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2
가장 오래된 기억의 장면은 시야를 가득 채운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툭 하고 머리 위에 얹어져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은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유독 선명히 남아있었다.
내 기억 속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자상하게 웃어주었다.
그때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엔 무언가가 가득 넘실거렸다. 당시엔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리움이었으리라 확신한다.
아빠는 나를 보면서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예전엔 그게 엄마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도 했었지만 내 출생의 비밀을 깨달은 시점에선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
우리 집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조용하고 평온한 편이었다. 특히 하나뿐인 가족인 아빠도 평상시엔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난 더더욱 혼자 있는 때가 많았다.
다른 아이였다면 심심하다고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고요함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가끔 아빠의 손님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손님들은 언제나 아빠를 박사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항상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아빠도 무언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핏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천둥 벼락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겁에 질려버린 나는 안방으로 도망쳐 아빠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던 비바람 탓에 덜덜 떨고 있자 아빠는 내가 잠들 수 있도록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주 오랜 옛날. 한 시골 마을의 소년이 숲속에 놀러 갔다가 신비로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였다.
그 동화 속에 여인은 설명만 들어도 감탄이 나올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와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그 무엇보다 완벽한 미소.
어린 시절의 나는 어느새 태풍을 무서워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머릿속에서 그 여인을 떠올리느라 넋을 놓고 말았다.
언젠가 나도 커서 그렇게 예쁜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아빠와 평생 함께 살고 싶다고 어린아이다운 공상에 빠졌던 것이 아직도 가끔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 돌이켜봐도 행복했던 추억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을 눈부신 과거의 조각.
그렇게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만 알았던 평화로운 생활은 단 한 순간에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수선스러운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빠가 밤중에 서재를 들락거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곧바로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었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처음에는 아주 조그마했던 소란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숨이 멎을 만큼 거대한 쿵쾅거림으로 변하였다.
누군가 문이 부서지라 거칠게 두드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어떤 남자의 성에 찬 고함이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프랑켄 박사!! 당장 나오시오!!”
프랑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이었다.
손님들은 언제나 아빠를 혼시아 박사라고 불렀다. 프랑켄이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단순히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다기엔 너무나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깊은 밤에 문을 거세게 두들기며 괴성에 가까운 외침을 내지르는 건 지금까지의 일상에서 전혀 겪어보지 않았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이윽고 콰직! 하는 굉음이 집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괴한을 막아주던 현관문이 뚫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시점에서 상대는 손님이 아니라 강도였다.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고작 창밖에서 천둥이 내려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침대 위에 멍청하게 누워있어선 안 된다는 것만큼은 재빨리 깨달았다.
마음 같아선 거실로 나가 안방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태풍이 올 때처럼 아빠의 품에 달려가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으로 쳐들어온 강도가 그런 훈훈한 결말을 용납해줄 리 없었다.
순진하게 거실로 나가는 순간 정말로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다 눈에 띈 옷장 속으로 숨어들었다. 혹여나 강도에게 들킬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쉬는 것조차 참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제발 아빠가 저 괴한을 쫓아내 주기를 동화 속 멋진 용사님처럼 악당을 해치워주길 바랐다.
“프랑켄 박사!! 프랑켄 박사!!”
절박함에 가까운 강도의 외침은 집 안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터무니없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잠에서 깨어나 평소와 같이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셀 수 없이 생각했다.
귀를 틀어막고 현실을 부정했다. 제발 이 악몽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부터 미칠 듯이 쿵쾅대는 심장 박동을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쩍 귀에서 손을 떼도 집안에는 침묵만이 이어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함에 안도하기도 잠시 섬광처럼 뇌리를 관통하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고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강도가 사라졌다면 아빠는 어떻게 된 거지?
희망적인 상상을 그렸다. 아빠가 멋지게 괴한을 물리치고 방으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아 주는 모습을 떠올렸다.
옷장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당장 문을 열고 거실로 달려가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고 속으로 외치면서도 내 몸은 두려움에 굴복해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질식할 만큼 소름 끼치는 적막만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결국 나는 동이 트고 아침 새가 지저귈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옷장 밖으로 나왔다.
이미 강도가 침입하고 소동이 끝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난 상태. 문을 열고 거실로 천천히 나왔을 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안방도 서재도 부엌도 화장실도 욕실도 창고도 마당까지도 샅샅이 돌아보았으나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와 강도는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은 거라곤 뜯겨나가 뒹굴고 있는 현관문과 거실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뿐이었다.
그날 나는 혼자가 되었다.
***
쿵쿵!!
“프랑켄 박사!! 당장 나오시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이 샤론이 말했던 바로 그날이란 사실을.
동시에 그녀가 정체 모를 괴한이라 설명했던 존재가 누구인지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는 내 기억 속에서 분명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니까.
손님의 정체를 깨닫고도 나는 곧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으리라.
서재의 집무용 책상에 앉은 채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지금까지 버텨왔으나 무리한 불확정성의 남용을 내 신체가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이다.
특히나 시간 도약과 인공 생명체 창조라는 금기를 깨부숴버린 행위가 결정적이었다.
샤론을 옆에서 돌봐주며 한동안 능력을 쓰지 않고 조용히 요양 생활을 전진해왔으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셈이었다.
물론 이조차도 창밖의 이야기를 통해 보았던 흐름과 똑같았다.
내가 이 이후에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도 전부 알면서도 이렇게 정해진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운명을 뒤트는 불확정성이라···.’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차원의 틈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재현시켜야 한다니. 이미 그 자체만으로 나는 어쩌면 미래의 나 자신이 스스로 세워둔 새로운 운명에 얽매인 게 아닐까?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점차 의식이 멀어져갔다.
그때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온 괴한이 애타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되리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끝이 다가오니 샤론에게 미안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아직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제대로 된 추억 하나쯤은 선물해줄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다음에 만날 때는 모두가 행복한 해피 엔딩을 맞을 테니까.
나는 그 생각을 끝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던 공간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침대에 누워있는 것 같지만 고개는커녕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도저히 나 자신이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기묘한 감각.
“···깨어났군요.”
누군가가 원망과 허탈함이 뒤섞인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바로 옆에서 건네는 말조차 머나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먹먹하게 다가왔다.
“당신은 지금 반송장이나 다름없어요. 제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거라고요.”
확실히 그 말대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따지면 제때 와준 덕분에 살았잖은가.
그녀는 나와 맺은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주었다.
단 한 번 생체 신호를 읽고 내 목숨이 위태로울 때 바로 달려와서 구해주는 것.
그리고 나를 구하러 올 때는 반드시 사내의 모습으로 위장해줄 것.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 기괴한 부탁을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계약의 대가로 내건 보상이 그만큼 유혹적이었던 거겠지.
나는 그 대가로 시간 조작 능력을 이용해 운명을 읽을 수 있는 예언의 구슬을 만든 다음 그녀에게 주었다.
예언의 마녀는 나로 인해 탄생했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란 그녀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내가 스스로 부여한 운명과도 같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들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고 계신가용??
떡국 많이많이 드시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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