의 일러스트가 나왔어용!
생각했던 것보다 몸매가 어른스러워졌지만 이것도 좋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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