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6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느슨해졌던 마음이 긴장감으로 팽팽히 수축했다.
가면의 사내.
이름조차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그는 정체를 숨기고 거의 나타나지 않는 리더를 대신해 드라칸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종합적인 전투력으로 따졌을 때 단연 1순위.
그는 사실상 초월자급에 이르렀다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의 영역에 맞닿은 존재였다.
이전 드라칸의 본거지를 소탕하려 했을 때도 집행 본부장인 에반을 일대일 대결에서 압도했을 정도였으니까. 에반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시간의 틈새로 넘어갈 수도 없었겠지.
솔직히 정면 승부로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와 마주치지 않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열차에 무사히 탑승했을 땐 이놈을 상대하지 않고 협회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안심했는데.
상대는 우리의 목적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할 수 없는 열차 내부에서 이렇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디트리히의 전투 당시처럼 열차 칸을 분리해 떼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저자가 그런 얄팍한 수에 순순히 당해주리란 기대는 들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가면의 사내는 전투가 곧 펼쳐질 텐데도 딱히 동요하는 기색 없이 평온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시간을 최대한 오래 끌수록 유리한 건 이쪽이다. 지금 순간에도 열차는 협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동안 나도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밤이 머지않았다.
슬슬 해가 지고 있으니 조금만 버틸 수 있다면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고 나는 엘디나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상대의 대화에 호응하기로 했다.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데. 왜 우리를 뒤쫓는 거지?”
엘디나를 깨운 순간부터 적습이 있으리란 건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적은 신의 사도들이지 드라칸이 아니었다.
여태 들은 정보에 의하면 결국 드라칸이 우리를 노리는 목적은 드래곤의 재림을 위해서일 텐데 대체 어떤 식으로 연관을 지어야 우리가 드래곤과 접점이 생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흐름은 시간의 틈 너머로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드래곤이란 존재는 원작 이야기에서도 간혹 언급만 되고 지나갈 뿐 실제로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상대가 뭘 노리는 건지 확실히 안다면 차라리 이쪽에서 협조해줄 테니 제발 방해하지 말라고 교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진짜로 드라칸을 도와주진 않고 그런 시늉만 하며 시간만 끌겠지만.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여대는 악의 조직과 동료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간계도 드라칸의 목적을 모르는 이상엔 써먹을 수 없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이 대장의 명령이니까.”
가면의 사내는 순순히 답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 처음부터 딱히 기대도 안 했다. 다른 단원들에게 물어봐도 다 똑같은 대답만 반복하니 이렇게 얼버무릴 거라곤 진작 예상했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상대는 입을 다물고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임해야 할 것 같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조심해.”
엘디나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내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녀도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이번 싸움은 이전처럼 심리전이나 수 싸움으로 풀어나가기 힘들 것이다.
적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날 제압하려 하겠지.
판단력도 굉장히 뛰어난 녀석이니 웬만한 심리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정면 승부. 순수한 전투력의 맞부딪침.
그렇게 흘러간다면 내가 패배할 확률이 높다. 어떻게든 싸움을 변수로 끌고 나가야 승산이 있을 거 같은데.
“아직도 생각이 많구나. 물러.”
그 순간 녀석의 양손에서 어두운 마력이 넘실거리더니 마치 먹물이 번지듯 세상 전체가 암흑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긴장감을 지우지 않은 채 그 변화를 냉정히 지켜보았다.
상대는 어둠을 다루는 마법사.
하지만 나 역시 밤의 여신의 사도.
아무리 이 어둠이 그에게 유리한 장소라 할지라도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조금씩 마력과 체력이 회복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가면의 사내가 앞으로 손을 뻗더니 허공에 구멍이 생기며 거대한 야수의 팔이 나를 덮쳐왔다.
황급히 옆으로 피하며 카드를 던져보았으나 상대의 주변을 둘러싼 암흑이 카드를 가뿐하게 튕겨내 버렸다.
쾅!!
야수의 팔이 거칠게 바닥을 찍더니 날카로운 손톱으로 벽을 마구 긁으며 나를 잔혹하게 찢으려 들었다.
침착하게 대응하자. 우선 마술 모자를 내밀자 구멍 안에서 새하얀 토끼가 깡충 튀어나와 적에게로 뛰어든다.
야수의 팔이 토끼를 가볍게 낚아채 힘을 주어 으스러트리자 퐁! 하는 효과음과 함께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치자 귀여운 토끼가 2마리로 복사되었다.
“···우스운 장난질을.”
가면의 사내는 살짝 언짢다는 듯 중얼거리며 야수의 팔을 조종해 토끼들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바닥에 거칠게 부딪힌 토끼들은 또다시 아까와 같은 효과와 함께 피어오른 연기가 걷히자 이번엔 4마리로 증식되어 있었다.
토끼들이 폴짝 뛰어올라 상대에게 다가간다.
겉으로는 아무 위험도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하찮은 토끼들이지만 상대는 방심하지 않고 다가오는 족족 팔을 휘둘러 접근을 저지했다.
그럴수록 토끼들은 새하얀 연기와 함께 2배로 늘어나길 반복했다.
열차 내부가 부드러운 솜뭉치들로 바글거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상대도 이래선 끝이 없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어차피 토끼는 아무런 위해를 주지 못하고 건드릴수록 숫자만 늘어나는 귀찮은 요소.
여기에 신경을 쓰기보단 나를 직접 처리하는 편이 훨씬 편한 선택지란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런 흐름 정도는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기에 먼저 선수를 쳤다.
퐁! 하는 귀여운 소리와 함께 나 역시 열차 안에 우글거리는 새하얀 토끼 중 하나로 변신했다.
“···쯧.”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불쾌함을 드러낸 상대가 야수의 팔을 휘둘러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장소 근처의 토끼들을 학살했다.
연기가 피어나며 엄청나게 증식된 토끼들.
처음에는 우스운 수준이었겠지만 공격이 이어질수록 토끼들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쯤 되면 단순히 귀엽게 볼 정도가 아니었다. 열차 내부를 가득 채우다 못해 자기들끼리 산을 쌓을 만큼 바글거리는 토끼들은 징그럽다는 인상을 느낄 수준이었다.
차라리 처음 한 마리만 있을 때 무시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만 지금 와서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일.
그러나 이런 장난질 따위 번거롭고 신경 쓰일 뿐 상대에게 직접적인 데미지를 입힐 만한 위협적인 공격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면의 사내는 방심하지 않고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이 전부 나에게 쓰러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토끼 무리 사이에 내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있으니 언제 갑자기 튀어나와 기습할지 몰라 더더욱 경계하고 있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협회에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을 버는 것뿐.
그러니 상대가 먼저 대응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해서 토끼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질질 끌 작정이었다.
“···과연.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가?”
하지만 상대는 내 의도를 빠르게 간파해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마력을 폭발적으로 끌어모아 한번에 방출하여 열차 칸 내부의 모든 범위에 어둠을 거칠게 방출해냈다.
이건 토끼들 사이에 숨어 있는다고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나는 즉시 위장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붉은 손수건을 키워 어둠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공격은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열차 내의 토끼들은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환상에 가까운 마술로 내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즉 다른 마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순간 토끼는 전부 사라져버리고 만다.
“꽤 재미있는 장난질이긴 하지만 이게 다라면 실망이군.”
땅에서부터 솟아오른 어둠의 가시가 열차 바닥을 헤집으며 내게로 맹렬히 다가왔다.
그 공격을 피하려고 옆으로 구른 순간 천장에서 구멍이 생기며 짐승의 다리가 나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커억!!”
아찔한 고통에 순간 정신이 희미해졌다.
상대는 한 치의 자비도 없이 내가 무력화된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림자 같은 불길한 형체가 공중을 날아와 나를 덮치더니 그대로 내 몸을 속박해왔다.
몸이 끊어질 듯한 압력이 짓누르며 자리에 볼품없이 쓰러진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새까만 가시가 이번에는 목표를 놓치지 않고 확실히 꿰뚫어버린다.
“으아악···!!!”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지르자 가면의 사내는 승리를 확신한 듯 무뚝뚝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멈춰.”
그때 엘디나가 어느샌가 앞으로 나와 상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면의 사내는 그녀를 즉시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고 잠시 멈춰서서 눈앞의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로군. 대장이 찾는 열쇠가.”
“내가 필요한 거라면 따라가 줄게. 그러니까 이제 멈춰.”
“흠. 순순히 협조해준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네가 죽으면 곤란해지니까.”
엘디나가 벌어준 잠깐의 시간.
그녀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 같지만 그딴 결말 내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조커는 최대한 아끼고 싶었지만···.
지금은 쓸 수밖에 없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말에 감기에 걸려버려서 조금 쉬고 만 거에용…
다들 뮹뮹처럼 아프지 말고 환절기 감기 조심하는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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