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8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긴 했지만 막상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기에 이터나는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순백의 신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늘 신전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해있어 어떤 식으로 탈출하려 해도 다른 신들에게 들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성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
이런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신도 아닌 정체 모를 존재가 알고 있다니.
혹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상대가 굳이 자신을 속일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고작. 이런 자신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일단 순백의 신전에서 빠져나간 다음이어야 한다.
즉 누군지도 모를 상대가 그녀와 어울려주는 것만으로도 믿어보기엔 충분한 근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봐야만 한다.
하지만 상대와의 소통은 오로지 ‘네’ ‘아니요’의 양자택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스무고개를 하듯이 하나하나 범위를 좁혀가면서 추측해야 하나?
물론 그녀에겐 딱히 상관없을 정도로 시간이 썩어 넘쳐나니 그런 방법도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었다.
불멸의 삶을 살아가며 시간의 흐름조차 무의미하게 여기는 그녀와 달리 허공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은 신이 아니었다.
굉장히 오래전부터 자신을 관찰해온 것 같아도 막상 시선을 느낀 건 처음과 지금뿐.
상대는 계속해서 쭉 지켜봐 온 것이 아니라 시간선을 건너뛰며 별개의 장면들을 끊어서 관찰하는 것이다.
‘네’ ‘아니요’로만 진행되는 스무고개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어쩌면 원하는 답을 얻기까지 수천 년 동안 지루한 문답을 나눠야 할 수도 있다.
자신은 감당할 수 있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으리라.
게다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면 잠들어있는 소년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는 소년의 안위를 알 방법이 없었기에 애써 잊으려 했었으나 시선으로부터 소년이 아직 살아있단 얘기를 들은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 지긋지긋한 신전을 탈출해 땅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니 한가롭게 스무고개 따위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어떻게 질문해야 최소한의 문답으로 탈출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상대가 떠먹여 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추리해야 한다.
신이 아닌 존재가 순백의 신전에서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나 상대방에겐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카드가 있었다.
바로 미래의 지식.
고작 가능성을 엿볼 뿐인 예언 따위와는 전혀 다르다.
정해진 사건 그에게 있어 미래는 확정된 과거에 불과하다.
심지어 시간의 여신조차 완벽히 읽을 수 없는 불확정성의 변수마저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상대가 자신에게 모르는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면 그건 불확정성으로 비틀려버린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일 것이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이터나는 차분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물었다.
“저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군요?”
시선은 정답이라고 얘기하듯이 그녀를 지그시 지켜보았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얽매인 존재는 불확정성이란 변수를 통제할 수 없다.
즉 자신이 볼 수 없는 미래란 건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따윈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과 같다.
결국 달라지는 건 없다.
그녀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에 갇힌 채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대체 언제쯤일지도 모르는 탈출의 순간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그래도 전과 달리 이터나의 표정은 훨씬 밝아져 있었다.
어렴풋한 희망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은 더없이 가벼워졌다.
괜찮다. 언제나 그랬듯 기다림은 찰나와 같을 테니.
어느샌가 시선이 사라져버렸을 때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언제 찾아올지 모를 미래를 기다렸다. 늘 똑같이 맑고 푸르기만 했던 하늘이었지만 언젠가는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나 똑같던 일상에 한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땅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이터나는 직감적으로 바로 지금이야말로 시선이 말했던 탈출의 순간이란 걸 깨달았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땅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조그마한 여우.
하양이였다.
“···세상에. 정말로 하양이니?”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바로 어제 헤어진 것 같으면서도 영겁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해 하양이가 아직 살아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야 처참한 꼴로 언니에게 끌려갔었으니까. 분명 해코지를 당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었다.
생각해보면 땅에서 자신을 먼저 부를 만한 존재는 하양이뿐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하늘에 있는 신을 부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가 직접 선택한 권속 초월자의 경지에 다다른 존재 정도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순백의 신전에 갇혀있는 자신이 땅을 내려다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반대로 땅에 있는 하양이가 그녀에게 속한 권속으로서 자신을 부르는 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양이는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을 부른 거지?
애초에 언니에게 끌려간 다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아는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치밀어오르는 반가움을 잠시 미뤄두고 우선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양아. 그 아이는 어떻게 됐니? 무사해?”
잠시 후 머릿속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님을 꺼낼 방법을 찾았어요.’
질문과 완전히 동떨어진 대답. 하양이가 일부러 자신의 물음을 회피했단 사실을 깨닫고 이터나는 숨이 점점 가빠오기 시작했다.
“···하양아. 그 아이는···?”
잠깐의 침묵 후 하양이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밤의 여신께서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순백의 신전에서 나오면 그때 알려주겠다고.’
“······.”
이터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둔 언니.
자신을 배신한 언니.
이번에는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어떤 감언이설로 자신을 속이고 또 배신하려는 걸까?
언니에게 어떤 계획이 있던 이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곳에 얼마나 오랜 시간 갇혀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터나가 참을 수 없는 건 언니가 자신을 배신한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든 간에 솔직하게 말해줬더라면 전부 이해했을 텐데.
어디에 갇히든 얼마나 오랜 시간이든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기다렸을 텐데.
이미 전부 늦었다. 더는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겠지.
그녀는 자신의 언니이기 이전에 거짓의 여신이었다.
하나뿐인 동생에게마저 진심을 털어놓지 못하고 거짓된 모습만 내비치는 한심하고 못난 언니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곳을 탈출해 소년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뒤엔 두 번 다시 언니와는 말도 섞지 않으리라.
이터나는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힌 다음 언니의 말을 따르고 있는 듯한 하양이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방법이 뭔지 말해.”
‘···어떤 인간 남자와 거래를 해야 해요.’
“인간 남자···?”
전혀 예상치 못한 탈출 수단에 그녀가 멍하니 되묻자 하양이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프랑켄이라는 자예요.’
***
모든 시작은 밤의 여신이 하늘로 올라가 꿈의 차원을 만들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다른 세계를 모방하고 일부분은 자신이 직접 창조하며 소년이 꿈꾸며 살아갈 세상을 빚어나갔다.
그렇게 천년이 지난 뒤에야 마침내 완성된 꿈의 차원.
마침내 다 만들었단 사실에 기뻐하며 여신은 마지막으로 꼼꼼하게 세계를 점검해나갔다.
그러다 발견하고 만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위험한 변수. 거짓된 세상 안에 진짜 현실에 대한 정보가 ‘소설’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한 인간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개되는 머나먼 미래의 역사.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일종의 예언서나 다름없었다.
이건 위험했다. 만약 소년이 저 소설을 읽게 된다면 가치관의 형성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불확정성을 키우기 위해선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지녀야 한다.
고작 소설 따위가 얼마나 큰 영향을 줄까 싶겠지만 저 소설을 통해 이곳이 가짜로 만들어진 세상이며 자신은 꿈을 꾸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획이 망가진다.
여신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소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어째서인지 소설은 세계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어 소설을 지우는 순간 차원조차 뒤틀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위조품의 한계였다. 아무리 완벽하게 꾸며졌다 해도 가짜. 진짜 세계의 정보가 꿈의 차원 안으로 새어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분명 완성품을 파기하고 천년이란 세월을 들여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도 마찬가지겠지.
어쩔 수 없이 이대로 변수를 놔둔 채 땅에 내려가야 할듯했다.
‘···잠깐. 변수라고?’
지워지지 않는 변수. 불확정성.
그것이 현실뿐만 아니라 꿈의 차원에서도 구현되었다.
그 말인즉슨 소설의 형태를 빌린 저 원작의 내용 속에 불확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소설의 등장인물 중 하나가 미래의 소년이라는 뜻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상상도 못한 정체인 거에용!!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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