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5
소년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이미 땅거미가 깔려 어둑해진 이후였다.
잠시 멍하니 오두막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혹시나 잠든 사이에 그녀들이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두 여신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소년이 일어날 때까지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년은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밤이 되자마자 떠나야 했던 거 아니었나요···?”
“원래라면 그랬겠지.”
덤덤하게 대답한 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내 이름이 뭔지 알겠니?”
“이름···. 분명···.”
소년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에 손을 얹히자 여신은 즉각 팔을 뻗어 제지하였다.
“더 생각하지 말렴. 또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곤란하단다. 아직 너에겐 내 이름을 완전히 알아맞힐 만큼의 불확정성은 없어 보이니까.”
“···불확정성?”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가 등장하자 소년은 멍하니 되뇌었다.
“임시로 붙인 이름이란다. 네가 증명해낸 ‘가능성’은 확정된 운명을 거스르는 힘. 그 능력은 말 그대로 세상을 불확정된 확률과 가능성으로 뻗어나가게 만들 수 있으니까.”
“저한테 그런 힘이 있다고요? 왜죠?”
그 물음에 이터나가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희도 고민해봤으나 명확한 답은 알아낼 수 없었어요. 당신의 과거를 살펴봐도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추측할 수 있는 건 네가 그 힘을 타고났다는 것뿐. 어쩌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일부러 안치해둔 대비책일지도 모르지.”
소년은 여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능력은 정해진 운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 요소인데 왜 운명이 그런 불확정성을 일부러 만들어둔단 말인가?
“쉽게 말하자면 초기화 장치인 거예요. 만약 운명이란 시스템 자체가 오염되어 파멸로 향하게 된다면 운명에 종속된 존재는 그 파멸을 절대 막을 수 없어요. 그러니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모든 것을 백지로 되돌릴 초기화 장치를 세상 한구석에 숨겨놓은 거죠.”
이터나의 설명을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파멸이나 초기화나···. 제가 듣기엔 비슷하게 들리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파멸은 단순한 세계 멸망 따위가 아니란다. 인간은 물론 신까지 포함해 모든 관념적 존재가 사라지는 완전한 무의 상태가 되어 영원히 멈춰버리는 종말. 수레바퀴마저 움직이지 않는 공간.”
그런 파멸이 닥칠 수도 있다는 건가?
인간으로서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큰 스케일이었기에 소년은 오싹하면서도 막연한 공포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하지는 않아요.”
“지금 중요한 건 불확정성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거냐는 점이니 말이야.”
여신은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라는 듯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앞으로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와 함께할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싶니?”
대답이야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네. 절대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울 거예요.”
“···좋아. 그럼 지금부터 설명해줄게. 운명을 뒤틀 방법을.”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일단 가장 시급한 건 네 불확정성의 능력을 키우는 거란다. 지금의 미약한 가능성만으론 운명을 거스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너를 뒤바꿔야 해. 지금의 순수한 시골 소년에 불과한 너로선 거대한 운명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단다. 네가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증명할 수 있던 건 곁에 우리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야.”
그 뒤에 여신님은 소년의 어깨를 붙든 채 말했다.
“넌 지금부터 신이 존재하지 않는 운명 따윈 케케묵고 낡아빠진 옛 생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이곳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보편화된 차원을 경험하게 될 거란다.”
“···그런 세상도 있는 건가요?”
“있단다. 하지만 네가 경험할 세상은 어디까지나 진짜를 본떠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무대에 불과해. 물론 그 안에서 살아갈 너는 이곳에서의 기억을 전부 잃은 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될 테니 그런 사실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전혀 다른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
얘기만 듣고 유추해보려 해도 이곳과 얼마나 다른 건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그러고 나면요?”
“그 세계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여 불확정성의 힘을 충분히 키우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기억을 되찾으면 된단다. 그럼 나머지는 우리가 전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정말 그거면 끝인가요? 그냥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오면 되는 거예요?”
이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네. 그걸로 충분해요.”
소년은 직감적으로 그녀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얘기해주지 않겠지. 게다가 그녀들은 자신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 신성한 여신들이다. 그녀들을 믿고 맡긴다면 전부 해결해줄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 언제 다른 차원으로 가는 건가요?”
“바로 지금부터란다. 침대에 누워 다시 잠들기만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렴.”
그녀의 말과 동시에 갑자기 수마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껏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채 소년은 곧바로 잠들기를 거부했다.
어느샌가 침대에 누워 두 여신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힘겹게 얘기했다.
“잠깐···. 아직 둘의 이름을···.”
참 집요하구나. 여신이 작게 중얼거리자 이터나 또한 동의한다는 듯 키득거렸다.
이윽고 소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시간의 여신이 먼저 말했다.
“이터나예요.”
그리고 이어서 여신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엘디···.”
끝내 여신의 이름을 전부 듣지 못한 채.
소년은 다시 한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오두막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들리는 소리라곤 잠든 소년의 규칙적인 숨소리뿐.
그를 애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두 자매 여신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긴 시간을 보냈다.
이제부터 소년은 긴 잠에 빠져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사실 그녀들은 소년에게 모든 것을 전부 얘기해주지 않았다.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되긴 하겠지만 그 순간은 지금보다 아득히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제아무리 거짓의 여신이라 하더라도 다른 차원을 완벽히 위조한 가짜 무대를 만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시간의 여신인 동생이 없었다면 억겁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현재 그녀들이 신성을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는 처지란 점이었다.
땅에서 신성을 쓴다면 그 즉시 신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로 올라가자니 소년을 만나러 다시 땅에 내려올 수 없어진다. 소년을 하늘로 데려가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고민 끝에 그녀들이 내린 해결책은 이러했다.
한 명은 하늘로. 한 명은 땅에.
시간의 여신은 땅에 남아 소년을 지키고 보호한다. 그리고 거짓의 여신은 하늘로 올라가 신들에게 변명을 둘러댄 후 가짜 차원을 만들어낸다.
차원이 전부 만들어지면 여신은 동생을 직접 데려오겠다는 핑계로 다시 땅에 내려온다.
그리고 소년의 불확정성을 키워내 운명을 무너트린다.
어찌 보면 이건 신계를 향한 반란과도 다름없었다.
고작 한 명의 소년 때문에. 가장 위대한 두 여신이 일으킨 터무니없는 반란.
물론 운명을 비튼다고 해서 세계를 멸망시킨다거나 다른 신들을 굴복시키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단지 소년과 함께할 수 있는 미래.
이를테면 소년에게 신성을 부여해준다는 식의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쉽진 않겠지만 불확정성의 힘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두 여신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서로 마주 보았다.
“한동안 작별이겠구나.”
“그러게.”
어차피 영원을 살아가는 신에게 몇천 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둘은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 없을 만큼 우애 좋은 자매였다.
분명 그리울 것이다.
혼자 땅에 남아 소년을 지켜야 할 동생도.
하늘로 올라가 차원을 만드는 데만 몰두해야 할 언니도.
그렇지만 둘은 웃으면서 이별을 고했다.
다시 만나게 되리란 확신이 있었기에. 그 재회의 순간엔 희망이 넘쳐나리라고 믿었기에.
이미 그녀들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스르기 시작했다.
이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는 시간의 여신조차 읽을 수 없었다.
다만 믿을 뿐이었다.
소년에게서 보았던 가능성을.
그렇게 여명이 떠오르기 전 숲속을 벗어나 들판으로 향한 이터나는 언니를 배웅해주었다.
홀로 오두막에 돌아온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든 소년을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소년이 깨어나길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천년이 흘렀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언니가 땅에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 나가 맞이해준 이터나는 다가오는 여신을 가까이 다가오자 멈칫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무슨 일인 걸까용!?!
전혀 모르겠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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