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8
“준비는 끝났나요?”
캐서린이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입에서 나올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네.”
“좋아요. 그럼 바로 출발하죠.”
그녀와 함께 아카데미 교문 앞으로 나가니 새하얀 제복을 입은 무리가 우르르 서 있었다.
“현재 동원 가능한 집행자들 전원과 함께 이동할 겁니다.”
총 7명.
한 명 한 명이 결전 병기 취급받는 집행자가 무려 한 자리에 7명이나 모인 것이다. 이만한 규모의 작전은 역사적으로도 전례가 드물지 않을까.
특히 집행 본부장인 에반 레지널드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교문으로 나오는 우리를 확인하곤 무미건조한 어투로 얘기했다.
“저번에 봤던 괴도 추종자 친구로군.”
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 만남 때 그런 얘기가 오갔었지.
그는 괴도가 드라칸과 한패라고 의심하면서 내가 레이븐을 계속 변호하자 나무라기도 했었다.
“···안녕하세요.”
지금은 한가롭게 추억 공유나 할 때가 아니었다.
에반 역시 그냥 인사차 지나가듯 꺼낸 말이었는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설명했던 대로 지금부터 이 친구가 심어둔 추적 마법을 따라 드라칸의 뒤를 쫓는다.”
상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다들 아는 것처럼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 놈들의 위치는? 어느 경로로 향하고 있지?”
카드의 신호는 실시간으로 계속 감지 중이었다.
“서쪽 바다를 건너 아일랜드로 향하고 있어요.”
“바다 건너라···. 신호는 언제까지 유지되지?”
“마법 자체는 최대 사흘 동안 유지되지만 적들이 중간에 눈치챌 가능성도 있겠죠.”
“그래. 게다가 인질까지 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지.”
그 말대로 샤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한 시라도 서둘러 놈들을 뒤쫓아야만 한다.
문제가 있다면 드라칸은 하늘을 날아 상당한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배를 타고 뒤쫓는다면 훨씬 뒤처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반대로 유럽 쪽으로 도망쳤으면 마도공학 열차를 이용하면 될 텐데 아일랜드는 열차의 노선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는 게 문제로군. 뭐 일단 그건 해안까지 이동한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겠지.”
“그 말대로야. 잡담은 그쯤하고 얼른 출발하자고.”
과장된 몸짓으로 시선을 끄는 선글라스를 낀 집행자.
낯익은 모습에 어디서 봤나 잠시 고민하다 이전 은행을 털다 맞붙었던 집행자였단 것을 떠올려냈다.
까다로운 상대였었지. 다짜고짜 내면세계로 끌고 가 사신이 되어 낫을 마구 휘둘러댔었으니까.
그 당시의 압박감으로만 따지면 초월자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물론 현실이 아닌 내면세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바로 적이 된 아군이라는 걸까. 내 정체가 괴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곧바로 적이 되어버리겠지만 지금으로선 상당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의 뒤에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유령마가 이끄는 유령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런 능력도 있었구나. 대단하긴 한데 좀 무섭기도 했다.
아무튼 육지에선 저걸 이용해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
집행자 7명에다 나와 캐서린까지 총 9명.
이렇게 많은 인원이 타기엔 좁은 게 아닌가 했는데 실제로 비좁아서 공간에 억지로 우겨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집행자들이 어떻게 이리 빨리 아카데미까지 올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육지는 이렇게 이동한다 쳐도 바다에서부턴 어떻게 해야 하지?
에반은 일단 나중에 고민하자고 얘기했지만 그 말은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겠지.
결국 해안까지 가서도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하면 배를 타고 아일랜드까지 향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선 너무 늦고 만다.
전투력이 강한 것과 기동력이 좋은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물며 이 정도의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할 만한 이동 수단은 더더욱 희소하리라. 즉 이들이 아무리 유능한 집행자라 할지라도 특별한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슬슬 멀리서부터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하자 내 고민은 더 깊어져만 갔다.
저 바다를 건널···.
“어?”
불현듯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
나는 황급히 품속을 마구 뒤지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물건을 꺼내는 데 성공하였다.
옆에서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진주인가요?”
“네.”
진주는 맞지만 평범한 보통 진주가 아니다.
무려 내가 개고생하며 힘들게 획득했던 전설의 천년 진주였다.
크기가 조그마해서 여신님의 힘을 뽑아낸 다음엔 그냥 무심코 품에 지니고 다녔었는데 지금껏 잊고 지내다 방금 극적으로 떠올려낸 것이었다.
이 진주는 단순히 진귀한 보물이 아니라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천년 진주의 원래 주인을 부를 수 있다는 것.
비록 일방 소통이기에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줄 순 없지만 상대는 분명 내 부름에 즉시 달려와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웬만해선 최대한 피하려 했는데···.’
살짝 껄끄러운 작별이 마음에 걸려 그냥 잊고 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바다를 건너도록 도와줄 친구가 있어요.”
내 말에 마차 안에 있던 집행자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반은 내가 꺼내든 진주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소통 도구인가 보지?”
“그런 셈이죠. 대신 이 일은 소문 내지 말고 잊어 주세요.”
인어의 존재 자체야 당연히 집행부도 알고 있으리라.
애초에 모든 신비를 관리 담당하는 조직이니 모른다면 그거야말로 무능한 거겠지.
내가 걱정하는 건 인어들의 왕족 특히 공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단 사실이 알려지는 거였다.
일개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한 크로가 그런 인맥을 쌓아 올릴 개연성이 부족하니까.
자칫 잘못하면 내 정체가 괴도라는 것을 들키게 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이런저런 조건 따지며 깐깐하게 굴 때가 아닌 것을.
샤론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에 내 정체가 까발려지는 것도 각오할 수 있다.
“육지 끝까지 도착했군.”
“이제 저 바다를 건너야 하는 건가···.”
마침내 바닷가 앞까지 도착한 다음 나는 진주를 어루만지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과연 저들은 이윽고 찾아올 내 친구를 마주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략 1분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파도치던 바다가 잠잠해지더니 이내 홍해의 기적처럼 물길이 좌우로 갈라져 바닥을 드러내었다.
이쪽으로 걸어오라는 듯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바다 벽의 길.
그 놀라운 광경에 천하의 집행자들조차 입을 떡 벌리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와중에 에반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들겼다.
“미쳤나!? 이 친구 인제 보니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군!”
아니 그게 엄밀히 말하면 틀린 얘기는 아니긴 한데.
일단 지금은 신의 기적이 아니라 인어 공주님이 무슨 기묘한 수를 쓴 것이리라.
나는 그냥 평범하게 헤엄쳐서 가까이 다가오는 아리엘을 예상했는데 설마 이런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떨떠름한 기색을 지워내며 내가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쯤 나아가니 마치 무대 스테이지처럼 넓은 원형의 중심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보이는 벽 너머 바다의 풍경은 순간 아쿠아리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바닷속에는 인어들이 우리를 사방으로 둘러싼 채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예법을 취하고 있었다.
[메로우의 귀인이시여. 그대의 부름을 받고 응했나이다.]
···너무 너무 과하잖아.
뻘쭘함에 얼굴을 들기가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언제나 평온한 모습만 보이던 캐서린마저 감탄해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인사 끝에 마침내 반가운 얼굴 인어 공주 아리엘이 내 앞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레이··· 읍읍!”
나는 순간 당황해 바다 벽 너머로 손을 뻗어 아리엘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래. 예전에 널 만났을 땐 내가 괴도 레이븐이라고 소개하긴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사용하기가 좀 복잡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당황한 듯한 아리엘에게 최대한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그녀는 내 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 그러니까···.”
“크로. 벌써 내 이름을 까먹은 거야? 하하. 하하하.”
“크로 님!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반겨주니 나도 참 기쁘긴 한데.
내 등 뒤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 따갑단 말이지.
대체 이걸 집행자들한테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벌써 막막해지려 한다.
“그런데··· 뒤에 계신 인간분들은 누구신가요?”
참. 아리엘한테도 설명해줘야겠구나.
여유가 없다. 최대한 빨리 얘기를 끝마치고 이동하지 않으면.
“아리엘. 네 도움이 필요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50화만에 재등장한 인어 공주 아가씨에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