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0
한 소녀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소녀.
한때는 여우였다가 여신의 사랑을 받아 초월자로 거듭난 시간의 관리자.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옆엔 검은 머리의 여인과 그 품에서 잠든 소년이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난 천 년간 소녀에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 이터나가 늘 얘기해주던 그녀의 언니와 특징이 일치했으니까.
뒤늦게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린 소녀는 눈가를 좁히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전투태세를 갖추자 밤의 여신은 슬쩍 시선을 돌려 소녀를 쳐다보더니 피식 힘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만두렴. 의미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니.”
“···왜 저를 납치하신 거죠?”
소녀가 차갑게 묻자 여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납치한 게 아니라 구해준 거란다. 그곳에 있었다면 넌 틀림없이 죽었을 테니까.”
이터나는 신이니 처분을 받는다고 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우는 아니었다. 아무리 신성을 흡수한 초월자 영물이자 신의 권속이라 해봤자 결국 한낱 필멸자에 불과하다. 다른 신들의 눈에 띄는 순간 절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런 거라면 이터나 님도 함께···!!”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거기선 그게 최선의 수였어.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내 동생은 신들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단다.”
“······.”
당연하게도 소녀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자신보다 훨씬 위대한 여신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만 봤을 땐 그녀의 배신으로 인해 모든 상황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여신 또한 일일이 모든 작전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작전에 대해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변수 즉 불확정성은 줄어들고 정해진 미래는 견고해진다.
아무리 변수를 키우려고 발버둥 쳐봤자 불확정성의 힘이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얽매인 존재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오히려 벗어나려 할수록 더더욱 강하게 옭아매어 조일 뿐이다.
즉 소년을 믿고 그가 짜놓은 판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것만이 최선의 수인 것이다.
“딱 하나만 얘기할게. 내 행동은 전부 동생을 위해서이기도 해.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 말을 믿게 증명해주세요.”
“좋아. 그럼 네 동생이 제일 소중히 여기던 이 아이를 네게 맡길게. 이거면 충분하니?”
여신은 잠든 소년을 그대로 들어 올려 소녀에게 옮겨주었다.
두 자매가 사랑하는 소년. 만약 밤의 여신이 동생을 배신할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이 소년밖에 없다. 소년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배신했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
그녀에게 그토록 중요한 소년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는 건 확실히 현재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명과도 같았다.
만약 여신에게 나쁜 꿍꿍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소년이 자신에게 있는 한 쉽사리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언젠가 이터나가 돌아올 때까지 소년을 지키면 된다.
소녀가 적의를 풀며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은 누그러졌으나 그와 별개로 둘 사이의 어색한 거리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둘은 사실상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줘야 할 이터나는 여신의 배신으로 현재 하늘에 끌려가고 말았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한들 시간의 여신을 따르던 소녀가 적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한 상황.
여신은 한숨을 내쉬며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눈앞의 여우 하양이 또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즉 그녀가 제대로 협력해주지 않으면 계획은 처음부터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작전을 순탄히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친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여신은 조금은 어설프게 먼저 말을 붙였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나 할까? 네 이름은 하양이 맞지?”
“···제 이름을 그쪽에서 먼저 얘기해버리면 자기소개가 아니지 않나요?”
“음. 하하. 그렇네.”
여신은 머쓱하게 웃으며 난처함을 느꼈다.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 않다. 그녀는 동생을 제외하면 누군가와 깊은 인연을 맺지 않는다. 소년의 경우는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 주었으니 딱히 친해지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고.
물론 거짓의 여신이니만큼 적당히 가면을 쓰고 가식적으로 상대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만. 동생이 아끼는 권속에게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여신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내 이름 말이니? 그냥 적당히 내키는 대로 불러도 된단다. 어차피 진명은 아무한테도 알려줄 수 없거든.”
그녀의 이름을 아는 존재는 동생밖에 없다.
···아. 굳이 따지면 이 소년도 반쯤은 알고 있다 봐야겠지.
그 둘을 제외하고선 진명을 알려줘봤자 거짓의 장막에 가로막혀 제대로 듣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여신은 여우가 적당히 부를 만한 가명을 몇 가지 나열해주었다.
“···그럼 바토리라고 부를게요.”
“좋아. 이걸로 통성명은 끝난 것 같네.”
여신 바토리는 태평하게 기지개를 켜며 너무나 가벼운 어조로 얘기했다.
“아마 나도 곧 신들한테 붙잡힐 거야.”
“네?”
“아무리 늦어도 1년 안팎이려나. 굳이 도망칠 생각도 없으니까 그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동생을 배신하면서까지 오두막을 빠져나왔으면서 신들한테 순순히 잡혀줄 거라고? 심지어 남은 시간이 1년밖에 없다니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소녀에게는 너무 짧게 느껴지는 단위였다.
“그것도 계획의 일부인가요?”
“그런 셈이란다. 사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말이야.”
이 계획을 구상한 자는 바토리가 아니었다.
즉 다른 누군가가 세운 계획을 단지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동생을 배신하고 이제는 자기가 붙잡히길 기다리고 있다. 단순히 실행력이 좋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라 계획의 구상자를 믿는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늘로 끌려가고 나면 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소년을 지켜야 할 거란다.”
“그런 건 이미 각오하고 있어요.”
천년 전부터 이터나와 함께 소년의 곁을 지켰다. 기다림의 총량이 얼마나 늘어나든 소녀는 엄숙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단순히 이터나가 해온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녀 역시 평범한 여우일 적부터 소년과 특별한 인연을 맺어나갔으니. 소녀에게 있어서도 소년은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언젠가 한 남자가 네게 찾아와 거래를 요청할 거야. 그의 이름은 프랑켄.”
“거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요?”
“글쎄. 별다른 말이 없었던 걸 생각하면 어차피 네가 어떻게 할지는 정해져 있는 걸지도.”
거래의 내용을 듣자마자 무조건 답을 고를 만큼 정해져 있다는 건가?
그 답이 수락일지 아니면 거절일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여신이 말해준 정보를 머리에 저장해두었다.
“다른 이야기는···?”
“당장 알아둬야 할 건 이걸로 끝인 것 같네.”
여신의 말이 끝나자 그 기점으로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처음보다는 조금 나아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거리감. 지금에 와선 적대적인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와 별개로 눈앞의 여신은 불편했다.
“하양이라고 했지. 처음 널 봤을 때는 동생이 네 모습을 빌리고 있었단다.”
“···저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숲을 돌아다니다 저랑 똑같이 생긴 여우를 발견했는데 냄새는 전혀 달랐었거든요.”
아까와는 별 의미 없는 시시한 잡담.
하지만 그런 가벼운 대화가 오히려 가파르게 둘 사이의 벽을 허물어나갔다.
그 뒤로도 이어진 시시콜콜한 수다는 대부분 공통분모인 이터나를 주제로 이어졌다.
귀여운 동생으로서의 이터나와 동경하고 모시는 여신으로서의 이터나는 분명 사뭇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명백한 차이점 가운데서 사소한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다 가끔은 자연스럽게 다른 흐름의 이야기로 빠지기도 했다.
소녀가 여우 시절 숲속에서 겪은 에피소드 거짓의 여신이 쌓아나간 화려한 무용담.
소년을 향한 그리움. 자연의 아름다움. 앞으로의 미래.
둘은 평범한 인간처럼 먹고 마실 필요도 없었으며 낮 동안에 세상을 돌아다니다간 태양신의 눈에 발각될 수도 있었기에 낮에는 항상 아늑한 동굴에 틀어박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밖으로 나와 주변을 구경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터나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한 달. 반년. 그리고 1년.
어느 날 여신이 예언한 대로 하늘의 신들이 그녀를 붙잡기 위해 내려왔다.
신성을 굳이 봉인해두지 않았던 그녀는 신들의 기척을 눈치채자마자 검은 문을 열어 하양이와 소년을 도망칠 수 있게 해주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처음 만났을 때의 불편한 거리감은 온데간데없이 소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여신 바토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피식 웃으면서 하양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꼭 만날 거란다. 반드시.”
그렇게 이터나에 이어 바토리마저 떠나고.
하양이는 오래된 시계탑 안에서 잠든 소년을 보살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여신이 예고하였던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켄이라고 소개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드디어 프랑켄 두둥등장인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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