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1
“······.”
숨 막히는 적막 아래 추격조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어두운 동굴을 비추는 희미한 등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였다.
상황이 좋게 흘러가리란 낙관적인 희망은 누구도 품지 않았다.
모두의 표정에는 이미 죽음마저 각오한 굳센 결의가 깃들어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에반이 가정했던 최악의 예측은 정확히 실현되었다.
쿠쿠쿵-!!
지면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드라칸의 선봉장인 디트리히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 준비!!”
에반의 외침에 집행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전투 진용을 갖추었다.
그런 적들을 내려다보며 디트리히는 흡족한 웃음을 내비쳤다.
“집행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찾아오다니! 최고로 짜릿한 전투가 되겠어!!”
가볍게 휘두른 주먹이 엄청난 파공음을 내뿜으며 에반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에반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을 앞으로 뻗자 아무런 딜레이 없이 즉발로 시전된 견고한 방어 마법이 거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그와 동시에 양옆에 있던 집행자 두 명이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서슴없이 접근하여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신체 강화 마법사인 듯했다.
확실히 제아무리 디트리히라 하더라도 집행자가 둘이나 붙으니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뒤따를 만큼 과격한 충돌이 반복됐다.
쿵! 쿵!!!
“하하! 좋아! 날 더 재밌게 해봐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디트리히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기쁜 표정으로 전투를 즐기고 있었다. 그를 상대하던 집행자들조차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주춤거릴 만큼 광적인 모습이었다.
에반은 처음 공격을 막은 이후론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쪽을 한 번 흘겨본 뒤 매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계속 이동한다.”
“네? 하지만···!!”
그 결정을 납득하지 못한 내가 반발하자 곧바로 차가운 반문이 돌아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뭐지? 네 친구의 구출 아닌가?”
“······.”
“시간을 끄는 거야말로 적들이 진정 바라는 걸지도 몰라. 그리고 난 동료들을 믿는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샤론을 구하는 거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디트리히와 싸우는 2명의 집행자를 뒤로한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 한기는.”
어느샌가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 온몸이 오슬오슬 떨리기 시작하자 이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능글맞으면서도 차가운 빈정거림이 섞인 어투.
이제는 지긋지긋할 만큼 맞부딪친 상대 지크프리트가 예상대로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어이가 없네. 우리가 얼마나 얕보였으면 이렇게 대놓고 따라올 수 있는 거지? 죽음이 두렵지도 않나?”
양팔을 벌린 채 냉소를 터뜨리는 녀석의 눈빛은 정확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 나로서야 잘된 일이지. 아까의 굴욕을 갚아줄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역시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든 찰나 옆에 있던 캐서린이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여기선 마법 상성이 좋은 제가 나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다른 분들은 계속 이동해주세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판단이었다.
화염 마법을 다루는 레이첼만큼이나 폭발 마법의 대가인 캐서린 역시 지크프리트의 빙결 마법을 상대하기 좋은 편이었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을 남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에반이 말한 대로 지금은 샤론을 구하는 데만 집중하며 합리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네. 그럼 캐서린 씨 부탁할···. 으윽!!”
그때 갑자기 머리를 뒤흔드는 익숙한 통증이 엄습했다.
틀림없다. 이건 그 여자의 세뇌 마법이다.
문제는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두운 동굴의 환경을 이용해 몸을 숨긴 채 멀리서 내게 마법을 시전한 것 같다.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지며 몸의 주도권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설마 다른 집행자들을 놔두고 나를 먼저 공략할 줄이야···.
역시 우려했던대로 베로니카의 마법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드라칸 내에서 가장 위협적인 변수라고 꼽을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우리 역시 그 점을 예상하여 대비책을 마련해두었었다.
탐색 마법에 특화된 집행자가 자세를 낮춰 땅에 손을 올리고 잠시 후 마침내 숨어있던 베로니카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직후.
탕!!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리퍼가 선글라스를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나이스 샷.”
베로니카의 세뇌 마법은 지나처럼 엄청난 마법 저항력이 없다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기 힘들 만큼 막강한 능력이다.
하지만 마법엔 언제나 상성이 존재한다.
지크프리트의 빙결 마법이 레이첼의 화염에 상쇄되었듯 샤론의 삼격 필살이 하양이의 시간 정지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베로니카의 마법을 완전히 파훼할 수 있는 상성을 지닌 존재가 바로 리퍼.
그가 적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상대는 확정적으로 영혼의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에서의 리퍼는 이름 그대로 저승사자와도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적을 무참히 찢어발길 수 있다.
물리적인 데미지를 주는 건 아니지만 반대로 정신과 내면이란 분야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리퍼를 이길 수 없다. 나 역시도 파훼법을 찾아내 영혼 세계를 탈출했었을 뿐 리퍼를 완벽하게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었으니까.
총성이 들리고 고작 1초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베로니카가 무릎을 꿇은 채 완전히 넋이 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현실과 달리 영혼 세계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저 안에서 누가 이기고 있는지는 굳이 들여볼 필요도 없어 보였다.
동료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지니 지크프리트도 당황한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무슨···. 네놈들 뭔 짓을 한 거냐.”
“한가롭게 수다나 떠들 시간은 없을 텐데요.”
상대가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캐서린이 폭발을 추진력 삼아 허공을 도약해 앞으로 달려들었다. 위협적인 돌진에 혀를 차며 황급히 거리를 벌리는 지크프리트.
“계속 간다.”
나를 포함해 남은 4명은 계속해서 신호의 근원지인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땅 밑에서 일렁거리는 어둠이 솟구치더니 공간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이 마법의 주인은 분명···.
“이거 곤란하게 됐군. 아직 마력을 다 회복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가면을 쓴 사내가 터덜터덜 걸어오며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동굴이 좁다 보니 다 같이 한곳에서 막기도 힘들단 말이지. 잘못하다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의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의식?”
“뭐 아무튼 이 너머론 가지 못할 거다. 전부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상대는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이 닥쳐왔다.
저 녀석은 다른 놈들과 아예 수준이 다르다.
조커를 꺼낸다 해도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문제는 나 역시 아카데미 습격 때 이후로 줄곧 지친 상태였기에 조커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앞으로 한 번이 고작이었다.
그때 놈의 등 뒤에서 넘실거리던 검은 기운이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변해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촤악-!!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선두에 서 있던 집행자 두 명이 쓰러졌다.
몸을 양단으로 분리해버릴 정도의 위력. 순식간에 닥친 죽음에 동공이 커지고 호흡이 가빠지던 찰나.
에반이 직전부터 캐스팅하던 마법을 시전하였다.
그러자 검은 장막에 유일하게 빛나는 새하얀 문이 만들어졌다.
“나가라.”
“···예?”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그게 무슨.
지금 나를 살려 보내기 위해서 마법을 시전했다는 건가?
그의 실력이었다면 동료가 당하기 전에 방어 마법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그들을 희생시켜 내가 확실히 장막에서 탈출하는 미래를 선택했다.
“어째서···.”
“말했잖아. 우리는 할 수 없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에반은 나를 슬쩍 바라본 다음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아무 근거 없는 직감이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아니 에반은 내게서 ‘가능성’을 엿본 것이다.
기관장이 말했던 이방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운명을 뒤틀 가능성을.
“순순히 보내줄 것 같나?”
또다시 상대의 공격이 엄습한다.
피할 수 없는 어둠의 습격.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무사했다.
에반이 내 앞을 막아서며 공격을 대신 맞아주었기에.
“빨리 가.”
왼쪽 어깨 부분이 거칠게 뜯겨나간 그의 뒷모습에 헛숨을 삼키고 억지로 뒤를 돌아 문을 열었다.
장막 밖으로 나오자마자 빛나던 문은 사라지며 세상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더는 확인할 수 없었다.
“······.”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도 나아가야만 했다.
설령 이것이 내 마지막 싸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제 여름도 얼마 남지 않은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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