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내가 일부러 봐줬다고?
대체 무슨 과정을 거쳐 그런 결론에 다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를 풀기 위해서 곧바로 해명에 나섰다.
“일부러 봐줬다니. 진짜 오해야.”
“그래. 끝까지 잡아떼겠다는 거구나.”
레이어드는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내가 아닐까?
“처음에 분명 최대한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그래. 그래서 진짜 최선을 다했다니까. 아무리 얘기해도 받아들이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왜 내가 봐줬다고 생각하는 건지 말이다.
“내가 왜 일부러 져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마지막 전투 때. 너는 환상을 이용해 내 뒤를 잡았었잖아.”
그랬었지. 내가 준비했던 비장의 한 수였고 보기 좋게 파훼 당하고 말았다.
주인공과의 재능의 차이만 실감했던 그 순간을 왜 갑자기 언급하는 걸까?
“그때 일부러 내가 반응할 수 있도록 눈치를 줬으면서. 아직도 발뺌할 생각이야?”
잠시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얘 말은 즉 반응할 수 있던 이유가 내가 미리 눈치를 줬기 때문이라고?
‘제가 언제 그랬죠?’
[글쎄다.]
여신님도 모른다고 한다. 그야 당연히 그런 신호를 보낸 적 따위 없으니까.
“레이어드. 아마도 네가 착각한 걸 거야. 난 정말로 그런 적 없어.”
“···그래. 네가 그렇게 끝까지 부정한다면 어쩔 수 없지.”
휴. 겨우 녀석도 내 진심을 알아준 모양이다. 이게 바로 두드리면 결국 열린다는 거구나.
그런데 어째선지 레이어드의 눈빛이 여전히 심상치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전력을 내비치게 만들어 주겠어. 그러니까 각오해.”
“···응? 각오하라니. 잠깐만.”
어딜 가는 거야! 자기 할 말만 하고 뒤돌아 쌩하니 가버리는 레이어드.
황당함에 붙잡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녀석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라이벌이 생겼구나. 후후.]
‘저는 라이벌 같은 거 필요 없는데요···.’
거기다 더 문제인 건 지금이 수업 시간이라는 점이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른 건 아니더라도 우리의 대화는 옆에 있던 아이들이 전부 듣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실제로 나를 곁눈질하며 자기들끼리 속닥이기 시작하는 반 아이들.
평소 아무런 존재감 없이 지내오던 아싸와 신입생 내에서도 주목받던 재능을 지닌 루키 간의 라이벌 구도 형성.
심지어 한쪽이 일방적으로 봐줬다? 아이들의 관심사로 오르기에 충분하다 못해 완벽한 가십거리였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부디 소문이 많이 퍼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찐따. 너 칼잡이랑 라이벌 됐다며?”
이건 글렀다. 벌써 이 녀석마저 알고 있다니. 레이첼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실컷 놀리기 시작했다.
“대련 못 봤는데 잘 싸웠나 봐? 좀 치냐? 다음엔 나랑 뜰래?”
“아하하···.”
곤란한 질문들을 멋쩍은 웃음으로 무마하자 곧 시시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레이첼.
“반응 존나 노잼이네.”
그 이후로는 다행히 레이첼을 포함해 대련과 관련된 얘기를 걸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애초에 딱히 친한 친구가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괜히 시선이 끌려서 정체가 발각될 위험을 키울 바엔 최대한 조용하게 존재감 없이 지내고 싶었다.
어찌어찌 오늘 하루의 수업도 끝이 났다. 아이들은 제각기 흩어져 방과후 동아리나 기숙사 혹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곧바로 짐을 챙긴 다음 뒷문으로 나가려던 찰나 옆쪽에서 다가오던 한 소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앗!”
“아.”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윤기가 흐르는 진한 금발과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
같은 반 아이 중 한 명인 샤론 혼시아였다.
[녹안이구나.]
‘어···. 그렇긴 한데. 설마 그 여자겠어요?’
[괴도는 원래 모든 가능성을 의심해야 하는 법이니라.]
‘···보통 그러는 건 괴도가 아니라 탐정 아닌가요.’
아무튼 여신님의 말대로 그녀 역시 녹안인 이상 후보에 속한 것은 맞다.
원작에선 큰 비중 없이 스쳐 지나가듯 나올 뿐인 조연.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와 비슷한 엑스트라 캐릭터에 불과하다.
외모가 뛰어난 것과 별개로 딱히 출연도 없고 능력 역시 인상적이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미안해.”
다소 무뚝뚝한 어조.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손을 흔들며 얘기했다.
“아니야. 내가 주위를 안 살폈는걸.”
“그래. 먼저 가볼게.”
그러고서는 정말 쿨하게 복도로 나가버리는 샤론. 확인하고 자시고 그럴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혹시 목소리는 기억하느냐?]
‘음···.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일인데도 가물가물했다. 정확한 목소리는 몰라도 말투는 꽤 엇비슷한 느낌이 들긴 했다. 다만 분위기로 따지면 이쪽이 훨씬 차분하고 조용하다고 해야 하나. 어젯밤 만난 여자는 조금 더 적극적인 느낌이 있었으니까.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하구나.]
‘그러게요. 다음번에 최대한 특징을 외워둬야겠어요.’
그러자 여신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짓궂게 물었다.
[오호라? 다음에도 그 여자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는구나.]
‘그건···. 그냥 직감이랄까요.’
[과연. 운명의 상대라는 거로군.]
왜 해석이 그런 식으로 가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우리는 아카데미를 빠져나와 서둘러 집으로 복귀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시각.
학생이란 신분을 잠시 접어놓고 괴도로 다시 복귀할 때였다.
오늘 밤도 역시 할 일이 많았다.
교복을 벗고 정장을 차려입는다.
검은 실크햇을 눌러쓰고 단안경을 착용한다.
하얀 장갑을 낀 다음 지팡이를 집어 든다.
크로 모리스는 오늘도 괴도 레이븐으로 활동한다.
“그럼 가볼까.”
서서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
오늘은 보석을 훔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틀 연속으로 일을 벌이는 게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아직 예고장도 날리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어느 보석을 훔칠 건지도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괴도로서 해야 할 활동은 있었다. 오늘의 계획은 바로 어제 훔쳤던 ‘태양의 미소’를 처분하는 것.
저번에도 말했듯 보석을 훔치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다. 보석에 담긴 여신님의 힘만 빼내면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자연스레 선택지는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 다른 하나는 보석을 처분한 다음 돈이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방법을 정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주인이 착하다 싶으면 돌려주고 나쁘다고 생각되면 처분한다.
‘태양의 미소’를 가지고 있던 라파노는 조사해본 결과 상당히 질이 나쁜 녀석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남을 피해 입히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쓰레기였다.
그러므로 태양의 미소는 처분한다.
하지만 어떻게 파느냐도 문제다. 당연하지만 장물을 취급하는 상인은 거의 없다. 하물며 신문에 대서특필이 날 만큼 값비싸고 귀중한 보물을 받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안녕하세요. 마녀 씨.”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내가 들어오자 카운터에 턱을 괴면서 눈웃음으로 답하는 마녀.
“어서 와요. 괴도 씨.”
“팔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어서요.”
“그게 물건이 뭔지 왠지 알 것만 같은데요?”
그녀는 거래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취급한다. 이런 장물 따위는 시시하게 보일 정도로.
괴도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와 거래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여신님과는 별개로 내가 원작의 정보를 통해 직접 먼저 찾아가면서 인연을 만들었다.
다만 아직은 인연이라기에도 민망한 것이 이번이 고작 2번째 거래이기 때문이다.
나는 품에서 태양의 미소를 꺼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호박의 빛깔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예쁜 보석이네요.”
“그렇죠.”
“좋아요. 사겠어요. 대신 조건은 아시죠?”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에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존재한다. 마녀가 제시한 가격을 흥정하려 하지 않는 것.
다소 불공정한 조건처럼 보여도 애초에 이곳이 아니면 취급 자체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불만을 품는 것도 과분한 처지였다.
“감정을 해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나는 순순히 보석을 넘겨주었다. 마녀는 고작 이런 사소한 거래에 장난질을 치거나 가격을 후려치지 않는다. 원작에서도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공정한 거래만을 추구해왔으니까.
“음···. 혹시 돈이 아니라 다른 걸 받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예를 들면요?”
“이건 어때요? 엄청난 정보들이 적혀 있는 책인데 샘플은 특별히 공짜로 보여드릴게요.”
마녀가 주는 정보라. 꽤 솔깃하긴 했다.
샘플은 어차피 공짜라고 하니 구경해도 상관없겠지.
<지하 하수도에 출몰하는 악어 괴물>
<밤마다 거리를 서성이는 흡혈귀 노파>
<살아 움직이는 액자 속 소녀>
<시계탑을 지키는 태엽 인형>
<간을 빼먹는 아홉 꼬리의 여우 귀신>
그것들을 유심히 읽고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도시 전설들이잖아요.”
게다가 마지막은 판타지 배경이랑 전혀 안 어울리잖아. 저건 동양 배경이라고.
“후후 이런 쪽엔 관심 없으신가요?”
뒤늦게 책 표지를 읽어보니 <무시무시한 도시 속 전설 괴담 50선>이라고 적혀 있다.
마녀에게 한 가지 유일한 흠이 있다면 장난기가 꽤 많다는 거였다.
어쨌든 거래는 무사히 끝났다. 역시 그녀는 내가 예상했던 정도의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했고 그렇게 태양의 미소는 마녀의 손에 넘어갔다.
“이제는 뭘 훔치실 생각인가요? 괴도 씨.”
“글쎄요. 여기도 꽤 훔쳐 갈 게 많아 보이는데요.”
“어머. 그건 안 돼요. 여기서 훔쳐 가도 괜찮은 건 하나뿐이거든요.”
가게 주인이 공식적으로 허락한 절도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마녀에게 물었다.
“그게 뭔가요?”
“제 마음이요♡”
“···과연. 명심해둘게요. 그러면 다음에 또 봬요. 마녀 씨.”
역시 장난기가 심해.
나는 도망치듯 서둘러 마녀의 가게를 빠져나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녀 가게의 최고 인기 상품은 막대사탕이랍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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