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8
열차가 도착했음에도 레이븐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처음엔 그의 어깨를 흔들어보고 말을 걸어보며 깨워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잠들어버린 건지 좀처럼 눈을 뜰 기색이 없었기에 엘디나는 갈등했다.
이대로 일어날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하나?
아니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게다가 협회까지 바로 코앞인데 여기서 멈춰있는 건 시간 낭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저 가면의 사내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신성력을 되찾아 이터나도 구출해야만 한다.
엘디나는 결단을 내리고서 기절한 레이븐을 억지로 일으켜 함께 열차를 나서기로 했다.
물론 지금의 그녀는 아무 힘도 없는 평범한 인간 여성과 다를 바 없었기에 축 늘어진 성인 남자를 끌고 이동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기세 좋게 업어서 이동하고 싶지만 현실은 땅을 질질 끌며 상반신만 붙잡고 한 걸음씩 내딛는 정도가 한계였다.
괜찮다. 어차피 열차가 멈춰 선 정류장에서 협회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짧은 거리니까.
게다가 레이븐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은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괜히 자신이 앞을 가로막은 탓에 그가 무리해서 상대를 쓰러트린 것이다.
“···미안해. 항상 힘들게 만들어서.”
가끔 지난날들을 후회하기도 했었다. 만약 그 숲속의 오두막에서 자신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순박한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마음껏 누리고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텐데.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내봤자 레이븐은 되레 자신에게 화를 내겠지.
그런 얘기하지 말라며. 자기는 두 사람을 만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확신한다.
소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바보처럼 상냥하고 답답할 만큼 애처로운 사람.
영겁에 달하는 세월을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버티면서 모든 걸 계획하고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한 소녀가 힘들어하자 망설임 없이 그간의 노력을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려 한다.
얼마나 아둔하고 멍청한가.
그렇기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완벽함에 가장 가까운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하면서도 고결한 의지.
아마 그 인간을 초월한 정신이야말로 레이븐이 지닌 불확정성의 근원.
운명을 거스르고 깨부수는 힘.
생각하면 할수록 반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자들조차 그에게 단단히 홀려버린 것도 이해가 간다.
경쟁자들을 배척하고 혼자서 그를 독점할 생각은 없다.
예전부터 늘 하렘을 연호했던 자신이 인제 와서 독점욕을 드러내봤자 내로남불에 불과할 테니까.
그 대신 정실 자리만은 그녀의 것이다.
이건 다른 누구에게도 절대 양보해줄 수 없다.
자신이야말로 레이븐과 가장 오래전부터 함께 해오며 가장 많은 추억을 쌓았다.
오두막에서 소년과 처음 마주한 건 동생인 이터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거기가 시작 지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가 쌓아 올린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정해진 단방향의 흐름이 아니다.
마치 하나의 끈처럼 모든 사건이 이어져 있어 시작과 끝의 지점을 정하는 건 주인 마음이다.
그리고 레이븐은 처음을 자신과의 만남으로 정했다.
그러니 오두막의 이야기보다 무덤에서의 첫 만남이 더 먼저 일어난 진정한 시작 지점이다.
억지라고 말해도 좋다.
엘디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레이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런 시답잖은 생각 따위 모든 게 끝나고 나서 실컷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지금은 일단 운명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정말로 끝이 머지않았다. 자신의 힘을 되찾기만 하면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샌가 협회의 입구 앞까지 도착했다.
커다랗고 웅장한 황금빛 정문.
그녀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단 사실에 기뻐하며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화려한 1층 홀 중앙에 누군가가 엘디나를 맞이해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너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맞닥뜨리자 엘디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해나갔다.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노려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네가···.”
“그래. 내가 바로 그대들을 붙잡으라 명령했던 드라칸의 리더다.”
베일에 꽁꽁 감춰있던 리더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여신인 엘디나조차 전혀 몰랐으며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레이븐이 쌓아 올린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잠깐 등장할 뿐인 특이한 아군 포지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설마 브리튼 왕실의 후계자. 동시에 운명의 여신의 사도인 빅토리아 공주가 흑막이었을 줄은···.
돌이켜보면 복선은 의외로 많이 있었다.
공주에 불과한 그녀가 수상할 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던가.
어째서인지 왕실에 잠입한 괴도에게 친근한 태도로 협력해오는 것도 이상했으며.
분명 사도가 등장하리라 예상했는데 갑자기 드라칸이 습격해온 일도 그렇다.
무엇보다 왕실의 성씨인 펜드래곤이라는 어원부터가 드래곤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운명을 깨트리려는 괴도의 앞에 나타난 운명의 여신을 섬기는 공주.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는 건가? 그래서 레이븐한테 접근했던 거냐?”
엘디나가 날카로운 눈동자로 묻자 빅토리아 공주는 가볍게 쿡쿡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나 역시 그대들과 다르지 않아. 운명의 여신이라 불리고 있지만 결국 수레바퀴를 내 뜻대로 굴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역할은 단지 망가진 부분을 고치는 수리공에 불과해.”
공주의 대답은 한낱 인간이 뻔뻔하게 떠들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엘디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인간의 몸을 빌렸을 뿐인 자신과 똑같은 격을 갖춘 여신이란 사실을.
신이라고 해서 모두와 친밀하게 교류를 쌓아나가는 건 아니다.
게다가 운명의 여신은 신들 가운데서도 유독 별나고 특이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의 신조차도 운명의 수레바퀴에 묶일 수밖에 없는 법칙 아래 존재. 그렇기에 운명을 관장하는 그녀를 꺼림칙하게 느끼며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땅에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도 오늘에서야 처음 깨달았다.
과거 크로였던 시절 공주를 마주쳤을 때도 운명의 사도라는 고백을 듣고 꽤 놀랐을 뿐 설마 여신 본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운명의 여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능숙하게 위장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땅에 줄곧 내려와 시간을 보냈다고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어째서 신의 계율마저 깨트리고 땅에 내려왔을까 이유를 추측해보면 답은 의외로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운명을 뒤틀어버리는 존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변수.
수레바퀴의 수리공인 그녀에게 레이븐만큼 위협적인 존재는 없던 것이다.
“···레이븐을 어쩔 생각이지?”
엘디나가 괴도를 자신의 뒤에 숨긴 채 경계심을 담아 노려보자 빅토리아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이 몸은 딱히 그대의 연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그것참 믿음직스러운 대답이군.”
“믿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 사실이다.”
공주는 오해를 풀고 싶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물론 그 남자가 운명을 비틀 수 있는 변수임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운명의 여신이 할 소리 같진 않은데.”
“아니. 오히려 이 몸이기에 할 수 있는 얘기이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사실 정교한 시계 장치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비유하자면 살아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에 가깝지.”
갑자기 시작된 장황한 설명에 엘디나는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구태여 공주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이상 적대하지 않는 상대에게 먼저 싸움을 걸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뒤로 미루어두었지만 협회 건물 안에 저 여자가 있다는 건 평범한 흐름이 아니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샤론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작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
신성력을 되찾지 않고선 눈앞의 적과 싸워봤자 필패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선 최대한 시간이 끌며 샤론이 돌아오거나 레이븐이 깨어날 때까지 버텨야만 한다.
그녀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빅토리아 공주는 꿋꿋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운명은 너무나도 견고하지만 그렇기에 지나치게 정적이다. 말하자면 고여있는 호수와도 같지. 얼핏 보기엔 아름다울지 모르나 흐르지 않는 물은 언제 썩어버릴지 모르는 법.”
“···그래서 불확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건가?”
“정확하다. 쉽게 말해 그 남자는 처음부터 운명의 자정 작용을 위해 준비된 존재. 최소한의 변수를 일으켜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할에 불과했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뭘 얘기하고 싶은지 짐작이 갔다.
이터나와 엘디나. 두 명의 자매 여신이 소년과 접촉하며 모든 게 틀어진 것이다.
본래라면 가능성으로만 끝났어야 할 소년의 불확정성이 막대한 신성력과 어우러지며 수레바퀴 전체를 뒤흔들 만한 엄청난 변수 덩어리로 커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결론은 뭐지?”
“간단하다. 지금은 운명이 너무 심하게 뒤틀려버렸어. 기존의 이야기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산으로 가버리고 말았지. 이 너머에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는 이제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녀는 오히려 이 상황이 너무나 즐거워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 내가 운명의 여신으로서 감히 그를 시험하겠다. 과연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열어나갈 자격이 있는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제로콜라 뮹뮹~
포카칩 뮹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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