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6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
이 기억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단편적인 조각.
줄리엣은 왜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했다.
다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생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치솟았다.
아까까지의 분노와 원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애틋한 감정만이 차올라 스스로 이 급격한 기복에 당황할 정도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분명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린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그 찰나의 순간 다른 사람에게 잠시 몸을 빼앗겼던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있는 줄리엣의 모습을 모방꾼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밤의 여신과 줄리엣은 엄연히 구분되는 별개의 인격이다.
하지만 그 존재의 근원이 여신의 조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십수 년 동안 줄리엣은 고아원에서 자라며 독자적인 가치관을 쌓아왔겠지만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여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 그 기억의 흔적을 떠올린다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이건 처음 그녀들을 만들었을 때부터 정해진 필연과도 같았다.
줄리엣뿐만이 아니다. 샤론 역시 언제가 되었든 결국 본모습인 이터나의 기억을 서서히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가 프랑켄과 함께한 유년 시절의 추억 때문에 늦춰졌을 뿐.
반면 줄리엣은 상대적으로 불운한 유년기를 보내며 현재 삶에 큰 미련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바람은 오직 하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는 부모님을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만나보는 것뿐.
따라서 소망을 이룬 순간 여신으로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모방꾼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장면조차도 차원의 틈 속에서 창밖을 통해 전부 지켜봤었으니까.
어쩌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미래의 줄리엣이 내게 괜찮다고 얘기해도 지금의 줄리엣이 받았을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섣불리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가 창밖으로 본 미래가 전부 뒤틀린다면? 위태롭게 겨우 완성된 미래가 내 잘못된 판단 하나로 산산이 부서진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정한 계획에 얽매이게 되었다.
모두의 미래를 짊어졌다는 부담감이 그를 겁쟁이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리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미래로 향하는 현재가 불행하다면 과연 그게 옳은 방법인가?
당장 눈앞에서 울고 있는 소녀조차 달래줄 수 없다면 그렇게 해서 거머쥔 미래가 정말로 올바른 결말인가?
줄리엣은 줄리엣이다. 아무리 여신의 일부를 계승했다 하더라도 15살밖에 안 된 유약한 소녀일 뿐이다.
그녀가 이겨낼 수 있다고 멋대로 믿으며 고아원에 보내버린 뒤 샤론만 애지중지 키웠다며 비난받아도 뭐라 반론할 수 없다. 실제로 그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과거를 돌리기엔 이미 그의 몸 상태는 한계에 직면했다. 더는 시간 조작 능력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다. 당장 매일 달맞이꽃을 달여 먹지 않으면 끔찍한 고통에 허덕이다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날 원망해도 좋아. 욕하고 뺨을 때리는 걸로 울분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돼.”
그의 목소리에선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인간으로선 감당하기 힘들 만큼 너무나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는 조금씩 지쳐갔다.
순수한 소년이 사랑했던 두 여신도 곁을 떠나고 혼자가 되어 완벽한 미래를 설계하며 고독하게 수천 년 넘게 보내왔다.
한 인간이 버티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 차원의 틈 안에서 영원을 경험했던 그조차 감당하기 힘든 세월이었다. 그야 현실은 차원의 틈과 달리 시간이 흐르기에.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늙고 죽는다. 그를 스쳐 지나간 짧은 인연들은 모두 흙이 되어 돌아간 지 오래다.
어느 순간부터 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점점 회색빛이 되어갔다.
색이 바래가며 어떤 일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정해진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가 되어버렸다.
수많은 이름을 거쳐왔다.
크로 모리스 뤼팽 도일 르블랑 프랑켄 모방꾼···.
그 외에도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가짜 이름을 만들어내며 거짓된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순수했던 소년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여신들과 재회할 때 과연 그녀들은 지금의 자신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주 오래도록 긴 잠에 빠져있는 느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던 괴도 레이븐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포기할 생각은 없다. 여신들은 지금도 자신이 무사히 계획을 완수하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소년은 그 과정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막연한 희망만을 바라보며 의무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가시밭길을 다 지나고 나면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러다 10년 전 샤론과 줄리엣이 태어났을 때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녀들이 여신의 분신이라서가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까마득한 과거의 자신과 함께했던 인연을 추억할 수 있었으니까.
동급생 친구이자 괴도의 라이벌이었던 탐정 샤론.
아무것도 모르던 바지사장을 뒷바라지해주던 유능한 비서 줄리엣.
실로 오랜만에 떠올린 옛 추억과 함께 흑백으로 점철된 세상의 빛깔이 조금이나마 다채로워졌다.
어린 샤론을 아버지로서 키우던 나날에는 악화해가던 몸 상태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샤론 덕분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행복한 시간을 누렸기에 더더욱 혼자 지낸 줄리엣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뒤에서 고아원을 풍족히 지원하고 오퍼레이터를 통해 도와줬다 하더라도 그 원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작 뺨을 때리고 욕먹는 정도로 끝내라고요?”
그러니 줄리엣의 말에도 모방꾼은 잠자코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왜 부모님이 저를 버리셨을지 무슨 사정이 있길래 얼굴 한번 비치지 않는 건지 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을 생각했는데!”
과거 크로라 불리던 시절 그는 줄리엣의 배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먼저 잘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든 핑곗거리가 있든 간에 미래를 바꿔서라도 줄리엣이 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미래의 제가 먼저 제안했다고요? 믿을 수 없어요. 그딴 변명···. 받아들일 수 없다고요.”
당연하다. 결국 창밖으로 본 미래의 줄리엣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재의 줄리엣과는 다른 존재다.
제아무리 미래의 그녀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지금 겪는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정말 미래의 제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니까요.”
“······.”
아무리 후회해도 지난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무릎 꿇고 땅을 쳐대도 시간은 뒤를 돌아봐 주지 않고 야속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시간을 따라잡는 수밖에 없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으니까.
그 순간 레이븐은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비로소 완전히 자유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확정성의 본질.
그래. 창밖으로 모든 이야기를 봤다 하더라도 자신이 반드시 그대로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그 이야기가 최선의 결말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운명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난 순간 모든 이야기는 자신이 직접 써 내려가야 한다.
설령 미래의 나 자신이라 해도 그 자유의지 앞에선 간섭할 수 없다.
미래는 미래일 뿐 현재가 아니다. 자신이 엿본 미래 따위 많고 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그는 자유로운 괴도였다.
정해진 운명? 최선의 계획? 완벽한 결말?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아.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백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모방꾼 아니 괴도 레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깜짝 놀라 움찔한 줄리엣을 향해 괴도가 선언했다.
“다시 시작하겠어.”
“···네?”
그는 어리벙벙한 줄리엣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가 가자니. 어디를요···?”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원작이 시작될 때까지 5년 정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 과거의 자신이 마주쳤던 대로 모방꾼으로서 이야기에 편승하며 최대한 신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여신들을 깨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그는 더 이상 귀찮게 계획 따위를 세워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 속박당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도 미래의 자신도 아닌.
지금 순간의 나 자신이 개척해나가는 운명.
이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괴도 레이븐은 이 자유의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해피 엔딩에 다다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게 설령 운명이라고 해도.
자신이 훔치지 못할 것은 없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정산금이 줄었다는 공지를 이제야 확인한 거에용..
뮹뮹은 쫄쫄 굶어버리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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