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좋아.
재단을 설립하고 곧바로 은행에 들러 계좌도 개설했다.
우선 계획의 첫 단계는 무사히 성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부터 <뤼팽 재단>은 본격적으로 자선 사업에 뛰어들 것이다. 이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문 앞에 돈 봉투를 두고 떠나는 방법도 버릴 생각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확실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하면 괴도 레이븐이 기부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겠지. 하지만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막말로 착한 이미지 만들려고 괴도가 된 것도 아니니까.
[기부할 곳은 정해두었느냐?]
‘물론이죠. 처음부터 생각해뒀어요.’
재단을 설립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가장 먼저 기부할 곳은 점찍어 두었다.
나는 분장을 지우지 않고 뤼팽의 모습으로 목적지에 향했다.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여신님은 내 결정에 완벽히 납득했다.
[과연.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구나.]
‘그렇죠.’
애초에 내가 재단을 설립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고아원의 돈을 뜯어 가는 공무원들의 횡포를 보고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뤼팽 재단이 처음 기부할 단체는 이 고아원이어야만 했다.
괴도가 훔친 돈이 아니라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신사가 베푸는 합법적인 기부금.
이걸 국세청이 무슨 명목으로 뜯어가겠어.
당당한 걸음걸이로 문을 열고 고아원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중년 신사의 등장에 경계심을 보이는 아이들. 괜히 호들갑을 떨어봤자 애들이 겁만 먹을 게 뻔하니 간단히 눈인사만 슬쩍 하며 곧바로 원장실로 향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문이 열리며 원장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십니까?”
“잠시 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소만.”
원장은 내 모습을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원장실 안쪽으로 안내해주었다.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 눈으로 담았던 익숙한 풍경.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천장에서 남몰래 훔쳐봤었다는 거일까. 지금은 손님으로서 당당히 자리에 앉아 대접을 받고 있지만.
“아이들이 귀엽더군요.”
“하하. 가장 기쁜 칭찬이네요.”
저번에 교회에 기부하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기부할 대상을 정하는 기준은 바로 원작의 등장 여부라고.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원작에서 나왔던 적이 있기에 원장님이 착하다고 확신하고 기부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스터 테리시아처럼 원작 비중이 크지는 않다.
오히려 엑스트라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은 비중의 단역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중이 작은 대신 임팩트가 엄청났다. 그래서 이곳을 교회보다 먼저 떠올리고 기부를 선택했던 거다. 그 임팩트라는 게 좋지 않은 방향이라는 게 문제지만.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고아원은 작중 빌런의 희생양이 된다. 소년 만화치고 세계관이 꽤 암울한 원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덕분에 전개에 대한 비판도 꽤 많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 보니 호평하는 독자도 여럿 있었다.
어쨌든 이 노인은 명백한 선인이다.
그러니까 기부한다고 해서 돈을 이상한 곳에 써먹을 인물은 아니었다. 모두 아이들에게 돌아간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빌런의 테러야 내가 어찌어찌 잘 막으면 되겠지.
원작의 정보를 알고 있으니 그걸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결론 끝에 나는 본론부터 얘기했다.
“저희 뤼팽 재단은 이 고아원에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뤼팽 재단이요?”
“예. 이번에 새롭게 설립된 자선·구호 재단입니다.”
긴 얘기는 필요없다. 들고 왔던 검은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약소하나마 준비한 기부금입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열어봐도 되겠냐는 듯한 눈빛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돈의 액수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는 원장님.
리액션이 찰지네.
후원하는 맛이 있는데?
“액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건 좋은 일이군요.”
“왜 이만한 거금을···?”
나는 일부러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뤼팽 재단은 자금이 많거든요.”
설령 돈이 부족해져도 훔치면 된다. 이 얼마나 완벽한 방법인가.
절도가 명백한 범죄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보다 좋은 해법은 없을 것이다.
“제 말은 그 자금을 왜 저희 같은 별 볼 일 없는 고아원에 투자하시는 거냐는 뜻입니다.”
생각 외로 원장님은 꽤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얼마 전에 국세청에 돈을 뜯기면서 경계심이 올라간 걸지도.
“저희 고아원에 방문한 것도 초면이실 텐데 왜 하필 저희 고아원을 선택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문도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곳 외에도 브리타니아엔 다양한 고아원이 있는데 왜 하필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이곳이냐.
사실 이유야 매우 간단했다.
“며칠 전에 실린 기사를 봤습니다. 요즘 화제인 괴도가 선택했던 고아원이 바로 이곳이더군요.”
“그건···.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괴도의 기부금을 전부 압수하고 그 돈을 괴도가 직접 금고를 털어 훔쳤죠.”
노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당연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겠지.
특히 담당했던 공무원 녀석은 상당히 악질적인 녀석인 듯했으니까.
“즉 이곳은 현재 시선이 집중된 상태입니다.”
“시선 말입니까···?”
“네. 굳이 시민이나 언론뿐 아니라 정부와 괴도마저 이곳을 유심히 보고 있겠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원장님. 아직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그게 이유입니다.”
“···네?”
“이번에 새로 출범한 저희 뤼팽 재단에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인지도입니다. 그러니 많은 이의 시선이 이곳에 쏠린 현재 저희가 거금을 기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내 말을 듣고 원장님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약간 탐탁지 않게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최대한 자연스러운 이유를 붙이려면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 말은 즉 저희를 이용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죠. 서로 상부상조 하자는 겁니다. 이왕 기부하는 김에 서로가 이득이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내 말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건 너무 솔직하기 때문일 뿐 법적으로는 물론 윤리적으로도 딱히 문제가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원장도 그걸 깨달은 건지 약간 복잡한 표정이긴 해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미 도둑의 돈도 받은 상황에서 뭘 따지겠습니까.”
“저는 원장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설령 제가 악인이 되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저 아이들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고 싶을 뿐입니다.”
보통 지구에선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인군자라고 부른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을 지옥에 떨어트린다면 그건 오히려 신이 잘못된 게 아닐까.
어쨌든 고아원에 무사히 기부하는 것도 성공했다.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싱글벙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이후로도 정기적으로 후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원자님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모자를 눌러쓰며 대답했다.
“아르센 뤼팽입니다.”
“아르센 뤼팽···. 확실히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럼 이만.”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무사히 성공해서 다행이네요.’
[수고했다. 이제 돌아가서 쉬자꾸나.]
‘네. 그래야죠.’
막중한 프로젝트 하나를 끝낸 느낌이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푹 쉬어야지.
이 불편한 분장도 다 뜯어내 버리고 말이야. 10분 이상 착용하면 갑갑해서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내 바람은 곧바로 실현되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고개를 한참 아래로 숙여야 정수리가 보이는 꼬마 아이였다.
나와 반대로 소녀는 목이 빠지라 고개를 치켜올려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아저씨. 누구예요?”
참 당돌한 아이구나. 다른 애들은 전부 나를 경계하느라 가까이 올 생각을 못 하는데 이 아이는 겁이 없는지 대놓고 내 앞길을 막은 채 정체를 캐묻고 있다.
나는 소녀에게 대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갚아 주었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키만 커다란 수상한 아저씨.”
“······.”
너무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거 아니야?
나는 턱을 짚은 채 소녀를 유심히 관찰했다.
부스스한 주황색 단발에 초록색 눈동자. 굉장히 개성적인 특징이지만 원작에서 본 기억은 전무하다. 즉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비중이 거의 없는 엑스트라 캐릭터다.
“그래서 아저씨 누구냐니까요. 무시하시는 거예요?”
“아니. 네가 먼저 이름을 밝히면 나도 알려주마.”
눈가를 가늘게 뜨면서 나를 노려보던 소녀가 이내 ‘흥’하며 작게 콧바람을 뀌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름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나 보다.
그러면 나도 안 알려주면 그만이지.
“주디. 주디 애벗이에요.”
안 알려줄 것처럼 튕기더니 의외로 쉽게 알려주는 꼬맹이.
약속했으니만큼 나도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르센 뤼팽이다.”
“뤼팽? 되게 이상한 이름이네요.”
“너는 예쁜 이름을 가졌구나.”
이 왈가닥 소녀를 상대해주자니 끝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대충 이름을 칭찬해주며 나오라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윽.”
“다음에 다시 보자. 주디.”
꼬마의 샐쭉한 눈빛을 뒤로 한 채 고아원을 빠져나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물론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밤이 오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또 괴도 레이븐으로 활동할 시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수상할 정도로 키가 큰 아저씨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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