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6
여신님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둘은 지금 중간계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신들은 중간계엔 자신이 직접 선택한 사도나 자신을 섬기는 신도들을 통한 간접적인 개입밖에 할 수 없다.
직접적인 개입 즉 땅에 직접 내려가는 것은 신들의 규율을 위배하는 행동인 셈이다.
아마도 여신님이 땅으로 추방되어 힘을 보물들에 봉인 당한 것도 그와 관련된 거겠지.
마음 같아선 말리고 싶지만 어차피 내가 보는 장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재생한 녹화본이나 다름없기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었다.
설령 개입할 수 있었다고 해도 여신님의 기대에 부푼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뻗었던 손을 되돌리며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언니. 금칙을 잊은 건 아니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단다. 반드시 동이 트기 전에 돌아오는 것. 밤의 여신인 내가 그걸 모를 리 있겠니?”
“언니는 거짓의 여신이기도 하잖아.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아?”
“후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까.”
더는 꾸물거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여신님은 문고리를 쥐어 잡고는 아무 예고도 없이 휙 열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문 너머에 펼쳐진 넓은 들판과 수놓아진 밤하늘.
퍽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것처럼 두 자매는 한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듬뿍 즐겼다.
“밑에서 바라본 하늘은 이런 느낌이구나. 언제나 위에서만 봤던 풍경일 진데.”
“들꽃의 향기를 품은 바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물들이 생생히 느껴져.”
여신님은 동생을 쳐다보며 거보란 듯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어때. 아직도 중간계에 내려온 걸 후회하니?”
“···가끔 이렇게 잠깐 들리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후후. 더 다양한 곳을 둘러볼수록 더 좋아하게 될 거란다. 단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건 전혀 다르니까.”
다만 언니와 달리 이터나는 여전히 불안감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듯했다.
“언니. 중간계를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 그러다가 자칫 인간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 사실 잘 이해가 안 간단다. 이 아름다운 세상은 모두 우리가 힘을 합쳐 만든 거잖니. 그걸 멀찍이서 감상만 하고 직접 경험하지 않는 건 너무 손해인 게 아닐까.”
“그만큼 아름다운 세상이니까 아껴줘야지. 잘못 건드리면 부서질 만큼 연약한 공예품이랑 같은 거야. 특히 인간들은 더더욱.”
동생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신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찾아오고 그녀는 대뜸 뒤로 털썩 누워 양팔을 벌린 채 하늘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너무 아름다운 세상이야. 인간들만 독차지하기엔 아까울 만큼.”
“······.”
나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계속 지켜보며 뭐라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왜 그래?”
프랑켄의 직접적인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누워있던 여신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혀 몰랐어. 여신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을걸. 이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도 훌쩍 넘은 먼 과거야. 강산이 바뀌어도 500번은 더 바뀌었을 만큼 긴 세월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프랑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막말로 여신님이 인간들을 더러운 바퀴벌레 취급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인간이 살기엔 세상이 너무 예뻐서 아깝다고 했을 뿐이지.”
“···결국 비슷한 뜻 아니야?”
“글쎄. 확실한 건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진 않았다는 거 아닐까.”
확실히 여신님은 진심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그 애틋한 감정은 절대 속마음을 숨기고 꾸며낸다 해서 만들어질 수 있을 만큼 가벼운 크기가 아니었다.
···그거면 충분한 걸까?
만약 여신님이 모든 인류를 다 혐오한다고 할지라도 나만 사랑해준다면 아무 상관 없는 걸까.
상념에 잠겨있던 사이 들판에 무언가 기척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처음엔 경계심을 끌어올리던 두 여신도 불청객의 정체를 깨닫고는 적의를 지우고 호기심을 보였다.
“토끼로구나.”
“귀여워···.”
“번제물로 바쳐지던 것보다 작은 걸 보니 새끼인가?”
그 순수한 호기심에 이터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언니를 나무랐다.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데 제물이라니. 불쌍하지도 않아?”
“이터나. 토끼는 대화를 알아듣고 이해할 만큼 지성이 뛰어나지 않단다. 그런 건 지성체들만 가능한 거야.”
“누가 그걸 몰라···! 내 말은 그래도 바로 앞에서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거야!”
“너는 가끔 감수성이 너무 뛰어나서 탈이구나.”
언니 동생 간의 시답잖은 말다툼 이후 이터나는 무릎을 쪼그리고 토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신의 격에 이끌린 토끼는 저항 없이 쪼르르 다가가 그녀의 손에 코를 파묻었다.
낯설면서도 신기한 감촉에 이터나는 작게 웃으며 토끼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네. 데려가서 키우고 싶어졌어.”
“신전에는 토끼가 먹을 만한 풀이 없단다.”
“나도 알아. 그냥 해본 말인걸.”
그래도 키우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이터나는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토끼에게서 관심을 떼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여신님은 이윽고 토끼가 나타났던 장소로 시선을 돌리며 동생에게 얘기했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저 숲속에서 온 모양인데 한번 저기까지 가보는 건 어때?”
“···하지만 문 근처를 벗어나는 건 위험해.”
“괜찮아. 이 근처는 딱 봐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 같으니까. 더군다나 인간들은 숲속의 늑대나 곰을 무서워해서 함부로 들어오지도 않잖니.”
언니의 은근한 꼬드김과 동물들을 더 보고 싶다는 욕망에 굴복하고 만 이터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조금만 있다 바로 돌아오는 거야.”
“후후. 물론이지.”
그렇게 둘은 토끼를 품에 안아 든 채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그리 특별히 눈에 띄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까 전 여신님이 중얼거린 혼잣말은 다소 의미심장하긴 했지만 프랑켄이 말한 대로 단순히 지나가며 흘린 말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때 당시의 여신님은 아직 인간과 직접 마주친 적도 없던 상태였으니까.
그렇다면 프랑켄은 왜 이 장면을 내게 보여주는 걸까.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보아선 당장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진 않은데. 중간계에 내려갔다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 상황만 보여줘도 되지 않나.
···일단 계속 지켜보자.
나는 잠시 앞서 멀어져가는 두 여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속은 평화로웠지만 조용하지는 않았다. 온갖 종류의 소리가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 울창한 나무 사이를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 그리고 숲에 찾아온 손님들의 일정한 발소리까지.
자연의 깨끗한 아름다움이 완벽한 형태로 펼쳐져 있는 듯했다.
“···이곳에선 평생을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
불멸을 살아가는 신이 그것도 시간의 여신이 그렇게 얘기하니 진실성이 가득 느껴졌다.
이터나가 바라던 대로 숲속에는 토끼보다 훨씬 다양한 동물들이 각자의 삶을 꾸린 채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숲에 찾아온 낯선 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태도로 반겨주었다.
“사슴 멧돼지 이 녀석은 참새로군.”
여신님 또한 제 곁으로 몰려든 동물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초월적으로 아름다운 두 미녀가 숲속에서 동물들 틈에 둘러싸인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다만 그런 평화로운 장면을 지켜볼수록 내 의문은 도리어 점점 커질 뿐이었다.
“윽···.”
그 순간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너구리의 모습에 깜짝 놀라다 황급히 코를 부여잡았다.
냄새가 뭐 이리 고약해···? 그냥 너구리가 아니라 스컹크인가?
나를 관통해서 뚫고 지나가길래 순간 놀랐다가 뒤늦게 내가 어떤 상태인지 깨닫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될 거란 생각에 잔뜩 긴장했는데 고작 스컹크 따위한테 놀라서 움츠러들기나 하고. 대체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갑작스레 몰려드는 허탈함에 기운이 쭉 빠져 프랑켄을 불렀다.
“프랑켄. 혹시 잠깐 쉬었다가···. 어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옆에 프랑켄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이 사람은 갑자기 어딜 간 거야?’
혹시 내가 놓친 건가?
사실은 저 두 여신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 시간대에 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프랑켄은 내가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해 목적지로 가버리고 나 혼자 낙오된 걸지도.
“하아···.”
한숨이 절로 튀어나오는 갑갑한 상황이었지만 일단 어쩔 수 없었다.
프랑켄이 나를 찾으러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여신님을 지켜보는 수밖에.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뒤로한 채 나는 계속해서 숲속의 두 여신님을 관찰해나갔다.
스컹크의 악취는 너무나도 고약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알려드릴 소식이 있답니당!
새로운 신작 연재를 시작했어용..!!
현대 순애 러브코미디물이니 관심 있으신 독짜님들은 한번 읽어봐주세용..!!!
무 물론 꼭 읽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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