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2
지나가던 행인들이 나와 엘디나를 둘러싸고 서서히 좁혀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광경은 제법 위압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건 오히려 우리에게 호재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싸움을 망설이고 있던 찰나 상대가 손수 시민들의 눈을 감겨준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좋게 해석하기 위해선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전투가 무사히 끝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내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녀석들과 똑같은 악당이 되는 셈이다.
“고민이 많은 모양이네. 이 인파를 뚫고 날 쓰러트릴 수 있겠어? 그전에 이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참 얄밉게도 말하네. 상대의 수준 낮은 도발에 넘어갈 필요는 없다. 신경 쓰지 말고 침착하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거다.
“내가 언제까지고 여유롭게 기다려줄 거 같아!?”
베로니카의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우리에게 달려드는 시민들.
난 재빨리 엘디나를 품에 안은 채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망토가 펄럭이면서 크기를 키워가 이내 천장 전체를 뒤덮었다.
조명이 흑색의 망토에 뒤덮이며 세상이 일순간 어둠으로 물들었다.
야외에서라면 어쩔 수 없지만 실내에서라면 잠깐이나마 밤을 재현하는 게 가능하다!
“칫! 시야를 가린다고 해결될 거 같니?”
여유로운 척해도 목소리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내가 지크프리트를 가볍게 쓰러트린 뒤 이곳까지 도달했으리라 믿고 있을 것이다. 즉 그만큼 상대가 상당한 실력자라고 경계하는 중이겠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그 두려움을 끄집어내 키운다.
감히 내게 대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도록.
“참 어리석구나. 승부가 벌써 결정 났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다니.”
마치 하늘의 신이 강림한 것처럼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
베로니카는 명백하게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허 헛소리 집어치워! 누가 그딴 말에 넘어갈 줄 알고?!”
지금쯤 상대는 후회하고 있을 거다. 정신계 마법의 최강자인 그녀는 굳이 나와 엘디나를 직접 세뇌하지 않고 주변 행인들을 조종한다는 불확실한 선택지를 골랐다.
이유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오만한 베로니카의 성격상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압도적인 구도로 승리하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 일련의 방심으로 인해 나는 어둠을 불러낼 수 있었고 상대는 시각을 잃어 우리의 위치를 특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베로니카의 판단은 재빨랐다. 시민들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게 배치한 다음 최대한 경계 태세를 갖추며 암흑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내가 설치한 어둠의 장막은 영원하지 않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최악인지라 마력을 조금만 사용해도 엄청난 두통이 뒤따르고 있다. 최소한의 마법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야만 한다.
망토의 크기가 줄어들며 밤이 저물고 정거장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그녀의 표정도 어느샌가 원래대로 돌아와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음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하하···. 결국 입만 살았지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거기구나!!”
순식간에 기척을 파악하고 손을 내뻗어 정신에 간섭하려는 베로니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서서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 뭐야!? 대체 어째서···!!”
그래. 이해하지 못하겠지.
최강의 정신계 마법사인 자신의 간섭 시도를 이렇게 간단히 막아내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으리라.
비록 5년 후의 일이라곤 하지만 드래곤을 소환해낸 지나마저 움직임을 멈추게 했던 베로니카다.
즉 초월자에 근접한 존재에게 먹힐 만큼 그녀의 정신계 마법은 막강하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았을 뿐이다.
정신을 지배하려 했던 대상이 하필 엘디나였으니까.
아무리 힘을 잃고 약해졌다 하더라도 신은 신이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여신의 정신을 한낱 인간이 지배한다니 그건 이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수준의 기적일 것이다.
베로니카는 또 한 번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조종하고 있던 행인들을 덮쳐들게 했다면 엘디나는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을 테니까.
방금의 실수로 상황이 역전돼버리자 조급함을 느낀 그녀는 이번만큼은 확실히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가진 비장의 카드인 정신 지배를 시도했다.
만약 그 자리에 서 있던 게 엘디나가 아니라 나였다면 속수무책으로 조종당해 승부는 끝나고 말았으리라.
즉 지금까지 일련의 전투 과정은 나와 베로니카가 펼친 카드 게임과도 같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의 패를 가늠하며 수 싸움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심리전에서 내가 완승을 거두었다.
“끝이야.”
천장에 붙어 망토로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당황하던 그녀의 정수리로 가뿐히 착지하며 밧줄로 몸을 꽁꽁 묶었다.
베로니카가 상대의 정신을 조작하기 위해선 손을 뻗어 대상을 지정해야 한다.
즉 밧줄로 팔을 묶어놓기만 해도 그녀는 완벽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
마법을 유지하지 못하자 시민들은 정신을 차리곤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엘디나가 내게 빠르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으냐!?”
“네. 이번에는 간단했네요. ···쿨럭!”
괜찮다고 말하면서 피를 각혈하는 모습은 나 자신이 봐도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지만 엘디나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이익! 나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응?”
그때 깜빡 잊고 있던 베로니카가 씩씩대며 몸부림쳤다.
“이 변태 자식! 나한테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셈이지!? 그 더러운 손길로 내 몸을 마구 유린하면서 추잡하게···!!”
콰직-!
이마에서 들린 살벌한 소리.
참고로 내가 한 게 아니라 엘디나가 손날로 내려찍은 거였다.
“이년은 좀 시끄럽구나.”
“···하 하하. 그러게요.”
무섭다. 나도 잘못하면 저런 꼴이 되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이마에 혹이 생겨버린 베로니카를 이끌고 열차로 이동했다.
마음 같아선 어딘가에 버려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에게선 정보를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말해. 드라칸이 왜 우리를 쫓고 있는 거지?”
“···흥.”
비협조적인 태도에 엘디나가 싱긋 웃으며 손날을 내밀었다.
“아직 덜 맞았나 보구나.”
“히익···!!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열차 좌석에 앉는 것도 허용되지 못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내게 목줄을 붙잡혀있는 베로니카는 상당한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우리도 원래는 오늘 느긋하게 쉴 생각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새벽에 리더가 찾아와선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오고 있는 너희를 붙잡아야 한다고 드래곤을 재림시킬 가장 중요한 열쇠라면서 명령하니까 어쩔 수 없이 꼭두새벽부터 움직인 거라고.”
리더가 직접 움직였단 말인가?
드라칸의 리더가 누구인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원작에서 리더는 사실상 가면을 쓴 사내를 통해 드라칸과 소통할 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너희 리더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
“···우리도 몰라. 여자라는 것 말곤 하나도 모른다고. 가면은 리더랑 직접 만나는 거 같으니 알고 있겠지만.”
“정말로 모르나?”
“히익! 모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 손날 좀 치워줘! 치워주세요!”
새삼스럽지만 드라칸은 동료 간의 유대감이 아예 없는 수준이다.
그냥 뜻이 맞으니 적당히 같이 행동하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작중에서도 단원들이 리더의 명령에 따르는 이유도 리더가 더 강자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언급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베로니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드라칸의 목적을 알기 위해선 리더를 만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가면 쓴 사내와 싸우는 수밖에 없나?
물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아무래도 정체불명의 리더 씨는 우리를 가만 놔두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다.
쾅쾅쾅!!!
젠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옆 칸에서부터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서서히 무언가가 가까이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승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필 열차 안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가 저 녀석이라니.
꽁꽁 묶여있던 베로니카가 히죽 웃으며 얄밉게 중얼거렸다.
“아 너희 큰일 났네. 히히.”
빠각!
“히익···!!!”
그 와중에도 까불다가 엘디나에게 손날치기를 당해버리는 녀석.
하지만 지금은 그쪽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온다.
콰직! 콰드득-!
철판으로 된 문을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등장하는 우람한 육체.
그야말로 파괴 전차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위해 태어난 듯한 살아있는 괴물.
드라칸의 일원 중 한 명 디트리히가 도망칠 수 없는 전장에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반대편 칸으로 달려 나가는 시민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녀석은 천천히 걸어와 마침내 내 바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찾았다. 목표물.”
콰앙-!!
굉음과 함께 디트리히의 강철 같은 주먹이 내게 쇄도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게 와서 죄송해용..!!
후에엥 요즘 너무 바쁜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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