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0
소년이 이터나를 데리고 향한 곳은 바로 숲속에 있는 작은 호숫가였다.
“우와···.”
저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여신은 눈을 떼지 못했다.
기대하던 반응에 소년은 뿌듯함을 느끼며 그녀에게 말했다.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이별해야 하지만 부디 그녀가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추억할 수 있길.
그래서 언젠가 운명이 다시 이끌어준다면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달빛이 호수의 수면에 비치며 은은한 빛을 흘렸다.
둘은 풀밭에 사뿐히 주저앉아 멍하니 호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소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
그럴 수밖에. 이터나는 일부러 자신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숨겼으니까.
둘이 떠들 땐 항상 소년이 말하고 여신은 귀 기울여 들었다. 가끔 던지는 질문들도 전부 소년에 관한 내용뿐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그녀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몇 가지는 알아요. 당신은 이야기에 집중할 때 양손을 깍지 끼는 버릇이 있어요. 웃을 땐 왼쪽 뺨에 보조개가 생기죠. 그리고 놀라면 손을 입가로 가리며 귀여운 감탄사를 흘리기도 해요.”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사소한 버릇들을 술술 얘기하는 소년.
이터나는 자기가 입가를 가리고 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 말이 전부 사실임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 허락된 정보는 겨우 이 정도뿐이겠죠. 이걸로도 만족해요. 그렇지만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에요.”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부탁했다.
“제게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실 수 없나요···? 당신을 평생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애절한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할 뻔한 이터나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절대 이뤄줄 수 없는 소원이었다.
그녀는 시간의 여신. 땅에는 자신을 섬기고 있는 인간들이 존재했다. 이터나란 이름을 알려준다면 언제인가 반드시 정체를 들키고 말 것이다.
신이 땅에 내려왔었단 사실은 밝혀져선 안 된다. 그러니 소년이 기억하는 자신은 비밀을 간직한 수수께끼의 여인으로 추억되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애써 되뇌며 이터나는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활기차게 외쳤다.
“저희 호수 위에 가보지 않을래요? 여기에 나룻배가 있거든요!”
마치 그녀가 어떤 답을 할지 이미 예상했었다는 듯한 반응에 그녀는 차마 입 밖으로 매몰찬 말을 꺼내지 못하고 화제 전환에 응해주었다.
“네. 좋아요.”
두 남녀는 호숫가에 정박해있던 나룻배에 마주 탔다.
노를 잡고서 천천히 저으며 중심으로 향하는 배 안에선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소년은 묵묵히 노를 젓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덤덤한 어투로 얘기했다.
“결국 알려주지 않으시네요.”
“···죄송해요.”
“아니요. 사실 어느 정도 짐작했어요. 당신이 특별한 신분의 존재라는 것쯤은 처음 봤을 때부터 모를 수 없었으니까요.”
이터나는 그 추측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분위기로 보아 신분의 격차를 이해한 소년이 알아서 마음을 접을 것 같았기에.
비록 그 차가운 사실이 이터나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지만 이것이 서로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결말이란 걸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저는···.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
“···네?”
“요정 드래곤 악마 천사 아니면···. 신.”
그 순간 이터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와 상관없이 소년은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사실 논리적인 근거는 없어요. 단순한 본능적 직감···. 어쩌면 멍청한 망상일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제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확신하게 됐죠.”
가슴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다만 여태까지처럼 기분 좋은 설렘이 아닌 급박하고 위태로운 긴장감에 가까웠다.
“제 생각이 맞나요?”
이터나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전 평범한 인간이에요.”
“···역시 그렇군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던 소년은 이윽고 노에서 손을 떼었다.
“죄송해요. 전 아무래도 심각한 고집불통인가 봐요. 여전히 제 눈에 당신은 아름다운 여신으로밖에 보이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년.
묘한 불안감을 느낀 이터나는 그를 말렸다.
“위험해요. 앉아 있어요.”
“당신이 특별한 힘을 가졌다면 그리고 저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이 차가운 호수 속에서 구해줄 거라 믿어요.”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평범한 인간이면 그대로 빠져 죽는 거라고요!”
“그로써 당신의 결백이 입증된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만약 제가 특별한 존재라고 쳐도 그렇다면 한낱 인간에 불과한 당신을 왜 구해줄 거라 확신하는 거죠?”
그에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확신하지 않아요. 단지 당신에게 외면받을 바엔 죽는 게 나을 뿐.”
그 말과 동시에 소년은 아무 망설임 없이 배에서 뛰어내려 호수 안으로 빠져들었다.
수면 위에는 어떤 첨벙거림도 없이 잔잔한 고요만이 이어졌다.
소년은 자신이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음을 느꼈다.
물속은 너무나 차가워 금방이라도 얼어붙어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두운 바닥을 향해 계속해서 내려가며.
마침내 뿌옇던 시야가 완전히 캄캄해지던 그때.
누군가 소년의 손을 붙잡고 위로 한없이 끌어당겼다.
소년은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에게 손을 뻗는 새하얀 휘광으로 뒤덮인 여신의 자태를 목도하였다.
첨벙-!
소년을 구해 나룻배로 돌아온 이터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왜···. 끝에 끝까지···.”
구해주지 않으면 결국 납득할 거라 믿었다.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연기일 뿐 끝에 가선 본인이 직접 수영해 올라올 거라 믿으며 끝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소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마침내 소년의 입에서 마지막 생명의 숨결이 빠져나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결국 이터나는 신의 힘을 개방해 그를 구해내었다.
정말로 소년은 죽으려고 했다.
자신이 구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다.
쓰러진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이터나는 울먹거렸다.
“왜 이리 바보 같은가요···.”
어차피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인데.
어느샌가 달은 천천히 기울어가기 시작했지만 시간의 여신은 그런 시간의 흐름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소년의 안위를 살피는 데만 온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그 무렵.
숲의 바깥 들판에서 동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또 다른 여신은 점점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너무 늦는데···.’
어제도 아슬아슬했던 터라 한번 경고했었는데 오늘도 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인내심을 가진 채 기다렸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세상이 밝아올수록 여신의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다.
그리고 결국. 달은 산등성이 아래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새벽 여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문을 향해 달려가도 늦을지 모를 만큼 촉박한 시간.
발을 동동 구르던 여신은 결국 동생을 찾으러 숲속에 들어갔다.
이제는 걱정이 들었다.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물론 여신이 땅에서 위해를 입을 리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이 언니의 마음.
또한 자신들이 이 땅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밤 시간대뿐이다.
달이 지고 태양이 뜬 이후부턴 그녀들도 이전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없게 된다.
“이터나! 어디 있니!?”
숲을 샅샅이 뒤지던 여신은 마침내 동생을 발견하였다.
밝은 여명으로 빛나는 호수의 가운데 배 위에서 한 소년을 끌어안고 있는 이터나의 모습을 말이다.
“···인간?”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 인간과 함께 그것도 매우 소중한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이미 해는 떠올랐다. 당장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을 파악한 여신의 눈매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
“으윽···.”
온몸이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무거운 몸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분명 배 위에서 그녀를···.
그녀는 어디 있지?
주변의 풍경은 숲속 오두막과 똑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치 정교하게 꾸며놓은 연극 무대 같은 어색함이랄까.
무엇보다 너무 어두웠다. 난롯불이 피어오르고 있음에도 어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짙은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상당히 몰입하고 있구나.”
그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한껏 움츠러든 채 물었다.
“···누구야?”
“나는 너야. 이야기의 엑스트라이자 낭만 넘치는 괴도이자 모든 걸 꾸민 천재 과학자 영겁을 기다린 노인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던 소년.”
마침내 그림자가 들추어지며 그 속에 숨어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정장과 실크햇 까마귀 형상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
“지금은 괴도 레이븐이라 불러 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슬슬 느낌이 오지 않나용??
안 오면 말구용..! 아직 이야기는 더 남았으니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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