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2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모두가 희생을 자처하면서까지 뚫어준 길이었다.
내 가능성을 믿어준 에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해낼 것이다.
동굴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깊고 복잡했다.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에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길은 내가 방금까지 어디에 서 있었는지조차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추적 마법이 없었다면 진작에 길을 잃고 헤맸겠지.
생각할수록 그 긴박한 순간에 완벽한 상황 대처를 해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겠지···.’
샤론이 어떤 상태일지 걱정이 됐다.
아까 가면을 쓴 사내가 지나가듯 언급했던 ‘의식’이란 단어가 굉장히 신경 쓰였다.
분명 드라칸의 목표는 용부리미인 지나였을 것이다.
거기에 샤론에게 용무가 있던 줄리엣이 드라칸에 합류해 정보를 알려주며 임시 동맹을 맺게 된 것일 테고.
즉 드라칸이 지나가 아닌 샤론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나마 안심하고 있던 건데 방금의 얘기를 떠올리면 그조차 속단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결국 뭐가 됐든 최대한 빨리 가는 수밖에 없다.
신호는 점차 가까워져 갔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부터 작은 빛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허어···. 허억···.”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내 앞에는 지하 동굴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광활한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세 여인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멀리서 언뜻 보기엔 뭘 하고 있는지 쉽게 알기 힘든 구도였다.
그들의 뒤를 막고 있는 벽면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수정 크리스탈 광맥이 거대하게 자리 잡아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샤론은 다행히 무사한 듯했다. 온몸을 포박당해 무릎을 꿇고 앉아있긴 해도 겉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그런 샤론을 가운데 두고서 양옆에 각각 줄리엣과 또 다른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보라색의 풍성한 머리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 그녀가 드라칸의 단원인 프란체스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스레 경계심이 끓어올랐다.
프란체스카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드라칸 내에서도 특히 정보가 밝혀지지 않은 단원이었다.
확실한 건 다른 단원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어쩌면 제일 위험할지도 모르는 존재란 사실이다.
그녀는 내가 공동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인기척을 느낀 건지 고개를 휙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의외네요. 방어선을 뚫고 여기까지 도달하는 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동굴의 환경상 메아리처럼 울리는 상대의 목소리.
그에 줄리엣과 샤론 역시 마찬가지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착잡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줄리엣과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샤론.
나는 작게 심호흡한 뒤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샤론을 풀어줘.”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저분은 저희의 숙명을 이루기 위한 열쇠거든요.”
프란체스카의 거절에 내 예측이 점점 현실화되어갔다.
“···너희의 숙명은 드래곤을 재림시키는 거잖아. 그 목표에 샤론이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데?”
“흠. 당신께 저희의 계획을 일일이 설명해 드려야 할 이유가 있나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으나 역시 상대는 순순히 정보를 넘겨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적인 이상 샤론을 구출하기 위해선 전투는 불가피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더는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허비할 이유도 없다.
곧바로 끝장을 낼 작정으로 망설이지 않고 조커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서걱-.
하지만 내가 카드를 꺼내 들기 무섭게 무언가 번쩍이더니 허무하게 양단되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냥 지켜볼 줄 알았나요? 당신의 마법에 대해선 이미 동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답니다.”
프란체스카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상대를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처럼 그녀도 똑같이 나를 경계하고 있었던 거다.
그보다도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이렇게 먼 거리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만으로 단번에 카드를 잘라내다니.
공격 수단이 뭐였던 건지 마법이 언제 발동한 건지조차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엄청난 속도에 말도 안 되는 사거리 심지어 눈으로 전혀 볼 수 없는 은밀성까지.
강한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막막함이 들 정도일 줄이야.
“생각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더 고민할 필요 없도록 당장 죽여드리죠.”
어떻게 대응할 방법조차 없이 상대가 검지를 펼치는 모습을 바라보던 찰나.
“잠깐만요. 그는 살려둬야 해요.”
갑작스러운 줄리엣의 제지로 프란체스카는 움직임을 우뚝 멈춰 세웠다.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심기가 불편해진 건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줄리엣을 쳐다보았다.
“살려둬야 한다고요? 이유가 뭐죠?”
“의식에 도움이 되니까요.”
“이전까지 그런 말은 없었을 텐데요.”
“방금까진 그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몰랐거든요. 물론 없어도 의식 진행 자체엔 문제가 없지만 있는 편이 훨씬 매끄럽게 진행될 거예요.”
프란체스카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름답지 못한 흐름이에요. 아주 불쾌하다고요. 그렇지만 이번 한 번만 넘어가 드리죠.”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줄리엣이 나를 살려둬야 한다며 드라칸을 막아준 건가?
어째서? 내가 의식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애초에 의식이란 게 정확히 뭘 뜻하는 건데?
혼란에 휩싸이던 가운데 갑자기 목을 강하게 조르는 압박감이 덮쳐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압력 조금만 더 조이면 곧바로 목이 끊어질 것만 같은 날카로움.
“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요.”
이것도 저 여자의 마법인 건가···!
그 와중에도 살짝 보였던 반짝거림. 분명 그것이 이 알 수 없는 능력의 정체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걸 눈치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목의 조임을 무시하고 섣불리 움직였다간 정말로 두 동강이 나버릴지도 모른다.
천천히 목을 당겨오는 감각에 어쩌지도 못하고 그녀가 유도하는 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줄리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뭘 생각하는지 알기 힘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
마침내 바로 앞까지 도달한 그녀는 이내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틈을 만들어 드릴게요.”
“···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이제는 정말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자력으로 혼자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슨 속셈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당장은 줄리엣의 장단에 맞춰 프란체스카를 쓰러트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긍정의 눈빛을 보내자 줄리엣은 즉시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허공을 반으로 갈랐다.
그러자 목을 조르던 압박감이 사라짐과 동시에 공중에서 반짝거리던 것의 정체가 예상했던 대로 실이었음을 확인했다.
“무슨 짓을···!!”
갑작스러운 배신에 프란체스카가 입술을 깨물며 황급히 대응하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앞서 내가 조커 카드를 꺼내 들어 마법을 발동하는 것이 빨랐다.
즉시 내 곁에 생겨난 조커가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타로 카드 한 장을 뽑아 들었다.
XVI. <The Tower>
나와 적의 중간에 거대한 탑이 솟구쳐 올랐다.
돌로 쌓아 올려진 탑의 정상엔 거대한 눈동자가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작 이딴 걸로···!!”
악을 내지르며 다섯 손가락을 전부 앞으로 내뻗어 실을 조작하는 프란체스카.
실이라곤 믿기지 않는 절삭력과 파괴력이 탑을 마구 베어내며 난도질했지만 거대한 탑은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서 있었다.
그리고 탑의 정상에 있던 눈동자는 마침내 땅에 선 인간 여인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그 즉시 하늘에서 천벌을 내리듯 흉포한 벼락이 떨어져 동굴을 빛으로 가득 메웠다.
“꺄아악!!”
섬광이 사라지고 벼락이 떨어진 자리엔 그을음과 함께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여인이 있었다.
직전까지의 아름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엔 숯검정이 가득했고 윤기가 흘러넘치던 머리도 삐쭉삐쭉한 산발로 변해버렸다.
그럼에도 프란체스카는 쓰러지지 않고 정상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아름답지도 않은 주제에···.”
그 말에 대답하듯 눈은 반쯤 감기며 휘어졌다.
마치 그녀의 초라한 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감히!!!”
그에 더 참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채 무작정 달려드는 프란체스카.
공동에 흩뿌려놓은 실을 타고서 허공을 부유해 곧바로 날아들던 그녀는 탑의 창문 안에서 손을 내뻗는 무수히 많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 기이한 광경에 압도당한 여인은 분노조차 망각하고서 두려움에 떨었다.
“자 잠깐···.”
하지만 되돌리기엔 늦었었다.
이미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그림자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붙잡혀 천천히 끌려가고 마는 광경은 순간 동정심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인과응보.
막강해 보이는 탑은 사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적대할 리 없는 중립적 존재였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경멸하고 남을 깔보는 프란체스카의 오만한 성격이 투박한 돌탑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불쾌한 눈동자의 시선을 참지 못해 벌어진 참사였던 것이다.
그녀를 집어삼킨 탑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천히 땅으로 파고들어 모습을 감춰갔다.
시간이 지나자 그곳엔 벼락이 내리쳐 생긴 그을음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
더는 무리다.
이제 조커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문제는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란 거겠지.
코앞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줄리엣은 여전히 무얼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슬슬 차기작 준비도 들어가야겠네용
물론 완결까진 아직 꽤 남은 느낌이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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