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4
엘디나가 제안한 작전은 생각보다 단순명료했다.
과연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부터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윽. 언제까지 날 끌고 다닐 셈이야···!?”
우리의 얘기를 듣지 못한 베로니카는 투덜대면서도 얌전히 이끌려 따라왔다.
열차가 런던역에서 정차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숨겨진 비밀 마도공학 정거장으로 이동했다.
인파로 북적거리던 일반 정거장과 달리 이곳은 사람 하나 없는 을씨년스러운 공간.
그곳에 한 여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비로운 보라색 머리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한 그녀의 이름은 프란체스카.
광적일 만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드라칸의 일원.
그녀가 드래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드래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칭송 받았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는 정거장에 들어오는 우리를 발견하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내 뒤에 있던 엘디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아···.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힘을 잃었어도 여신은 여신.
한낱 인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다.
아무래도 여신의 자태를 목도하고는 경외감에 휩싸여버린 건지 우리를 향한 적대감도 완전히 지워버린 채 사근사근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호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랑 같이 차라도 한잔 마시지 않으시겠어요···?”
물론 엘디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큰둥하게 거절해버렸다.
“미안하구나. 지금은 좀 바빠서.”
그러다 이 상황을 잘 써먹으면 손쉽게 넘어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엘디나가 머릿결을 귀 뒤로 넘기며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데 우리를 그냥 보내주면 다음번에 같이 식사하는 것 정도야 괜찮을지도 모르겠구나.”
노골적으로 속이 보이는 제안에 프란체스카는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고 히죽거리며 웃었다.
“정말인가요? 물론 그대는 아름다우니 넘어가도 괜찮아요. 그 옆에 있는 추악한 몰골의 신사분만 넘기신다면요.”
추악한 몰골이라. 나를 지칭한다는 건 금방 깨달았지만 딱히 화를 내거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온몸을 붕대로 칭칭 둘러싼 모습은 보기에 따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나도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하지만 엘디나는 그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는지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당장 그 말 취소하거라.”
“네? 뭘 말이죠?”
“어리석은 인간 아이야. 감히 신의 연인을 모욕하다니. 그러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으냐?”
옆에 서 있는 나마저 오싹할 만큼 살벌한 경고였으나 프란체스카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신을 자청하다니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요?”
“그럼 너의 눈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음. 글쎄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시간을 끌던 상대는 손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수집하고 싶은 보석쯤이려나.”
그와 동시에 닥쳐드는 기습!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던 나는 곧바로 몸을 날려 엘디나를 힘껏 밀쳤다.
그녀가 방금까지 서 있던 땅에는 날카롭게 배인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위험하다. 정말 죽일 작정으로 휘두른 공격이었다.
아름답기만 하면 그게 살아있든 죽었든 별로 상관없다는 건가···?
프란체스카는 드라칸 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축에 속하는 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격과 달리 그녀의 전투 스타일은 굉장히 은밀하고 조용해 공격을 눈치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프란체스카의 마법은 와이어 강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고 가는 철사가 엄청난 절삭력과 내구력을 지닌 채 사람의 몸을 무참히 베어버린다.
그 위력은 실로 흉악하며 어디서 어떻게 날아올지조차 쉽게 예측할 수 없어 조금만 방심해도 목이 두 동강이 되어버리고 말지 모른다.
“야 보고 있지만 말고 빨리 구해주기나 해!”
옆에 있던 베로니카가 동료에게 윽박지르며 재촉했다.
그러자 탐탁지 않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내젓는 프란체스카.
“당신은 꼴사납게 붙잡힌 주제에 염치도 없이 잘도 부탁하는군요. 아름답지 않은 언행이에요.”
“으윽···!! 알았으니까 일단 구해주기나 하라고!”
그녀의 와이어라면 내가 아무리 경계해도 손쉽게 베로니카의 밧줄을 잘라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우리가 들어선 순간에 곧바로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두 사람의 상성이 그리 좋지 않아서일 뿐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별로라 하더라도 결국 뜻을 함께하는 동료인 건 변함없다.
그러니 저렇게 틱틱대면서도 프란체스카는 결국 베로니카의 밧줄을 풀어줄 것이다.
베로니카의 정신계 마법으로 지원해주기만 해도 전투는 훨씬 쉽게 끝날 수 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밧줄을 풀어주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어 말을 내뱉었다.
“잠깐. 저 밧줄을 함부로 풀면 위험할걸.”
“무슨 시시한 얘기를 하시려는 건가요?”
“내가 설마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이 녀석을 끌고 왔을까? 밧줄이 풀리는 순간 폭발로 저 녀석은 죽어.”
“···에엑!?”
가만히 듣던 베로니카가 한 박자 늦게 경악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
반면 프란체스카에게선 어떤 위기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를 느낀 건지 더 얘기해보라는 듯 손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호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밧줄 절대 자르지 마! 그냥 놔두라고!!”
내가 한 얘기가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베로니카가 직접 간절하게 호소하는 중이다.
물론 그럴수록 프란체스카는 입가의 미소를 더 진하게 띠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척 베로니카의 마음을 애태웠다.
물론 내 얘기는 전부 허풍이었다. 실제로 내겐 그만큼 정교한 함정을 설계할 만큼의 마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지금 이렇게 멀쩡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여기서 이 이상 억지로 마력을 쥐어 짜냈다간 그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해버릴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상대는 내 허세를 간파해내지 못했다. 내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프란체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이어를 거두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에 살짝 희망을 느끼고 여세를 몰아 슬쩍 얘기를 던져 보았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길을 터준다면 네 동료를 풀어주지. 어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코웃음을 치며 즉답했다.
“하. 제가 그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믿으신 건가요? 제 손으로 직접 동료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서 멈춰줬을 뿐 임무를 위해서라면 아무 상관 없거든요.”
역시 이런 쉬운 방법은 통하지 않는구나.
죽이냐 살리냐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냥 죽이지 않을 뿐 임무를 포기하면서까지 동료를 구해내려는 유대감 따위는 드라칸 단원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베로니카 역시 똑같은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별다른 불평조차 하지 못한 채 이만 갈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 여자의 목숨으로 저를 협박하실 생각이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바로 밧줄을 끊어 편하게 해주는 편이 낫겠네요.”
동료의 목숨을 희생시켜 변수를 없앤다는 비정한 선택지를 아무렇지 않게 고르려는 프란체스카.
“자 잠깐만!! 구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나 그냥 멀리 떨어져 있을 테니까!”
죽음의 공포를 느낀 베로니카가 화들짝 놀라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글쎄요. 저도 물론 당신을 죽이고 싶진 않지만 저 악독한 남자가 계속 당신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면 귀찮아지니까요.”
“사 살려줘. 제발···.”
동료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건지 이번엔 나를 돌아보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베로니카.
남의 목숨을 빼앗을 땐 미동조차 하지 않았을 쓰레기 같은 악당 주제에 이렇게 구차하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겨움이 치솟았다.
나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프란체스카에게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적과 교섭 따위 하지 않아. 다시 한번 말한다. 순순히 길을 비켜주지 않으면 이 녀석은 죽을 거야.”
“어리석군요. 제 말이 허세 같았나요? 저와 기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제가 정말 저 여자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폭발의 범위는 이 정거장 전체야. 즉 이 녀석뿐만 아니라 모두 다 휩쓸리게 되겠지.”
내 덤덤한 경고에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문 그녀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지도 않네요. 당신도 폭발에 휘말려 죽는다는 거잖아요? 인질 한 명만 죽이는 거면 모를까 자기까지 휘말리는 그런 멍청한 함정을 설치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난 너희가 동료 의식이 없어서 아무렇지 않게 함정을 무시하리란 것도 예측했어. 그러니 너도 휩쓸릴 수밖에 없을 만큼 아주 강력한 폭발을 준비해둔 거지.”
태연하게 반박을 되돌려주자 프란체스카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그럼 한번 시험해보던가. 어디 한번 로프를 잘라 봐.”
미묘한 신경전 사이에서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섬뜩한 웃음과 함께.
“상관없어. 나보다 네가 폭발에 더 가까우니까!!”
그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와이어가 정확히 베로니카를 속박하던 밧줄을 끊어냈다.
동시에 그녀는 닥쳐올 폭발에 대비하듯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정거장은 적막만이 이어졌다.
그 빈틈을 노리고 내가 달려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생각보다 완결까지 분량이 길어지면서 연재가 늦어지고 있네용..
죄송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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