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0
줄리엣은 샤론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드라칸과 임시 동맹을 맺으며 머물게 된 동굴은 빈말로라도 좋은 환경이라 부르긴 힘들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데다 바닥까지 울퉁불퉁해 조금만 방심하면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방이라고 나누어둔 개인 공간마저 그냥 동굴에 벽을 친 수준에 불과해 마음 편히 휴식할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드라칸이 이곳을 아지트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그만큼 꼭꼭 숨겨져 있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한 은밀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 이후로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아 오랜만에 밖에 나갔다 왔더니 힘드네.”
“엄살 피우지 마라. 작전은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하.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내가 용부리미를 묶고 있는 동안 네가 제대로 했으면 됐었잖아!”
언제나처럼 또 티격태격 중인 베로니카와 지크프리트.
그런 두 사람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프란체스카.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에요···.”
그리고 디트리히는 그런 상황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본인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집행자 여자는 제법 강했지. 그 남자애도 꽤 괜찮았고. 다음에 또 한번 붙을 수 있으면 좋겠군. 그때야말로 못다 한 승패를 결착 짓고 말겠다! 크하하!!”
이런 아수라장을 지켜보던 가면의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탁상을 두들기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잡담은 거기까지 해라. 이제 회의 시간이다.”
때마침 회의장에 들어온 줄리엣이 자연스레 빈자리에 착석했다.
다른 단원들은 그녀를 한 번씩 힐끔거렸지만 애초에 별다른 친분이 없던지라 특별히 인사를 건네거나 하진 않았다.
“먼저 데려온 제2 목표의 상태는?”
“방금 깨어난 걸 확인하고 오는 길이에요. 문제는 없어요.”
“좋아. 목표의 관리는 계속 부탁하지.”
그때 베로니카가 턱을 괸 채 못마땅한 얼굴로 얘기에 끼어들었다.
“제2 목표고 자시고. 그 애가 대체 뭐길래 데려와야 하는 건데? 그냥 이 여자랑 얼굴 똑같이 생긴 아카데미 학생 아니야? 적어도 뭘 위해서인지 정도는 우리한테도 알려줘야지.”
가면을 쓴 사내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 대답했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언제나 단 하나. 드래곤의 재림이다. 당연히 이번 제2 목표 역시 그를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그 과정이 뭔지를 설명해달라고. 우리가 고분고분 네 명령만 따라야 하는 부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상당히 공격적인 언행에 가만히 지켜보던 지크프리트도 가세하듯 입을 열었다.
“네가 리더의 총애를 받는단 건 알지만 그렇다고 네가 리더 행세를 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솔직히 좀 기분 나쁘거든.”
미묘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외부인에 가깝던 줄리엣이 대뜸 끼어들었다.
“설명해 드릴게요.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말이 좀 통하는 친구네.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으면 좀 혼내주려 했는데.”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며 줄리엣이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던 프란체스카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보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어이.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라니. 웬만하면 그냥 좀 있다···.”
그녀는 지크프리트의 말을 툭 끊으며 얘기했다.
“아무래도 추격이 따라붙은 거 같아요.”
***
“놈들이 우리의 추격을 알아차렸을 가능성도 있다.”
아일랜드에 상륙하고 얼마 후 우리는 마침내 드라칸 아지트의 바로 앞에 도착하였다.
마법까지 이용해 정교하게 숨겨진 동굴의 입구.
만약 추적 마법이 없었다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꼼꼼하게 감춰져 있었지만 그렇기에 이 앞에 놈들이 있으리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입구 앞에 잠시 멈춰선 채 에반은 조용하면서도 덤덤하게 경고의 말을 내뱉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자만하지 마라. 상대는 극악무도한 범죄 조직이며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 만전을 기하고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적들이다.”
부정적인 말들만 쏟아지니 집행자들의 표정에도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들과 한 명씩 천천히 눈을 맞춘 에반은 이윽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반드시 이기자.”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한마디를.
“우리가 아니면 누가 저 괴물들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우리가 겁먹고 도망친다면 누가 세상을 지키겠나. 그 누구도 드라칸을 죽일 수 없다. 오직 우리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할 수 있다.”
마침내 모두의 얼굴에는 죽음마저 무릅쓸 비장의 각오가 새겨졌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음지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이들.
그들이 바로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집행하는 존재 집행자.
드라칸을 섬멸하고 샤론을 구하기 위해 집행자들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을 뒤따라가려는 찰나 에반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이곳에 남아있어라.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해준 것만으로 네 역할은 모두 끝났다. 이 이상은 너무 위험해. 넌 집행자가 아니야.”
“제 친구가 저 안에 있어요. 그리고 동굴 안의 구조가 어떤지 모르는 이상 제 추적은 여전히 필요할 거예요.”
내 마음을 돌리기 힘들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에반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졸업하면 집행부로 들어와라. 성적이 안 되면 내가 추천서라도 써줄 테니까.”
“하하···.”
이 사람은 내가 예전에도 본인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걸 알까?
물론 그때는 크로 모리스가 아니라 괴도 레이븐으로서 받은 거였지만.
“좋아. 그럼 들어가자.”
“네.”
에반을 뒤따라 동굴 안으로 걸음을 한 발 내디딘 순간.
오랜만에 들려오는 여신님의 음성이 나를 불렀다.
[크로.]
‘오. 웬일이세요?’
여신님은 보통 평화로운 일상이 아닌 이런 위급한 순간엔 일부러 말을 아끼시는 편이다.
아마 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차원이겠지.
즉 이런 상황에서 나를 불러세웠다는 건.
그만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단 뜻이리라.
하지만 여신님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들려오는 의미심장한 경고.
[···여기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 순간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거란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살짝 멈칫하고 말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담겨있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듣자마자 깨달아버렸다.
이곳이 바로 예언에서 등장했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무대라는 것을.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신님의 말대로 이 동굴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은 운명의 흐름대로 흘러가리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정리했다.
여신님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샤론을 구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괜찮아요. 반드시 이겨낼 테니까요.’
내게는 운명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예언의 ‘비참한 최후’ 또한 충분히 피할 수 있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여신님은 마치 뒤에서 나를 부드럽게 끌어 안아주듯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걸어갈 가시밭길을 끝까지 함께 따라가 주마.]
그 어떤 위로보다도 든든한 말이었다. 덕분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드라칸 소탕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아일랜드의 한 평원.
한 소녀가 잔디밭에 앉아 멍하니 일몰의 노을빛을 감상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간은 휑했다.
눈에 띄는 요소라곤 거대한 나무와 앞에 놓인 묘비 하나뿐.
그 외에는 세월의 풍파에 아스러진 건물의 잔해가 고작. 빈말로라도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만 들 뿐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소녀에게 있어선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든 공간이었다.
“크로 님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다시 그때처럼 둘이서 함께 신전을 탐색하는 모험을 하고 싶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도란도란 수다를 떠들다 잠들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놀러 오겠다고 약속했으니 분명 아일랜드에 올 일이 있으면 사무실로 들러줄 거라 확신하고 있다.
그날까지 기다리는 과정이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로시는 이 신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크로가 돌아오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이곳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기에.
아스러진 신전이었나?
사실 이곳에 도달한 뒤부터 크로와 헤어지기 전까지의 기억인 꿈처럼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무슨 신기한 일을 경험한 것 같으면서도 아무 일 없이 그냥 조용히 끝난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크로가 찾아 헤매던 신전이 바로 여기였다는 것 정도뿐.
“시간의 여신이라 했나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시간의 여신을 섬기던 신전이 아닌 듯했다.
특히 묘비에 새겨진 까마귀의 상징이 그 생각을 공고히 해주었다.
이 문양은 아무리 봐도 시간을 상징한다기보단···.
속으로 추측을 이어가며 까마귀 상징을 쓰다듬던 도로시는 이내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헉..!! 이건… 엄청난 것이에용!! (뭔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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