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9
아일랜드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깊은 바닷속엔 나를 도와준 인어 공주님이 있었지.
지금은 아직 인연을 맺기 전의 과거이다 보니 나에 대해선 모르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제부터는 기존의 미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크로라는 존재가 등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크로 모리스라는 소년 안에 깃들어 있는 내 인격은 꿈에 잠겨 현대의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꿈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크로는 현대의 기억을 계승 받지도 않을 테며 원작에 잠깐 등장한 엑스트라로서 평온한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그래.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이후엔 다시 들려 인어 공주와 또 한 번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며 바다가 노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주황색으로 물들어 잔잔하게 흘러가는 바다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선선한 바람이 갑판 위에서 살랑살랑 불어왔다.
“······.”
그 미약한 변화에도 몸은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래. 내 몸은 여전히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처참한 상태였다.
기세 좋게 지하실을 나와 아일랜드해를 건너고 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셈이다.
물론 최소한의 조치는 취해놓았다. 예전부터 꾸준히 모아두었던 달맞이꽃을 비롯해 몸에 좋다는 각종 약초나 치료제 등을 전부 쏟아부어 몸 상태를 조금이라도 호전시켜두었다.
이마저도 잠깐의 시간 벌이일 뿐 시시각각 내 몸은 다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아마 약으로 도핑해둔 이 상태가 끝난다면 나는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속도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런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도 여신들이 깨어나 신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는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여신들이 땅에서 신성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선 이 세계의 법칙에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즉 운명의 수레바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슬슬 아일랜드가 보인다. 여신님과의 재회할 시간도 머지않았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아직도 예언의 마녀가 한 말. 비참하고 끔찍한 최후를 겪게 되리라는 그 운명은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은 그 한마디를 부정하기 위한 발버둥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모두와 함께.
***
“하아···.”
나는 아일랜드에 도착하자마자 기억을 되짚으며 아스러진 신전으로 향했다.
조금만 걸어도 금방 지쳐버려 이동 속도는 느렸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쉬지 않고 노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 이젠 너무나 희미해져 버린 옛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막 꿈에서 깨어나 소설 속 세계의 엑스트라 캐릭터에게 빙의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건 내 착각이었을 뿐이며 실제로는 처음부터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원주민이었었지만.
그 당시엔 그런 진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갑작스레 내가 살던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 휘청거리고 있었다.
결국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그냥 죽어버리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망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부 포기하고 그냥 편해지고 싶었던 거다.
자살할 용기가 생긴 게 아니라 살아갈 의욕을 잃은 거였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어느 날.
이젠 아무래도 좋다며 목적지도 없이 터덜터덜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렇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끝에 다다르지 않을까. 그러면 편해지지 않을까.
단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주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곧 내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분명 내가 아까까지 있던 장소는 런던의 밤거리였을 텐데 어느샌가 주변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내 앞을 가로막은 건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묘비 비석 하나.
그 비석에 앉아있던 까마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섬뜩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죽기에 꽤 알맞은 무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죽을 방법이 없었다. 죽겠다며 걷던 나는 밧줄은 물론이거니와 죽기 위한 그 어떤 방법도 준비해두지 않았었다.
결국 내게는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조차 없었단 걸 깨닫고 나무에 기대앉아 나 자신을 자조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대로 있다 보면 언젠가는 얼어 죽겠지.’ 막연하게 기대하며.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느냐?]
지금 떠올리면 너무나도 그립고 소중한 목소리.
[낯선 땅까지 와 죽음을 바라는 가여운 아이야. 정말 그대로 만족하느냐?]
묘지에 꽂혀있던 지팡이로부터 들려오는 한 여인의 음성.
나는 그 지팡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내 이름은······.]
옛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어느샌가 목적지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 가운데서도 은은한 달빛과 반짝거리는 별빛이 들판에 사뿐히 내려앉아 신전을 비추고 있었다.
신전을 둘러싼 절벽 너머로 고즈넉한 밤바다가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여신님이 왜 여기에서 잠들기로 선택했는지 절로 이해가 갈 만큼.
그녀는 처음 땅에 내려왔을 때부터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감상하는 걸 좋아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똑같이 눈에 담으며 줄곧 기다려왔던 거겠지.
혼자 오기를 잘한 것 같다.
샤론과 줄리엣은 지금쯤 다른 곳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겠지만 설령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곳만큼은 나 혼자서 찾아오고 싶었다.
어느 사건을 이야기의 첫 시작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숲속에서 이터나를 만난 것.
내가 잠에서 깨어나 크로로서 움직이게 된 것.
아니면 줄리엣을 따라 동굴에 들어가 차원의 틈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읽은 순간일 수도 있다.
애초에 이건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일방통행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사건이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주며 서로 이어지고 맞물리는 퍼즐과 같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굳이 한 사건을 시작으로 꼽아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여기서 여신님을 처음 만난 순간을 꼽을 것이다.
그래. 여기야말로 진정한 시작이었다.
내가 삶의 희망을 되찾고 여신님과 함께 괴도 레이븐으로서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계기였다.
나는 천천히 신전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수천 년간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듯 세월의 풍파에 아스러져 가던 신전.
여태껏 이곳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굴뚝 같았었는지.
그럼에도 계획을 망쳐선 안 된다는 말만 억지로 되뇌며 얼마나 참았었는지.
본래라면 지금으로부터 5년 후 크로인 내가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을 때 여신님이 그 절망감에 반응해 나를 이곳으로 부르게 된다. 즉 아직은 여신님이 직접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여신님을 깨울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신전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비석을 매만지며 여태껏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속으로 되뇌었던 그 이름을 처음으로 직접 목소리 내어 불렀다.
“엘디나.”
그러자 환한 달빛의 조명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나와 비석을 비추었다.
[···그렇구나. 이게 네가 내린 선택인가.]
너무나도 그리운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여신님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레이븐. 잠든 내내 너를 지켜보았단다. 비록 꿈처럼 어렴풋하게라도 네가 나를 찾을 때마다 누구도 알지 못할 내 진명을 누군가가 간절히 부를 때마다. 언제나. 항상 너를 느낄 수 있었지.]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분명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할 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왔을 텐데 어째선지 그녀 앞에 서자마자 순수하고 어리숙한 시절의 소년으로 돌아가 버린 느낌이었으니까.
“···죄송해요. 여신님께 희생을 강요해놓고서 막상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여신님이 크로와 만나야 하는 미래도 뒤틀리고···.”
[참 어리석은 얘기를 하는구나. 거짓의 여신인 내게 있어 이름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단다. 네가 크로든 뤼팽이든 레이븐이든 너는 그저 너일 뿐이야. 내게 언제나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일 뿐이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자 어느 순간 내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눈물을 자상하게 닦아주었다.
“여신님···.”
“그러니까 울지 말렴. 부디 환히 웃어주면 좋겠구나.”
나는 그 말대로 웃었다.
여신님도 마주 미소 지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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