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7
줄리엣의 손을 이끌고 지하실을 빠져나오자 밝은 햇살이 우리를 환히 비춰주었다.
“자 잠깐만요. 다짜고짜 어딜 간다는 건데요!?”
“모든 걸 바로잡으러.”
이대로 5년만 더 버티면 원작이 시작된다. 원래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기만 한다면 여태까지의 고된 시련도 전부 보답받는 길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거머쥔 미래가 정말로 최선인 걸까? 미래를 위해서란 핑계를 대며 현재를 외면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결국 미래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 중요한 것은 올지도 모르는 내일이 아닌 당장 살아가는 오늘의 행복이다.
운명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는 것.
앞으로 5년만 더 버티면 되는데 왜 지금 와서 뒤늦게 난리냐고?
웃기는 소리다. 5년 후의 내가 살아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여신님을 포함한 모두가 운명의 수레바퀴는 절대 거스를 수 없다고 이 세상에서 불확정성의 가능성을 지닌 나만이 운명을 깨부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그 태도 자체가 운명을 더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스스로 세운 계획을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운명에 속박된 노예처럼 살아왔으니까.
“쿨럭···!!”
길을 걷다 휘청이며 격한 기침을 내뱉자 새까만 각혈이 터져 나왔다.
내 상태를 확인한 줄리엣이 깜짝 놀라며 나를 부축해주었다.
“무슨! 그런 몸 상태로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당장 돌아가요!!”
“아니. 이대로 저 지하실에 틀어박히는 거야말로 내게 있어선 진정한 죽음이나 다름없어.”
간신히 진정한 자유를 되찾았다. 운명에 속박당하지 않고 스스로 걸어 나가는 법을 터득했다.
다시 저 어두컴컴한 지하에 틀어박혀 햇빛을 피하면서 달맞이꽃을 질겅질겅 씹으면 원작 전까지 삶을 연명하는 거야 가능하겠지.
그렇게 살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중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걸 애써 외면하며 막연히 미래만을 꿈꾸는 비참한 인생은 사양이다.
내가 직접 나 자신을 구원하겠다. 모두가 지금 당장 완벽한 행복을 맞이하도록 쟁취하겠다.
운명을 강탈하겠다. 괴도 레이븐으로서.
잠시 자리에 서서 발작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줄리엣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아니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지 말고 어디 가는지 제대로 말해달라니까요!”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에···. 음 생각보다 근처네요···?”
그 말대로다. 목적지까지 가는 건 생각보다 쉽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밖으로 나가겠다고 처음 결심을 세울 때뿐.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목적지를 밟아가다 보면 어느샌가 궁극적인 종착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겨우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짧은 거리였는데도 왜 그동안 들르지 않았던 걸까 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문 앞에 서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 있던 집주인이 곧바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누구세요···?”
낯선 손님들의 방문에 경계심을 끌어올리던 소녀는 이윽고 내 옆에 있던 줄리엣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
그건 줄리엣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문도 모른 채 뒤따라왔다가 갑자기 마음의 준비도 못 하고 쌍둥이 동생과 재회하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녀들의 중간에 서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붕대를 휘감고 있는 괴상한 사내의 정체를 마침내 깨달은 건지 샤론은 점점 경악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빠?”
몇 번을 들어도 참 기묘한 호칭이었다.
대등한 라이벌 소중한 친구 연심을 품었던 이성···.
시간대에 따라 휙휙 바뀌던 우리의 관계는 현재 부녀지간이 되어버렸다. 물론 같은 핏줄을 공유하는 친가족은 아니지만 내 의지로 직접 탄생시켜 키우기까지 했으니 샤론을 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덤덤히 수긍하자 샤론은 이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떨군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와요. ···둘 다.”
묻고 싶은 게 태산 같겠지.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조차 가늠을 잡지 못하고 있으리라. 줄리엣 역시 비슷한 이유로 말을 아낀 채 조용히 내 뒤만 따랐다. 우리 사이엔 질식할 정도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웠던 집 안 거실에 앉은 뒤로도 한동안 시간이 흘러서야 마침내 침묵이 깨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샤론이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붕대는 왜 감고 계신 건데요? 그리고 옆에 그···. 그분은 누구고요?”
“전부 설명해줄게. 그러니 얘기가 끝날 때까지 일단 들어주렴. 질문은 나중에 해주면 좋겠구나.”
샤론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참을성에 감사해하며 나는 최대한 그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먼 옛날 호기심에 이끌려 땅으로 내려온 두 여신과 어느 시골 마을에 살던 어리숙한 소년의 만남을.
처음에는 뜬금없이 이게 뭔 옛날이야기인가 시큰둥하게 듣던 두 사람은 내용이 진행될수록 시시각각 반응이 급격하게 달라져 갔다.
두 여신의 결심으로부터 시작된 운명을 비틀기 위한 발버둥.
잠들었던 소년이 깨어난 뒤부터 그 의지를 이어받아 미래와 과거를 오가며 설계 해온 과정을.
당연하게도 두 소녀는 이야기를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 직접 설명해주는 나조차 뒤죽박죽 섞여버린 한순간의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믿으라고요···?”
“당신 죽을병에 걸리면서 정신까지 이상해진 거 아니야?”
샤론과 줄리엣의 반응에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진실을 한번에 다 털어놓는 게 아니라 조금씩 시간을 들여 이해시키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려 했던 내 기존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천천히 얘기해준다면 그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그때까지 이 소녀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내 계획에 희생당한 나날은 누가 보답해줄 것인가?
여태까지의 방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으면 그 즉시 바로 달라져야 한다.
그것만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잘못에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건 알아. 하지만 기억을 되찾는다면 너희도 전부 깨닫게 될 거야.”
“기억을 되찾는다니···. 설마 아빠가 말한 그 여신의 기억 말이에요?”
샤론의 말에 줄리엣이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이 뭐라 하든 저는 그 이름도 모르는 여신이 아니에요. 저는 줄리엣일 뿐 확실하지도 않은 전생의 삶 따위 알고 싶지도 않다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만에 하나 아빠가 말한 얘기가 전부 사실이라 해도···. 저는 그 여신님의 기억을 주입 당해 다른 누군가와 뒤섞이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원래의 샤론은 없어지고 말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주장은 반박할 여지도 없는 정론이었다.
물론 두 소녀의 근원은 여신들이 맞기에 엄밀히 따지면 기억을 잃었을 뿐인 여신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도 여신으로서의 기억을 되찾는다면 자신들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흑역사로 취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가정일 뿐 현재를 살아가는 샤론과 줄리엣은 자신들이 여신과 다른 존재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미 지난 과거나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미래보다 현재의 생각을 더 우선시해주는 것이 옳다.
애초에 나는 그녀들이 먼저 부탁하지 않는 한 여신일 때의 기억을 되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눈앞의 소녀들과 내 기억 속의 여신들은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그녀들에게 되찾아주겠다고 한 기억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선에서 미래에 나와 친구가 됐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주려고 해.”
“아빠랑 친구가 된다고요···?”
“엄밀히 따지면 나라고 보긴 힘들지. 그 시절의 나는 프랑켄이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
샤론은 나와 친구가 된다는 말에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반면 줄리엣은 아까 보단 덜해도 여전히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정곡을 찔러왔다.
“결국 똑같은 말 아니에요? 과거냐 미래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 기억을 읽는 순간 저 자신한테 영향이 갈 수밖에 없잖아요.”
“맞는 말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내 얘기를 이해하기 쉬운 길을 제안하는 것뿐이야.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 내 얘기를 믿지 않는 것도 너희의 선택이자 자유. 그냥 원하는 길을 고르면 돼.”
두 소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의외로 간단하게 선택을 내렸다.
“받을게요. 아빠가 왜 저를 떠나셨는지 그 이유를 완벽히 이해하고 싶으니까요.”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얼마나 안타까운 사연이 있길래 제가 고아원에 버려져야 했는지 부디 납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렇다면 정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들의 근원인 코어 신성의 구슬에 걸려있던 봉인을 해제하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응애오브킹님 후원 넘무 감사드려용~~!!!
늦게와서 죄송해용..!
완결까지 최대한 열심히 달려볼게용!!
그리고 공모전도 도전 중이니 괜찮으시다면 보러 와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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