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8
샤론과 줄리엣은 처음엔 홍수처럼 밀려드는 낯선 기억에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곧 그 기억조차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잃어버린 중요한 무언가를 되찾은 듯한 개운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렇게 되찾은 기억의 양이 여태껏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아온 기억과 맞먹는 정도였기에 곧바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크로가 아빠라고?”
크로라는 친구를 기억해낸 샤론은 밝혀진 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태껏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매던 아빠가 줄곧 바로 옆에 있었다니.
물론 줄리엣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내비쳤다.
“아버지를 만난다는 게 이런 방법이었던 거야···?”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먼 미래 다른 세계선의 자신.
본래의 운명에서 줄리엣은 모방꾼이 들려준 얘기에 납득하지 못하고 그를 원망하게 된다. 지금처럼 기억을 전달받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엔 복수를 결심했었지만 이내 모방꾼이 금방이라도 죽을 만큼 위태로운 상황임을 알아차리자 오히려 그를 도와주기 시작한다. 온전한 복수를 위해서라며 애써 합리화해도 분명히 모순되는 행동에 속으로 혼란을 느끼면서.
그렇게 아버지를 향한 줄리엣의 감정은 딱 잘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질척한 애증으로 물들어갔다.
마침내 원작이 시작되고 모방꾼은 크로와 몇 번 접촉한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에 깊은 절망을 느끼던 줄리엣은 아무 전조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그의 계획에서 핵심이라고만 알고 있던 크로에게 접근한다.
즉 크로가 모방꾼이란 사실은 차원의 틈으로 들어간 마지막 순간까지 몰랐던 것이다.
두 자매는 허탈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한번 기억을 떠올린 이상 더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인제 와서 되찾은 기억을 다시 없앤다는 건 불가능했다.
“···왜 우리를 만든 거야?”
가장 궁금한 건 이거였다. 대체 그의 계획에서 자신들이 무슨 역할을 하길래 굳이 능력을 남발해 몸이 망가지면서까지 창조하였단 말인가? 그래봤자 자신들은 결국 여신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데.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신들이 깨어나면 하늘의 신들과 맞서 싸우기 전까지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용 신체였어.”
모방꾼은 덤덤하면서도 초연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지금은 달라. 너희와의 추억이 쌓인 순간부터는 그런 이유 따위 핑계에 불과했고 그냥 너희의 존재를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었기에 만든 거야.”
그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자신들의 최초 탄생 이유는 여신들을 위한 대용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지금도 그 계획은 유효한가요?”
“아니.”
모방꾼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확실하게 말했다.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 현재를 희생해서 만들어나가는 미래 따위 아무 의미도 없던 거야. 그러니 너희를 희생시키지 않아. 모두가 지금부터 행복할 수 있는 현재를 만들겠어.”
그 선언에 줄리엣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결심이야 좋은데···. 정말로 그게 가능한 거예요?”
미래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
그 말이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의 상황은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딱 잘라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져가는 연속적인 흐름이다.
현재에는 불가능한 것이 미래에는 가능해질 수 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 했을 때 당장 내일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한번 떨어지고 1년 동안 재수해서 합격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고 가정하면 내일 아침의 시험 성적보다 1년 후의 시험 성적이 좋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시험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며 내리는 모든 선택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상황상 현재에는 불가능하기에 열심히 노력해 미래라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준비한다.
줄리엣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기억 속의 자신 또한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최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고 발버둥 쳤으니까.
신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레지스탕스에 입단하고 드라칸과 억지로 협력하고 동생을 납치하고 소중한 사람을 배신했었다.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합리화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길 원했을 뿐이다.
때로는 비참한 현재를 묵묵히 견디고 버텨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나도 알아. 내가 걸어가려는 길은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미지의 길이니까. 어쩌면 이 선택이 틀렸을지도 몰라.”
그 또한 줄리엣과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꾹 참고 5년만 버틴다면 원작이 시작된다. 철저하게 계획된 길을 따르기만 한다면 훨씬 안정적으로 최선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겠지.
“하지만 기적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아. 눈앞에 불구덩이가 있다고 무릎 꿇고 살려달라 기도해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직접 불구덩이를 뛰어넘으려고 달려들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날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지는 거니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결국 그의 말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내용 속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누구나 적당히 꾸며서 그럴듯하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필사의 각오가 담겨있었다.
그는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불구덩이에 뛰어들 작정이었다.
운명이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방법은 있어. 하지만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모두가 힘을 합쳐줘야 해.”
그의 부탁에 샤론과 줄리엣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당연하게도 여신들을 해방해 다시 재회하는 것이었다.
내겐 불확정성이란 능력이 있지만 그건 결코 전지전능한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한 존재의 도움 없이는 딱히 쓸모도 없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만약 밤의 여신이 날 사도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터나가 하양이를 통해 시간 조작 능력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불확정성은 결국 가능성을 만들어내기도 전에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압사당했을 것이다.
두 여신을 무사히 해방할 수만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크게 어렵지 않다.
본래라면 원작이 시작됐을 때부터 신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진행됐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운명을 완전히 부수는 순간 하늘의 신들조차 우리를 건드릴 수 없게 될 테니까.
전면전이자 속도전이었다. 하늘의 신들은 어떻게든 내가 두 여신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해오겠지. 그걸 이겨낸다면 우리의 승리다.
신이 상대라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결국 그들조차 이 세계의 법칙에 얽매인 존재. 신은 결코 중간계에 직접 관여하지 못한다. 우리를 방해할 수단이라고 해봐야 사도나 교단을 이용해 압박하는 정도가 고작이겠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여신들을 해방한 순간부터는 죄인을 다시 하늘로 끌고 올라간다는 명분으로 땅에 직접 강림할 수도 있다. 이터나를 사로잡기 위해 신들이 오두막에 내려왔던 때처럼.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전부 끝나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여신들을 어떻게 해방할지만 고민해도 충분하다.
먼저 여신님의 경우는 아일랜드의 신전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여신님의 힘을 온전히 되찾기 위해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곳곳에 흩어져있는 보석들을 모을 필요도 있다.
문제는 이터나의 경우였다. 일전 하양이와의 거래를 통해 현재 이터나의 신성은 내 몸속에 깃들어 있다. 과거 크로였던 시절에 만났던 시간의 여신이 나를 줄곧 지켜봤다던 얘기 또한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의식과 달리 몸은 여전히 하늘의 가장 깊은 곳 순백의 신전에 감금당해있는 상태다.
그를 위해선 신의 힘. 즉 여신님을 먼저 깨울 필요가 있다.
대략적인 방향은 정해진 것 같다.
먼저 여신님을 깨우고 보석을 찾아 힘을 되찾는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이터나를 구해내 운명을 부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자세히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봐야 미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내가 걸어갈 길의 방향을 좁힐수록 운명에 얽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 혼자서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샤론과 줄리엣이 도와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관측과 왜곡.
각각 시간과 거짓이란 신성에서 파생된 이 능력은 평범한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두 능력이 하나로 힘을 합쳤을 때 발현되는 능력은 이번 최후의 싸움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끝이 머지않았다.
“···오랜만이네. 이런 기분.”
나는 다시 괴도 레이븐으로 돌아와 모자를 푹 눌러쓰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신님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얼른 뮹뮹의 공모전 작품을 보러오는 거에용!
이건 명령이니까 무조건 따르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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