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4
“···이름을 맞히라고요?”
“그래. 만약 맞힌다면 네 말을 인정할게. 정말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면 여기서 작별하지 않아도 괜찮을 테니까.”
소년의 물음에 여신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미 그녀는 마음속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맞히는 건 절대 불가능하리란 것을.
그건 단순히 소년에게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들은 각자 자신이 관장하는 영역에 따른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
그녀가 거짓의 여신으로서 가진 특징은 바로 진명 은폐.
말 그대로 진짜 이름을 숨기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신들에게마저.
그녀의 이름은 자신이 인정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신들조차 그녀를 제각각 다른 가명으로 부른다.
그 가명들은 전부 다 훗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신화 속의 위대한 이름으로 기록되게 된다.
닉스 토트 로키 칼리 헤르메스 츠쿠요미 네프티스···.
그 외에도 수많은 이름을 가진 그녀지만 무엇 하나 진정한 이름은 아니었다.
거짓의 여신인 그녀의 진명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동생인 이터나뿐.
다른 동격의 신들조차 알지 못하는 진명을 한낱 인간 소년이 알아맞힐 방법은 전무했다.
그야말로 0%의 가능성.
진명을 알아맞힌다는 것은 거짓의 여신이 지닌 신성을 근본부터 파괴하는 것.
즉 세계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단 가능성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방법이다.
소년은 당혹감에 물든 얼굴로 여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한참이 흘러도 굳게 닫힌 입은 열릴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굳이 여신이 아니라 인간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름을 맞힌다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유일한 방법은 가장 흔한 이름을 적당히 던지고 운 좋게 맞히길 기도하는 것뿐.
물론 여신의 진명이 그렇게 흔한 인간 여자의 이름과 같을 리 없다.
애초부터 절대 불가능한 시험. 그렇기에 더더욱 소년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 가장 적합한 문제였다.
뒤에서 소년을 바라보는 이터나의 눈빛에도 기대감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단지 조금이라도 빨리 소년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덜 아프길 바라는 안타까움만이 가득 묻어나왔다.
하지만 소년은 쉽사리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눈을 질끈 감은 채 깊이 고민했다.
무엇을 고뇌하는지 본인 스스로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따라 온갖 어지러운 생각들이 사라졌다가 새로이 나타나길 반복했다.
여신은 그 집념에 감탄하면서도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천 년 동안 고민한다 해도 단 한 번 만에 정답을 맞히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답할 기회를 무한하게 주어도 소년은 끝내 정답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그야 여신의 진명은 거짓의 신성으로 보호받고 있으니. 다른 신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해 가명으로 부를 정도이다. 한낱 소년이 맞힐 수 있을 리가 없다.
“포기하렴. 아무리 고민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란다.”
부드러운 만류에도 소년은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에 여신은 이 무의미한 시험을 끝내기 위해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음?”
그러다 일순 멈칫한 여신은 허공에서 정지한 손을 천천히 회수했다.
눈을 감고 서 있는 소년의 분위기가 어째선지 묘했다.
언뜻 보기엔 굳어버린 건가 싶을 만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자세를 유지하는 소년.
아주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자그마한 숨소리만이 소년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척이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굉장한 집중력이다.
저 정도면 이미 단순한 명상 따위가 아니다. 오랜 수행으로 경지에 다다른 성인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과 유사했다.
그런 인간은 극소수지만 가끔 신들조차 놀라게 할 만큼의 깊은 통찰력과 지혜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그러한 깨달음은 최소한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지식이 많다고 반드시 지혜로운 건 아니지만 지혜엔 사고력과 인지 능력 판단력과 같은 다양한 요소가 뒤따른다. 인생이란 경험과 세상을 본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식.
소년은 깨달음을 얻기엔 너무 어리고 미숙한 존재다.
겨우 10년 남짓에 불과한 삶의 경험. 시골 숲속 마을이란 너무나도 좁은 공간에 한정된 식견.
세기의 천재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재능이 있다 해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백지상태에서 첨예한 탑을 쌓아 올릴 수는 없다.
그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현실의 법칙을 무시하는 일이다.
‘···잠깐.’
그 순간 여신의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미 소년은 그녀가 원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저 소년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는가?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첨예한 탑을 쌓아 올린 재료는 무엇인가.
어쩌면 소년은 지금···.
자신의 진명을 알아맞혀 가고 있는 것인가?
여신은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지금 저 소년을 건드려 방해해버리면 후회하게 되고 마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터나 또한 어느 순간부터 호숫가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소년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멈춰있던 소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열리는 입.
곧 소년은 꿈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어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엘···. 디···.”
여신의 눈이 커지며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그 두 단어만을 읊조린 채 정신력이 다했는지 그대로 휘청이며 앞으로 기울어지는 소년.
힘없이 쓰러지던 소년을 부드럽게 안아 든 여신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기절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비록 자신의 진명을 전부 얘기하진 않았으나 그 두 단어만으로도 증명은 충분했다.
단순한 우연으로 찍어서 맞힌 것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소년은 정말로 신성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던 여신의 이름을 밝혀낸 것이다.
만약 소년이 지쳐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녀의 이름을 완벽하게 불렀을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여신의 정신을 이터나가 조심스레 일깨웠다.
“···언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소년과의 약속.
결과로만 따졌을 땐 절반뿐인 애매한 성공.
다만 소년은 이 약속의 본질적 의의 다시 말해 ‘가능성’을 완벽히 입증해냈다.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신이라고 해서 전지전능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운명의 수레바퀴에 그 누구보다 단단히 묶여있는 존재가 바로 신이었으니.
하지만 소년은 수레바퀴의 속박을 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어떤 신도 할 수 없는 정해진 운명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
그것이 꼭 좋은 능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신들의 눈에 걸린다면 질서를 무너뜨릴 위협 요소로 판단해 최우선으로 제거하려 들 테니까.
‘···이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신의 미움을 받을 운명이었구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기에 오히려 그 누구보다 확실한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으니.
원래라면 이 소년에겐 어떤 희망도 없었으리라.
제아무리 ‘가능성’이 있다 해봤자 결국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인간 아이.
가능성이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0%가 아니라는 것뿐 너무나도 희박한 확률은 사실 없는 것과 똑같이 취급해도 무방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년이 숲속에 찾아온 그녀들과 마주하게 되며 상황은 달라졌다.
“이터나. 지금 혹시 바뀐 미래가 있니?”
언니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서 시간선의 줄기들을 확인했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선에 따라 미래로 나아갈수록 무수히 뻗어있는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
딱 하나로 정해진 운명은 없지만 운명이란 거대한 큰 줄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자유의지와 세상을 지배하는 인과율의 법칙이 하나로 조화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그 가장 끝에 원래라면 있어서는 안 될 자그맣고 희미한 불청객이 생겨났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없다고 착각할 만큼 미세하고 하찮은 한낱 좁쌀보다도 조그마한 무언가.
하지만 그것은 분명 운명의 수레바퀴에 묶여있지 않고 홀로 고고하게 떠올라 있었다.
“···있어. 너무 작아서 자세히 읽을 수도 없고 그냥 있다는 것밖에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있어···.”
여신은 동생의 말을 듣고 한숨을 흘렸다.
그 한숨은 안도감과 막막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산물이었다.
이 연약한 소년을 믿고 그 조그마한 가능성만을 의지한 채 나아가기엔 너무나도 힘겹고 고된 가시밭길일 것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 숲속에서 찰나에 불과했던 기억을 잊고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신은 ‘가능성’을 못 본 채 지나칠 수 없었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려 했던 소년을 이대로 놔두고 갈 수 없었다.
‘당신이 그 누구라도 저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게요.’
멍청한 선택이라고 비웃어도 할 말 없다.
하지만 밤과 거짓의 여신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일단 오두막으로 돌아가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게 와서 죄송합니당..ㅠ
한번만 봐주시겠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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