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1
누군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게 이 녀석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크프리트.”
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상대는 꽤 놀랐다는 듯이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보네. 난 네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데 말이야.”
알다마다. 이 녀석과 얽힌 악연이 그리도 깊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지크프리트가 어째서 지금 이 타이밍에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드라칸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이다. 물론 이때도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몇 년은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목적이 뭐냐. 왜 날 노리는 거지···?”
억지로 몸을 뻣뻣하게 세우며 최대한 태연한 척 의중을 떠보았다.
지금 내 몸 상태가 최악이란 사실을 들키는 건 좋지 않다. 상대의 경계심을 최대한 끌어올려 섣불리 덤벼들지 못 하게 해야 한다.
“뭐 우리가 움직이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거든. 모든 것은 드래곤의 재림을 위해서.”
참으로 드라칸다운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방해하는 게 드래곤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은 차원의 틈에서도 본 적 없었다.
애초에 내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은 순간부터 창밖의 이야기도 전부 아무 쓸모 없는 세계선의 가능성에 불과해졌으니까.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녀석을 직접 쓰러트린 다음 정보를 캐낸다.
드라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나머지도 전부 상대하는 걸 가정하며 움직여야겠지. 그나마 지금 당장은 지크프리트 한 명뿐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레이븐 괜찮겠느냐?”
“문제없어요.”
나는 여신님을 안심시킨 뒤 천천히 전투태세를 끌어 올렸다.
시간을 질질 끌었다간 상대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드라칸은 조직원 하나하나가 집행자를 웃도는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
하물며 원작에서조차 베일에 휩싸여있던 리더는 얼마나 강한지 나조차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여기선 최대한 빠르게 지크프리트를 해치우고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하.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용기는 칭찬해줄게. 그럼 잘 가라고.”
자신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지크프리트가 여유롭게 손을 뻗어 냉기를 방출했다.
나는 빠르게 지팡이를 소환해내 모자 마술로 상대의 공격을 되받아쳤다.
“반사 마법인가? 나쁘지 않군!”
날아드는 얼음송곳을 보고도 상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빙하 벽을 올려세웠다.
그리고는 냉기로 얼려진 땅을 스케이트 타듯 사뿐히 미끄러지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지크프리트.
접근전으로 승부를 볼 셈인가?
나는 사양하지 않고 트럼프 카드 뭉치를 꺼내 주변에 흩뿌렸다.
녀석의 냉기 마법이 사기적인 가장 큰 이유는 압도적인 속박력에 있다.
마법을 쓸 때마다 몰아치는 냉기는 상대의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고 얼음에 살짝이라도 스치면 그 부위에서부터 서서히 빙결이 진행된다. 그러다 손길에 한 번이라도 붙잡히는 순간 완전히 동결되어 그대로 얼어 죽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의외로 방법은 간단하다.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상대의 공격은 굉장히 위협적이지만 피할 수 없을 만큼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다.
지크프리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일부러 접근전을 유도한 거겠지.
멀리서 냉기를 쏘아봤자 내가 쉽게 피할 테니 가까이에서 범위 전체를 얼려버릴 속셈인 거다.
그런 상대방의 노림수 따위는 진작 파악했다.
나는 주변에 뿌려둔 트럼프 카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녀석의 속셈을 완벽히 파훼했다.
“윽···! 뭐냐!?”
놈이 냉기를 방출할 때마다 다른 카드의 위치로 순간 이동하며 범위 공격을 회피한다.
이래서야 근접전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지크프리트가 뒤늦게 뒤로 물러나 태세를 정비하려 했지만 이미 내가 뿌려놓은 카드의 한복판에 들어온 시점에서 늦은 지 오래였다.
킹의 카드에서 검이 튀어나와 상대에게 빠르게 날아들었다. 뒤쪽에서 노려오는 불시의 기습에 상대는 당황하며 간신히 검을 피해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윽고 퀸의 카드에서 사슬이 튀어나와 지크프리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크윽···!!”
놈이 일순 무력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제일 가까운 카드의 위치로 이동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색 상자가 허공에서 생겨나더니 그대로 지크프리트를 가두어버렸다.
검은 상자는 세 층으로 분류되어 얼굴과 하반신 부분은 투명한 유리창으로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가운데의 상반신 부분은 불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뭐 뭐냐···!?”
옴짝달싹 못 하고 상자 안에 갇힌 채 당혹스러워하는 지크프리트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발버둥 쳐봤자 풀리지 않을 거야. 트릭을 간파해야지만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 마술이거든.”
“젠장. 내가 그딴 헛소리에 속아 넘어갈 거 같아!?”
“믿든 안 믿든 간에 그거야 네 자유지만 이건 공평한 룰 아래서만 발동되는 마술이니 설명해준 것뿐이야. 그럼 이제부터 탈출 마술 – 신체 절단 편을 시작해 보자고.”
상자 안에 갇혀 무의미한 괴성을 지르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딱하게 바라보았다. 저럴 시간에 트릭을 간파하려 노력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지인데 말이야.
뭐 나로서야 녀석의 발을 오래 묶을수록 좋으니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어차피 금방 탈출할 리도 없을 것 같으니 여유롭게 지팡이를 톱으로 바꿔 상자로 가까이 다가갔다.
쓱싹쓱싹. 일부러 효과음을 잘 들리게 연출해 커다랗던 상자의 중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유리창으로는 정면밖에 볼 수 없어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지크프리트.
“뭘 하고 있는 거냐···!”
“가운데가 좀 허전하지 않아?”
상자를 분리하고서 친절하게 그 상자를 녀석의 얼굴 앞에 들이밀어 보여주었다.
“여기에 네 상반신이 들어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딴 말을 내가 믿을 거 같아!?”
“아까도 말했지만 믿을지 말지는 네 자유야. 아무튼 얼른 트릭을 밝혀내서 탈출하는 게 좋을걸. 만약 룰을 따르지 않고 꼼수를 써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네 상반신과는 평생 작별해야 할 거야.”
쿵쿵쿵!
안에서 난리를 피우는 건지 상자가 요란스레 흔들렸다. 잘라낸 가운데 상자가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인다는 사실에서 내 말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건지 지크프리트의 안색이 딱딱히 굳어졌다.
“엘디나. 이 틈에 얼른 도망가죠.”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것이냐?”
“아마 탈출하려면 못해도 몇 시간은 걸릴 거예요. 괜히 저놈이랑 싸운다고 힘을 빼는 것보단 이게 훨씬 더 깔끔한 방법이죠. 어차피 보석만 되찾는다면 그 뒤부턴 문제도 안 될 테니까.”
싸워서 이기려면 충분히 가능이야 하지만 그만큼 나 역시도 체력과 마력을 소모하게 된다.
게다가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몸을 얼려 공격을 막아낼 수 있기에 방어력이 상당히 뛰어난 편에 속한다. 자연스레 전투도 장기전으로 질질 끌릴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드라칸 전원이 앞을 막아선다고 가정한다면 최대한 힘을 비축하면서 시간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마음 같아선 다른 놈들도 전부 탈출 마술로 가둬두고 싶지만 저 마법은 한 번당 한 명밖에 사용할 수 없다. 즉 지크프리트가 탈출한 뒤에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녀석이 동료들에게 탈출 방법을 알려주면 그만이니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
“근데 저 마술의 트릭은 무엇이니?”
“그거야 마술인데 알려드리면 안 되죠. 아니면 나중에 직접 들어가서 탈출해 보세요.”
“으음. 그건 사양하고 싶구나.”
아무튼 우리는 상자 속에 갇힌 지크프리트를 뒤로하고서 새벽 항구를 빠져나왔다.
향하는 곳은 마도공학회 본부. 아마 지금쯤이면 샤론이 보석들을 거의 다 모아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 목적지는 런던에 있는 마도공학 정거장이다. 가장 빠른 시간대의 열차를 타고 런던까지 내려간다면 금방 도착하리라.
“몸은 좀 괜찮니?”
“···아직까진 버틸만해요.”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빈말로라도 그렇게 말하기엔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게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억지로 병상에서 뛰쳐나와 돌아다닌 대가가 서서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려 하고 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간절한 마음과 달리 정거장에서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이 기다리고 있었다.
“붕대를 칭칭 둘러맨 신사분. 잠깐 멈춰주지 않을래요?”
정거장의 한복판에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베로니카.
이 구도는 좋지 않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간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고 내 위치가 적들에게 더 빨리 탄로되고 마리라.
···애초에 드라칸은 어떻게 내 위치를 알고 아까도 그렇고 지금 역시 먼저 기다리고 있는 거지?
“뭘 그리 깊이 고민하시나. 그럴 여유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베로니카가 손을 뻗어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정신계 공격은 겉으론 눈에 띄지 않기에 주위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다 말고 갑자기 우뚝 멈춰서 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기괴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그녀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한 행인들이 일제히 공허한 눈빛으로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날씨가 부쩍 쌀쌀해진 거에용..!!
다들 감기 조심하는 거에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