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0
여신님은 내 뺨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많이 아팠겠구나. 부디 조금만 참으렴.”
편안한 달빛의 기운이 내 통증을 잠재워주었다.
물론 몸 상태가 완치된 건 아니었다. 지금의 내 몸을 원래대로 고칠 유일한 방법은 시간 회귀를 통해 과거의 멀쩡했던 시절의 신체로 되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터나를 해방하여 금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내가 완치되는 건 모든 싸움이 끝난 이후에서야 실현 가능한 이야기다.
이제부터는 일분일초도 허투루 낭비해선 안 되는 치열한 속도전이 펼쳐질 것이다.
여신님이 봉인에서 깨어나 육신을 갖게 된 이상 하늘의 신들 역시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으리라.
“여신님. 런던으로 돌아가죠.”
내가 내민 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엘디나.”
“···네?”
“이제부터는 여신님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렴.”
그 뜻밖의 제안에 내가 멍하니 있자 여신님 아니 엘디나는 내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우리는 이제 신과 권속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동료이자 남녀 관계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디나.”
“후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참으로 감미로운 일이구나.”
눈을 감으며 작게 미소를 짓던 그녀가 이내 살며시 눈을 뜨며 작게 속삭였다.
“물론 네 목소리로 불러줘서 그런 거겠지. 다른 누구도 내게 감히 이런 감정을 일으키게 하지 못할 거야.”
달콤한 말이었다.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조차 순간 잊고 이 재회를 더 느긋이 즐기고 싶을 만큼 항상 바라왔던 순간이 현실에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다.
“나는 널 어떻게 부르면 되겠니? 원하는 이름을 말해보렴.”
“레이븐. 그거면 충분해요.”
여신님과 만난 이후 새롭게 시작된 삶에 붙였던 이름.
지금의 내게는 괴도 레이븐이야말로 진정한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여태껏 수많은 거짓 인생을 살아왔지만 괴도 레이븐으로서 살아온 삶만큼은 진짜였으니까.
“이제 출발하죠.”
“그래. 지금부터 시작인 거구나.”
엘디나와의 재회는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완벽한 미래를 거머쥘 수 있다.
나는 그녀와 브리튼으로 돌아가는 배에 탑승해 밤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먼저 내 신성을 되찾는 게 우선이겠구나.”
“그 일은 샤론이 힘내주고 있을 거예요.”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엘디나의 신성 조각. 우리가 괴도로서 열심히 각종 보석들을 훔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
과거의 나는 몰랐지만 프랑켄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마도공학회를 통해 보석들의 행방을 전부 파악해둔 상태였었다. 물론 원래 계획에 따르면 그 보석들은 전부 크로가 찾아야 하니 내가 직접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계획을 전부 파기하고 현재를 위해 움직이기로 결정한 이상 그런 귀중한 정보를 써먹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나는 즉시 샤론에게 마도공학회와 연합해 보석들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오퍼레이터와 기관장. 2명의 초월자가 함께 도와주는 데다 마도공학 열차를 이용해 거리의 제약도 무시할 수 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줄리엣에겐 적들의 동태를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이 마지막 싸움의 주적은 당연히 하늘의 신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금제에 얽매어 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의 실질적인 적은 신들의 계시를 받아 움직이는 사도와 교단들이다.
산업혁명이 한창 시작 중인 오늘날에 교단의 위세는 크게 감소했기에 큰 위험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신성을 일부나마 사용하는 사도들이다. 그들은 초월자와도 견줄 수 있을 만한 전투력을 가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라면 역시 태양신의 사도였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리라.
당시에 백작은 드래곤을 소환해낸 지나가 상대하고 앞선 전투로 지쳐있던 상태에서 초월자인 기관장이 쓰러트리며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5년 전의 과거이기 때문에 지나는 드래곤을 소환할 수 없다. 초월자인 기관장과 오퍼레이터는 샤론을 도와 보석을 모으기도 벅찬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백작이 내 앞을 막아선다면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다. 특히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연합해 동시에 나타난다면 더더욱 위험하다.
그러니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기억이 있는 줄리엣이 백작을 감시하며 동태를 주시한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백작이라면 분명히 이번 사태에서도 주도적인 움직임을 취하려 적극적으로 나서며 사도들을 규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백작만 잘 감시해도 다른 사도들의 움직임도 함께 파악할 수 있는 셈이다.
어차피 엘디나가 힘을 완벽히 되찾는 순간 사도들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신에게 힘을 빌려 쓸 뿐인 사도가 어떻게 신 그 자체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샤론 일행이 보석들을 구해다 주기 전까지 우리는 안전하게 사도들을 피해 다니기만 하면 된다.
그다음부터는 엘디나의 힘을 이용해 하늘에 묶여있는 이터나를 구출해내고 두 여신의 힘을 통해 금제를 완전히 부숴버려 신들이 더 이상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면 우리의 승리.
그런 계획을 엘디나에게 전부 알려주자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짧은 사이에 이 정도로 계획을 세우다니. 대단하구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한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위기에 봉착한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느냐는 거죠.”
어차피 계획은 미래를 상정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누구라도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갈 수 없다. 심지어 불확정성의 힘을 지닌 나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것뿐. 부서져 산산이 조각나버린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미래가 아닌 현재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엘디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놀랍구나. 네가 정말 예전의 그 어리숙하던 아이가 맞는지 신기할 정도야. 그런 귀여운 모습도 좋았었는데. 그래도 지금처럼 늠름한 모습도 나쁘진 않아.”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나는 한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였다. 그건 아마도 이제는 머나먼 과거의 기억.
“여신님은 제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든 끝까지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었죠.”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처음 예언의 마녀에게 내 운명에 대해 듣고 심란하던 찰나 돌아오던 열차에서 여신님이 내게 꺼냈던 그 말을.
단순한 빈말이라기엔 그 말이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이지 않았으나 여신님이 나를 품에 끌어안고 토닥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 어느 꿈의 한 자락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구나.”
물론 그녀에겐 겪은 적 없는 미래의 일이었다. 다른 시간선에서 오로지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날 위해 선의의 거짓말로 답한 걸까. 어쩌면 이유조차 모를 기적이 일어나 그녀가 정말로 기억을 떠올린 걸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나와 똑같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엘디나의 눈빛에선 분명 그때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마워요. 그 말이 정말로 큰 힘이 되어줬어요.”
“레이븐.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단다. 난 언제나 네 곁을 지킬 거야. 설령 이 길의 끝에 끔찍한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너와 함께한다면 게헨나조차 분명 따뜻하고 아늑할 테니까.”
엘디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눈을 감은 채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그려 넣은 그 모습에 나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브리튼의 육지에 도달했을 때 어느새 밤은 물러가고 새벽의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은 제법 아름다웠지만 밤의 여신인 그녀와 그 사도인 내게 있어 밤이 끝난다는 사실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몸속에 스며들어있던 달빛의 기운이 사라지며 다시금 몸이 무거워지며 괴로운 고통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 상태를 알아차린 엘디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몸이 많이 안 좋으면 근처에서 좀 쉬다 가자꾸나.”
“한 위치에 오랫동안 머무르면 놈들이 알아차릴 거예요. 좀 더 안전한 곳까지 이동해서 쉬는 걸로 하죠. 저는 괜찮으니까···.”
물론 괜찮지 않았지만 지금은 억지로 괜찮아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괜히 여기서 엄살을 부리다 적들이 앞을 막아서기라도 한다면 그때야말로 진짜 큰일이었으니까.
만약 적과 싸워야 한다면 무조건 밤이어야 한다. 한낮에는 사도 연합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일단 몸을 숨기고 샤론과 줄리엣에게 연락해 상황을 전해 듣자.
그리고 그다음에는···.
한창 생각에 잠겨있느라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우리를 지나쳐가지 않고 길을 막아서듯 가만히 멈춰선 누군가.
그 상대의 익숙한 얼굴에 나는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크프리트···.”
드라칸의 일원 빙결의 마법사 지크프리트가 기분 나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욤욤잉님 후원 넘무넘무넘무넘무 감사드리는 거에용~~!!!!
항상 글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도 꼬박꼬박 달아주셔서 늘 힘이 되는 거에용..!!
오늘 드디어 300화를 달성했어용!
여태껏 늘 작품을 사랑해주신 zakuti님도 넘무 감사드려용~~!!!
앞으로도 완결까지 계속 열심히 쓰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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