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9
“아하 한마디로 크로 님은 지금 친구분을 구하려 하시는 거군요!”
“정확해.”
최대한 간략히 설명해줬음에도 아리엘은 철석같이 알아듣고 선뜻 도와주겠다며 발을 나섰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크로 님은 저희를 구해주신 영웅이니까요!”
“하하···. 고마워.”
정말 고맙긴 한데 그렇게 띄어줄수록 내가 나중에 해명하기가 곤란해지거든.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집행자들의 눈초리가 벌써 따갑게 등을 콕콕 찔러왔다.
“그럼 우선 이걸 다른 분들한테 나눠주시겠어요?”
“아 이거 오랜만에 보네.”
이름이 분명···.
수정 아가미였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신기한 능력이 있어 꽤 인상에 깊이 남아 있었다.
아리엘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뒤를 돌아 집행자들에게 수정 아가미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때도 차마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워 일부러 고개를 살짝 돌린 채 기계적인 설명만 줄줄 읊었다.
“이건 수정 아가미라고 하는 건데 입에 물고 있는 동안엔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어요.”
모두 아가미를 장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메꿔지기 시작했다.
그 진귀한 광경에 모두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기 바빠 자연스레 나를 향한 관심은 사그라든 듯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대단한 능력자였잖아? 인어 공주님이 인간한테 홀딱 빠져버리다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에반의 능글맞은 물음에 나는 뭐라 대답할 수도 없어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당장은 더 캐묻지 않겠다는 건지 그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내게서 떨어졌다.
바다가 완전히 메꿔지며 우리가 물속에서 허우적대자 곧바로 저 멀리서부터 거대 해마가 이끄는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에 이미 한번 타본 입장으로 저 마차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알고 있었기에 내 표정은 절로 밝아졌다.
아리엘은 내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이 마차를 타시면 늦지 않게 도착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급한 상황인 듯하니 시간을 오래 끌어선 안 되겠죠. 대신 친구분을 구하고 돌아오실 때 다시 한번 불러주세요. 그땐 귀인에게 걸맞은 환대로 맞이해드릴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제안을 거절할 수야 없는 법이지.
다만 아리엘이 샤론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살짝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거야 일단 샤론을 무사히 구해낸 뒤에 천천히 고민해도 늦지 않을 문제니까.
“정말 고마워. 꼭 들를게.”
“감사해요! 그럼 다들 조심히 가시길.”
인어들의 축복을 받으며 용궁 마차는 전속력으로 아일랜드를 향해 질주했다.
땅이 아닌 바닷속을 건너서 그런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오로지 일직선으로만 달리니 체감 속도가 상당했다.
외부인이 사라지고 마차 안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는 시간.
당연하게도 집행자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나와 그나마 제일 관계가 가까운 캐서린이 총대를 멘 듯 조심스럽게 주제를 언급하였다.
“모리스 군. 인어들과 어떻게 친분을 맺은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그게 말이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대로 전부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내가 인어를 만나게 된 계기 자체가 천년 진주를 찾아다녔기 때문이었으니까.
아카데미 학생이 대뜸 보석을 찾겠다고 이 먼 아일랜드 해안까지 건너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괴도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선 어떤 식으로 변명해도 어색하게 들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골치 아픈 상황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창가에 앉아 바닷속을 구경하던 에반이 가벼운 어투로 얘기했다.
“됐어. 굳이 그런 걸 캐물어서 뭐 할 거야?”
“부장님. 하지만···.”
“아까 공주님 말씀 못 들었어? 인어들을 구한 영웅이라잖아.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쓸데없이 관여할 이유는 없단 거지. 괜히 그랬다가 인간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지면 큰일이라고. 안 그래도 인어는 상당히 배타적인 종족인데.”
부장의 적극적인 변호 덕에 캐서린 또한 더 나서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졸업하고 집행자가 될 생각은 없나? 나중에 이종족 외교 담당으로 일하면 최고일 거 같은데. 인어 말고 요정이랑 난쟁이들도 다 꼬셔버리는 거지.”
부담스러운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애초에 말투만 봐도 진지하게 꺼낸 얘기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에반의 적절한 개입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솔직히 저쪽에서 제일 따지고 들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주니 꽤 의외긴 했다.
“오. 슬슬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은데.”
그 말대로 벌써 해안을 가로질러 아일랜드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리엘한테 도움을 요청한 덕분에 이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육지에 상륙한 뒤 이곳까지 태워다 준 해마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딱히 알아들은 것 같진 않지만 해마들은 우리가 내린 것을 꼼꼼히 확인한 후 뒤돌아 바다로 돌아갔다.
“자 드디어 아일랜드에 도착했군. 이젠 어디로 가면 되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마침내 놈들의 바로 턱밑까지 쫓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드라칸을 격퇴하고 샤론을 구해내는 것.
***
“···으읏.”
샤론은 침음성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에 느껴지는 뻐근한 고통과 함께 팔다리가 속박되어있는 감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 일어났니?”
귓가에 들리는 천연덕스러운 물음.
그 목소리의 주인을 단번에 눈치챈 샤론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노려보았다.
동생의 날카로운 눈초리에도 줄리엣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 할 말만 내뱉었다.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어. 나는 잠깐 어딜 갔다 와야 하거든.”
뒤늦게 주의를 둘러보니 어두컴컴한 공간에는 축축한 습기와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가득히 뒤덮고 있었다.
‘동굴···?’
정교하게 꾸며낸 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이 동굴은 인위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실제 자연환경처럼 보였다.
아카데미 주변에 동굴이 있나?
완전히 도시화된 런던에 이렇게 크고 깊은 동굴이 있다면 샤론이 그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기절했던 동안 상당히 멀리까지 끌려온 거라고 해석하는 것이 이치적이리라.
“그럼 기다리고 있어.”
“잠깐···!”
“좀 혼란스럽더라도 걱정하지 마. 갔다 오면 전부 설명해줄 테니까.”
일방적인 말만 남긴 채 줄리엣은 쌩하니 떠나버렸다. 어두운 동굴 한복판에 혼자 남겨진 샤론은 자신의 팔다리를 묶고 있는 줄을 풀어보려 한동안 애쓰다 곧 포기하고 말았다.
‘마법이 써지질 않아.’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방비책이 있으니 자신을 혼자 놔두고 떠나버린 거겠지.
일단 당황하지 말고 지금은 상황을 침착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내가 납치당했단 사실은 바로 알려졌을 거야.’
아카데미에 그런 난리가 났는데 학생이 납치까지 당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출해내려 할 것이다. 안 그러면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신비 진영 전체의 신용이 뒤흔들릴 테니까.
어쩌면 벌써 구출대를 파견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남의 도움만을 바라면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당장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가능하다면 직접 탈출해서라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리라.
그를 위해선 먼저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상대의 목적을 알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때 어떻게 할 것인지도 미리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니.
다만 줄리엣은 본인의 목적을 제 입으로 직접 밝혔었다.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했었지···.’
과연 그게 사실일까? 처음 파리에서 만났을 때부터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고수했었지만 그것이 본인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았다.
샤론이 줄리엣의 제안을 거절한 근본적인 이유도 그 말을 믿을 만한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두 사람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샤론 역시 여태껏 줄곧 아버지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탐정으로 활동해왔었으니.
“···궁금해.”
이것이 위험한 선택이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샤론은 끓어오르는 열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평생을 좇아왔던 일이다. 하다못해 아버지가 죽었다면 그 사실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찝찝하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패배하여 줄리엣에게 사로잡혀온 상황.
당장 상대가 보여주는 태도로 보아 자신을 적대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만약 정말 줄리엣의 목표가 거짓이 아니라면.
아버지를 프랑켄 박사를 재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음… 후기로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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