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6
“···언니?”
이터나는 당황했다.
실로 오랜만에 천년 만에 재회한 언니의 찌푸린 표정 속엔 도저히 반가움이라곤 표현할 수 없는 어두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굳이 따지자면···. 괴로움에 훨씬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언니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전부 착각이라고 잘못 본 것뿐이라고 얘기하듯이.
“오랜만이야. 이터나.”
밤의 여신은 나지막이 인사를 건네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드럽게 품으로 끌어안았다.
따스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오자 처음엔 의아함을 느끼던 이터나도 지금만큼은 감동의 순간에 몸을 맡겼다.
무려 천 년간 줄곧 혼자 숲속에만 숨어 지낸 것이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잠든 소년을 지키면서 계속.
물론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시간의 여신인 그녀에겐 얼마나 오랜 시간이든 찰나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들여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귀여운 숲속 동물들.
오히려 하늘에서 지냈던 시간이 따분하게 느껴질 만큼 하루하루가 따스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단지 유일한 문제라고 한다면 깊은 잠에 빠져들어 아무리 기다려도 깨지 않는 소년을 보살피는 것뿐. 단 하루에 불과했던 추억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상념에 허덕이는 건 시간의 여신조차 가볍게 넘기기 힘든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도 오늘로써 끝이었다.
소년이 잠에서 깨어나려면 아직 조금 더 기다릴 필요는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언니도 함께 있을 테니 이전보다 훨씬 쏜살같이 지나가리라.
“언니! 꿈의 차원은 전부 만든 거지?”
“···아. 응.”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대답을 내놓는 여신.
이터나는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랜만에 나누는 언니와의 수다에 흠뻑 빠졌다.
“땅에는 어떤 핑계를 대고 내려왔어? 역시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나를 데리고 오겠다고?”
“···뭐 비슷한 느낌으로.”
“그럼···. 언제쯤 일어날 것 같아?”
마침내 동생의 입에서 소년에 관한 주제가 튀어나오자 살짝 멈칫한 여신은 살짝 가라앉은 어조로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
그 무성의한 대답에 이터나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으나 애써 고개를 휘저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낸 후 언니를 이끌고 숲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괜찮다. 기다림에는 충분히 익숙해졌으니까.
언니와 함께한다면 지금까지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웃으면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언니와의 재회가 망가지지 않도록 이터나는 애써 밝은 톤으로 수다를 떨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뒤따르는 여신이 계속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하니 분위기가 가벼워질 리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공기를 헤치며 마침내 오두막까지 도달한 두 자매.
앞서 걷던 이터나는 문 앞에서 빙글 돌아 언니를 마주 보며 환하게 얘기했다.
“아 참! 깜빡했는데 소개해줄 아이가 있어!”
“···소개?”
그제야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언니의 모습에 동생은 기쁨을 느끼며 문을 천천히 열었다.
오두막 안에는 침대에 누워 잠든 소년뿐 아니라 또 한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터나와 놀라울 만큼 쏙 빼닮은 아이였다.
조그마한 체구와 귀여운 얼굴. 저 모습에서 그대로 성장하면 이터나가 될 것만 같았다.
물론 그녀는 여신이기에 어린 시절 따위 없었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성인의 모습으로 탄생했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무엇일까?
단순히 겉모습뿐 아니라 속내에 느껴지는 기운조차 이터나를 닮아있었다. 희미하게나마 신성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터나의 딸이라고 해도 무방한 느낌.
“이름은 하양이야. 나를 이 오두막으로 처음 데려와 줬던 고마운 아이야.”
“···권속으로 삼으려고 신성을 나눠준 거니? 땅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다른 신한테 들키고 말아.”
물론 이터나도 그런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함부로 신성을 썼다가 다른 신한테 위치를 발각당하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아니야. 나는 그냥 이 아이랑 쭉 함께 있었을 뿐. 천년 동안 내 옆에 있으면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던 신성을 자기가 직접 흡수한 것 같아.”
평범한 여우가 신성을 흡수해 격을 상승시킨다는 것 따위 불가능하다.
애당초 천년이나 멀쩡히 살아있는 것도 당연히 허무맹랑한 일이다.
즉 이터나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저 하얀 여우는 태생부터 평범한 동물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영물인 거구나.”
“분명 그럴 거야.”
영물이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성을 천 년간이나 흡수했다.
당연히 그 자체로 일반적인 격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 신의 권속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터나는 하양이를 애정 서린 눈길로 바라보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훨씬 쓸쓸했을 거야···. 언니는 어땠어? 많이 힘들었지?”
천년 만에 재회한 언니는 확실히 이전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자신이 이 숲속에서 하양이와 함께 조용하고 쓸쓸하게 기다렸다면 그녀는 하늘에서 다른 신들의 추궁과 눈초리에 시달리며 꿈의 차원을 구현하는 데만 몰두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훨씬 더 고독하고 힘겨운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언니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그 고통마저 끝이 보이고 있으니.
앞으로 조금만 더.
“언니. 얼른 꿈을 꾸게 해주자.”
“···그렇네.”
여신은 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내었다.
새까만 흑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구슬이었다. 이터나는 저 조그마한 구슬 안에 놀랍도록 정교하게 꾸며진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간 여신은 잠든 소녀의 입을 작게 벌려 구슬을 삼키게 했다.
드디어. 이터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쁘게 숨을 내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침착해야 한다.
이제 막 꿈에 빠져들었을 뿐 계획대로 소년이 잠에서 깨어나 불확정성을 완전히 각성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물론 그것도 지난 천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소년이 꿈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굳건하게 확립할 정도의 시간 기껏해야 20년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남은 20년은 언니와 하양이와 함께 셋이서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터나와 달리 여신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상태였다.
“언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싶어 조심스레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어?”
그때 갑자기 이터나의 주변에 검은빛의 새장이 생겨나 그녀를 가두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생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신은 이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여신의 앞에 검은 문이 생겨나고 소년이 침대에서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늦게 현 사태가 언니의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실제임을 깨달은 이터나는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창살을 마구 흔들었다.
혹시라도 무의식중에 신성을 사용해버려 다른 신에게 발각당할까 힘을 봉인해두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 당장으로썬 사실상 평범한 인간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상태였기에 이제 막 땅에 강림한 밤의 여신을 상대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 일련의 전개 자체를 납득하지 못한 이터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침착하게 대응하기엔 가장 믿고 신뢰하던 언니의 배신이 가져다주는 충격이 너무 컸다.
어째서···?
그런 무의미한 물음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지만 애석하게도 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평생을 고민해도 알아낼 수 없으리라. 아니 알아내면 죽을 만큼 고통스럽기에 억지로 진실을 외면하는 걸지도.
여신은 소년을 챙긴 채 어딘가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여동생인 자신을 이 새장 안에 가둬둔 채.
그녀는 거리낌 없이 신성을 마음껏 사용했다. 그러니 하늘의 신들도 땅에서의 이변을 눈치채고 이 깊은 숲속에 관심을 기울이겠지.
그렇게 된다면 천 년간 땅에서 숨어지냈던 자신의 존재도 들키고 만다.
언니는 그걸 알면서도 신성을 사용했다.
···아니. 그걸 알기에 일부러 신성을 사용한 거다.
자신을 확실히 떼어놓기 위해. 신들에게 들켜 끌려간 다음 두 번 다시 땅에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왜···. 왜···!?”
이미 머릿속에는 정답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여신은 차마 그 답을 인정할 수 없어 끝까지 부정했다.
여신은 대답은커녕 이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나려 했다.
그 차가운 발걸음을 하양이가 가로막았다.
“비키렴.”
지독할 만큼 매정한 명령.
신의 목소리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지만 하양이는 그런 특별한 존재 중 하나였다.
“비키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구나.”
“안 돼!!!”
이터나가 절규하며 언니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여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하양이는 순식간에 원래의 조그마한 여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 상태로 칠흑의 쇠사슬이 입마개가 되고 전신마저 단단히 포박해버린다.
검은 문에서부터 뻗어 나온 쇠사슬이 질질 여우를 천천히 끌어 집어삼키려는 듯 잡아당겼다.
이터나는 눈물을 흘리며 악을 지르고 창살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뿐 새장은 조금도 끄떡하지 않은 채 두 공간은 분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언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척하려 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이터나는 최후의 희망을 담아 잔뜩 쉰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대체 왜···.”
여신은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동자로 대답했다.
“이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 말만을 남긴 채 그녀는 사라졌다.
오두막에는 모든 것을 잃은 여신 한 명만이 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의 신들이 계율을 어긴 그녀를 벌하기 위해 강림하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배신인 거에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