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1
아카데미에 어둠이 내려앉기 몇 분 전.
등에 드래곤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걸친 이들이 조용히 본관 옥상에 사뿐 내려앉았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던 가면을 쓴 사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작전대로 움직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밝은 연두색 머리를 한 여인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슬쩍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진짜 확실한 거 맞아? 의식까지 내팽개치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만약 ‘용부리미’가 가짜면 어떡하려고?”
“상관없다. 무의미한 의식을 계속 진행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확실한 건 우리가 받은 메시지. ‘묵시록의 예언’을 실행하라는 건 위조됐다는 거다.”
“한낱 좀도둑 나부랭이에 의해서 말이지. 대체 놈이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야?”
“그건 나중에 놈을 잡아 심문하여 알아내면 되는 일이다. 지금은 그보다 용부리미의 확보에 전념해라.”
저마다의 생각은 다르더라도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았다.
오로지 드래곤의 재림을 위해.
가면을 쓴 사내의 지휘에 따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까지 옥상에 남아있던 가면 쓴 사내는 이윽고 양팔을 하늘로 내뻗더니 무언가를 한참 동안 중얼거렸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의 언어로 이루어진 주술이 끝맺음과 동시에 그의 손끝을 중심으로 불길한 어둠이 빠르게 퍼져나가 순식간에 아카데미 부지 전체를 반원 형태로 둘러쌌다.
“지금쯤이면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상황을 파악했겠지.”
그들은 자신들조차 섣불리 방심할 수 없는 일류의 실력자들이다.
제아무리 드라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본거지인 이곳 아카데미에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전면전이 목적은 아니니 괜찮다.
적어도 이 어둠 장막이 유지되는 1시간 동안은 교수들도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흩어져 강한 영혼을 지닌 존재들을 찾아라.”
어둠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그의 권속 팬텀들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첫 단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여기서 장막을 유지하며 동료들이 용부리미를 확보해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는 잠시 아비규환이 찾아온 아카데미를 내려다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넌 움직이지 않을 건가? 이곳에 따로 용건이 있어 보이던데.”
“······.”
***
“뭐야···?”
갑자기 창밖의 풍경이 새까매지자 나도 모르게 주춤하던 찰나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캐서린이 우리를 뒤로 물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적습입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군요.”
“적습이라니···.”
“드라칸이 그레인저 양의 정보를 얻었다면 노리리란 것쯤은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물며 방비책이 세워진 에든버러로 최대한 서둘러 향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저희 예상보다도 훨씬 신속하게 정보를 얻은 모양이네요.”
결국 우려했던대로 드라칸이 깨어나서 쳐들어온 건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상당히 긴장한 듯한 기색이었다.
왜 하필 지금인 건데. 지나가 집행부 안에 보호받고 있을 때 들이닥쳤다면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을까?
반면 캐서린은 현재 상황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차라리 잘 됐군요. 아카데미 내에서의 습격이라면 교수진들이 대응에 나설 테니 잘 해결될 겁니다. 어쩌면 저희가 나설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부디 그렇게 되면 좋으련만 이상과 달리 현실은 언제나 최악에 가까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쩌저적-!
불길한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던 반 밖의 복도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얼음의 진격은 마치 난폭한 쓰나미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워 얼려버렸다.
천만다행인 건 이곳이 아카데미 내에서 인적이 매우 드문 장소라는 정도였다.
복도에 피해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기도 잠시 이 사태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깨닫고 조금씩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흠. 여긴 꽝인가.”
저 목소리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드라칸 중에서도 유일하게 직접 마주했고 자칫했으면 죽임당할 뻔했던 녀석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지크프리트.
최강의 빙결 마법사이자 잔악무도한 미치광이 살인마.
다행히 놈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이대로 지크프리트를 다른 층으로 보냈다간···.
“막아야 해요.”
내 필사적인 요청에 캐서린과 지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는데 놔줄 수는 없죠.”
“감히 내 마법을 훔치려는 미친놈을 그냥 보내줄 것 같아?”
그래. 아무리 강력한 상대라 하더라도 우리 셋이 함께 싸운다면 누구든 이길 만한 전력이다.
우리는 녀석의 시선을 끌어 붙잡기 위해 반을 나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오. 날파리들이 숨어있었네. 그냥 얌전히 숨어있지 왜 밖에 나왔대?”
“그야 널 박살 내기 위해서다!!”
지나가 특유의 전투광다운 모습으로 소리치며 선공을 날렸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불꽃의 새가 적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손을 위로 휘적이자 땅에서 솟아난 얼음 기둥이 새의 몸통을 꿰뚫어버렸다.
“소환사? 혹시 네가 용부리미냐?”
“그딴 건 모르겠고! 뒤져!!”
외침과 함께 쏟아지는 그녀의 소환수들. 그러나 모두 녀석의 얼음을 뚫어내지 못하고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전부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겉만 화려한 빈 껍데기들 뿐. 너 약하네.”
지크프리트의 덤덤한 조롱에도 지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야 일부러 이목을 끌기 위해 화려한 소환수로만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 찰나를 노려 슬그머니 뒤로 가는 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카드를 빼내 녀석에게 던졌다.
카드에서 튀어나온 3개의 단도가 적의 뒷목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뻔해.”
어느샌가 한 손을 뒤로 돌린 상대는 얼음으로 목을 보호했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일렀다.
이것조차도 시선 끌기용 진짜는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꽂는 캐서린의 폭발 마법이었으니까!
이것까진 차마 예상하지 못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뒤늦게 고개를 치켜드는 지크프리트.
반응하기엔 늦었다. 그대로 놈의 안면에 시원한 폭발이 들어가는 장면을 예상했으나.
쾅!!
갑자기 창문을 깨트리며 복도에 난입한 거구의 사내가 몸을 내던져 캐서린과 정면충돌했다.
“커억···!!”
온몸이 으스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충돌.
그 충격에 떠밀려 벽을 부수며 반 안까지 날아가 버리는 캐서린.
지크프리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멋쩍게 웃으면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후.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네. 방금은 진짜 위험했다고.”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우리가 제때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용부리미를 발견하자마자 신호를 보낸 덕분인 거지.”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잡담을 떠드는 두 남녀.
거구 사내의 어깨에 올라타서 함께 등장한 저 연두색 머리 여자도 얼굴이 낯익었다.
라파노 레아 그리고 레이첼에게까지 암시 마법을 걸어 드래곤 소환의 실험체로 쓰려했던 여자.
이름은 베로니카.
‘···젠장!’
지크프리트 외에 다른 드라칸 조직원도 함께 움직이리란 걸 예상했어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창밖이 어두워진 것도 놈들 중 가장 까다로운 녀석의 능력이었다.
드라칸에 대한 걱정을 집어뒀던 바람에 원작 지식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방금 캐서린을 끌고 간 거한의 정체는 디트리히겠지.
만약 드라칸 전원이 움직인 거라면 그 외에도 1명이 더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드라칸은 총 5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조직이었으니까.
하지만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전투력은 집행부장급이 아니고선 이길 수 없을 정도이니.
쉽게 말해 초월자의 바로 아래 단계 즉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의 영역에 다다른 자들이었다.
아카데미 교수진들만으로 놈들을 무찌를 수 있을까···?
콰앙!!
디트리히와 캐서린이 맞붙는 충격이 여기까지 울려댔다.
그녀는 방금 기습을 정통으로 허용한 탓에 분명 막대한 데미지를 입었으리라. 저대로 일대일 구도가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체력이 다해 쓰러지고 말겠지.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 눈앞에 2명의 드라칸 단원이 가로막고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설령 내가 돕는다고 하더라도 도움이 되긴 할까?
여태 나름대로 강해졌다 자부했지만 초월자급에 다다른 압도적 강자를 상대론 무력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드라칸을 상대로는 뭐가 다를까.
원작의 지식을 활용해보려 해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많지도 않다. 대략적인 특징들만 얼핏 알고 있을 뿐 워낙 비밀스러운 집단인지라 작중에서도 밝혀진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뭘 해야···.
“크로. 넌 뒤에서 구경이나 해.”
그때 옆에 있던 지나가 적들을 노려보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내가 지켜줄 테니까.”
이어지는 3번째 용의 출현. 마력이 흉포하게 일렁이며 천천히 소녀의 뒤에서 형체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목도하자 누구보다 기뻐하며 방방 뛰는 한 여인.
베로니카는 광기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은 채 지나의 뒤에 생겨나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아아···. 마침내.”
“어이. 좋아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확보부터 해.”
“걱정하지 마. 이미 하고 있거든.”
두 사람의 대화 직후 지나는 갑자기 멈칫하며 신음을 터뜨렸다.
“읏···!?”
그리고 눈웃음을 짓던 베로니카 역시 이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카데미는 습격당하는 게 국룰인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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