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7
순백의 여인.
시간의 여신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위에 세워진 하늘 신전에선 위를 올려다봐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푸른 하늘. 그리고 밝게 빛나는 태양뿐.
땅에서 천년 간 보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
그렇다. 이곳에선 365일 내내 몇천 년이 지나도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화하게 타오른다.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함박눈이 내리는 변화무쌍한 날씨 따위 존재하지 않는 따분한 세상.
아마도 자신은 두 번 다시 땅으로 내려갈 수 없으리라.
“지금부터 피고 이터나의 처분에 관한 재판을 시작하겠다.”
하늘 신전에서 재판이 열렸다.
신들은 수갑으로 묶인 이터나의 주위를 둘러싼 채 적대적인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아직도 꿈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분명 천년 동안 늘 그래왔던 대로 숲속을 느긋이 산책하다 오두막에 돌아가 소년을 지켜봐야 할 텐데.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소년 권속 그리고 언니까지. 가장 소중한 세 가지를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그녀의 죄는 심대하고 악질적이나 그녀가 관장하는 시간이란 영역은 누구도 대체하기 힘들 만큼 막중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주위의 신들이 자신의 처우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었으나 그녀에겐 어느 말도 귓가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오로지 배신의 순간만이 끊임없이 되새겨 재생될 뿐이었다.
언니가 자신을 배신했다.
몇 번이나 곱씹어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한마디. 그러나 돌이키면 돌이킬수록 어떠한 이변의 여지도 없는 확고한 진실.
대체 어째서? 같은 질문은 지금 와선 별다른 의미도 갖지 못했다.
어떤 의도가 담겨 있든 간에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
“또한 그녀가 땅에 내려간 최초의 계기가 자매인 거짓의 여신 때문임을 고려해야 한다. 거짓의 여신은 땅에 수시로 내려갈 명분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동생을 일부러 땅에 남겨두었다. 이는 사실인가?”
신들이 무언가를 물어왔으나 그녀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따분하고 지루한 하늘의 풍경. 낮과 밤만이 되풀이되는 공간 위에서 앞으로 영원히 갇혀 지내야 한다.
“판결을 내린다. 피고 이터나는 하늘 신전에서도 가장 깊은 순백의 신전에서 무기한 근신한다.”
순백의 신전은 말 그대로 새하얀 대리석만으로 지어진 신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간계를 관측할 수단도 없다. 다른 신들도 발을 들이지 않는다.
오로지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내야 하는 공간.
그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뿐일까.
365일 1년 내내 천년이 지나도 푸르기만 할 뿐인 따분한 하늘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전부.
이터나는 그렇게 순백의 신전에 가두어졌다.
“···아.”
그녀가 시간의 여신이 아니었다면 이곳에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리라.
처음에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멍하니 느끼고만 있었다.
어차피 그녀에겐 아무리 긴 시간이어도 찰나와 다름없다. 하지만 이 순백의 신전에선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건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과 같았다. 어느샌가 이터나는 이곳에 자신이 얼마나 오래 갇혀있었는지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앞으로 평생.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테니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사라지면 시간의 흐름이 망가지기 때문일 뿐.
다른 신들은 딱히 이터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물리적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기다림이란 형벌이었으니까. 시간의 여신에겐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이터나가 땅에 내려가 소년을 만나고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하루하루 기다리며 기다림이란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녔는지 깨닫지 못했더라면.
순백의 신전에 갇혀 무기한 근신이란 형벌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종일 눈을 감은 채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순백의 신전이란 공간에 한정되어버린 무의미한 현재와 미래를 외면하고 찬란하며 행복했던 과거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소년과의 만남을 셀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되새겼다.
소년을 기다리던 천년의 세월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소년을 만나게 된 계기. 처음 땅에 내려가던 설렘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달았다.
신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무형의 시선.
시간선 너머에서 지켜보던 그 기묘한 관찰자를 떠올린 이터나는 아주 오랜만에 눈을 뜨고 현재로 되돌아왔다.
새하얀 대리석만으로 둘러싸인 순백의 신전에서 그녀는 몇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만에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었다.
“혹시 지금도 저를 지켜보고 계시나요?”
잠시 후. 바로 앞에서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심하게도 그녀는 반가움을 느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과거에만 빠져 살던 오랜 세월 끝에서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누군가.
비록 그 정체도 모르는 수상쩍은 존재였으나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혹시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켜보고 계셨던 건가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 시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질문에 답한 적이 없었다.
“소통할 수 없는 걸까요···?”
짙은 아쉬움이 감돌았다. 아주 짧고 간단한 대화라도 좋으니 소통을 나누고 싶었다.
혼자 허공에 대고 주절주절 떠드는 건 상대가 없어도 언제든 할 수 있는 거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려냈다.
자신이 상대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는 이상 아주 제한적으로나마 소통을 나눌 방법이 있었다.
“제가 질문할 테니까 대답이 ‘네’면 그대로 있고 ‘아니요’라면 사라졌다가 나타나 주세요. 한번 시험 삼아 ‘아니요’를 해주시겠어요?”
그러자 시선은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생각했던 대로 소통이 가능할 듯해 그녀는 기뻐하며 무엇을 물어볼지 고민하였다.
“당신은 누구죠? 신인가요?”
깜빡. 사라졌다 나타난 존재감으로 그 시선의 정체가 신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럼···. 저랑 아는 사이인가요?”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즉 상대는 그녀도 알고 있는 누군가였다.
누구인지를 물어보고 싶지만 ‘네’ ‘아니요’의 양자택일밖에 할 수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신은 먼 미래에서 시간선 너머로 저를 지켜보고 있는 거죠?”
이번에도 정답은 ‘네’였다.
애초에 이건 그녀도 쉬이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었기에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이어갔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저를 쭉 지켜보셨다면 제가 숲속에서 만났던 소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시선에 안도하며 이터나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아이는 미래에···. 어떻게 됐나요?”
시간의 여신인 그녀이지만 불확정성으로 둘러싸인 소년의 미래만큼은 완벽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미래를 읽든 불확정성으로 인해 뒤틀려버리기에 의미가 없다.
하지만 눈앞의 시선은 미래에서 직접 건너온 존재.
그에게 있어 미래는 과거와 같다. 변화무쌍한 미래와 달리 한번 정해진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 알 수 없는 자는 소년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알 수 있다.
“아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겠군요. 그럼 질문을 바꿔서···. 아직 살아있나요?”
대답은 ‘네’.
사실 딱히 믿을 근거도 없는 답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이터나는 눈물을 흘리며 안도했다.
하지만 그 답은 마냥 안심하기엔 꺼림칙한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그녀가 순백의 신전에 갇힌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소년이 아직 깨어있다는 건 평범한 인간의 수명으로 따졌을 때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소년은 평범히 삶을 누리다 늙어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떠올려볼 만한 가능성은 두 가지뿐.
자신들의 최초에 세운 계획이 실현되어 신에 가까운 존재로 거듭나 수명의 한계를 벗어던졌거나 아직도 끝나지 않는 긴 꿈에 빠져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거나.
이터나는 자신을 배신한 언니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는 복수심이 질척거렸으나 그보다 더 진하게 언니가 소년을 무사히 각성시켰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그 아이는 지금 잠에서 깨어났나요?”
깜빡.
대답은 ‘아니요’였다.
단박에 이터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배신하면서까지 소년을 독차지했다면 왜 진작 잠을 깨우지 않은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니의 배신에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언니는 그 아이 곁을 지키고 있나요?”
이번에도 깜빡.
시선은 사라졌다 나타나며 그녀의 질문에 부정하였다.
···설마. 언니는 이대로 소년을 영원히 잠든 채로 놔두려는 건가?
그래선 안 된다. 만약 신들에게 소년의 존재를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이터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순백의 신전을 탈출할 방법이 있을 리가···.
잠시 멈칫한 그녀는 이윽고 시선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나요?”
시선은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덤덤히 응시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깜빡깜빡하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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