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5
천천히 잠에서 깨어난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가슴 깊이 안도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선택한 세상.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고 살아갈 내 진정한 현실.
“레이븐! 괜찮아!?”
다급하게 내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엘디나.
아카데미 교복이 아닌 검은 드레스 차림.
위엄이라곤 한 줌도 서려 있지 않은 평범한 말투.
거기에 크로가 아니라 레이븐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그 사소한 요소들은 전부 내가 무슨 세상을 골랐는지 알려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래. 나는 원래의 삶을 선택했다.
더 바라는 게 없을 만큼 완벽한 이상향의 세계를 두고서 기존의 흠집으로 가득하며 눈앞의 미래조차 불명확한 이 세상을 골랐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고민했다.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기 10초 전까지도 내 머릿속에선 치열하게 두 가능성이 맞붙었었다.
특히 율리아가 미술실에서의 추억을 떠올려냈다는 사실이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세계는 겉보기엔 독립되어 보이지만 사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결된 하나의 세상이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건 힘들지 몰라도 모두 다 마음 한구석에선 원래 세상에서의 추억을 확실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상향의 세계는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포근하면서 행복한 이곳에서 평생 머물고 싶다는 소망을 바라게 될 만큼 아름다운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 끝에 그 세계를 저버리고 이곳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유는 마찬가지였다.
율리아가 이 세계에서의 추억을 떠올려냈다.
즉 두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보았던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도 이곳에서 충분히 재현해낼 수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모두와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나갈 미래.
반대편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곳은 처음부터 완성되어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이곳은 비록 지금 당장은 그리 아름답지 못할 수 있어도 우리가 노력해 앞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둘 중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고민하고 선택하면 될 뿐이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자랑 대화하더니 갑자기 픽 쓰러졌다가···.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일어서버리고.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엘디나는 내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보다도 나는 반대편 세상에서 머물던 동안 이곳에서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서 있던 운명의 여신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시험은 어땠는가?”
“아아. 살면서 쳐본 그 어떤 시험보다 제일 어려웠지. 참 더럽게도 감사하고 있어.”
“후후. 별말씀을.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태도에 헛웃음을 흘리고선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선택하고 난 뒤 반대편 세상은 어떻게 됐어?”
일부러 한 차례 뜸을 들이고서 여신이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알고 싶나? 이 몸의 대답을 듣고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나?”
“후회하지 않아.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해봤자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대답을 듣고 나서 뒤늦게 후회할지도 몰라.”
그럴 거라면 차라리 듣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는 편이 훨씬 깔끔하겠지.
어차피 내가 어떻게 느끼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설령 그 세상에서 크로가 갑자기 사라져버려 모두 다 슬픔에 잠겨있다고 해도 그걸 내가 알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이 알려주는 사실일지 거짓일지도 모르는 얘기를 믿는 수밖에 없다.
후회하지 않겠다.
후회한다는 건 최선을 다해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반대편 세상을 외면하지도 않겠어.
그 세계는 이곳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살아 숨 쉬며 추억을 쌓아가던 진짜 세계.
그렇기에 나는 운명의 여신에게 부탁했다.
“알려줘. 그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는 내 눈빛을 지그시 살피더니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가 경험한 세계는 이 몸이 만들어낸 달콤한 꿈에 불과했다. 그러니 꿈에서 깨어난 순간 당연히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래?”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난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불과 바로 직전까지 내가 생생히 살아 숨 쉬던 그 세상은 절대 꾸며낼 수 있는 가짜 따위가 아니었다.
이미 나는 엘디나가 만들어낸 가짜 지구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이틀 동안 지냈던 이상향의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진실한 삶이었다고.
하지만 여신이 말한 대로 돌아갈 수 없는 이상 한순간의 꿈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비슷한 내용의 꿈을 꾸게 될지는 몰라도 똑같은 꿈을 연이어서 꾸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대답을 듣고 난 지금의 그대는 후회하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살겠다는 선택을 후회하나? 아니면 내게서 반대편 세상에 관해 물어본 걸 후회하나?”
여신은 재밌다는 듯이 눈꼬리를 고이 접으면서 내게 물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의외로 막힘없이 즉시 튀어나왔다.
“아니. 후회하지 않아.”
“호오. 정말인가? 애써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다시 한번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까지 확실하게 대답했다.
“후회할 리 없잖아. 최선을 다해 고민한 선택의 결과니까.”
지금부터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이미 포기해버린 반대편 세상이 아니라 지금부터 살아갈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다.
반대편 세상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그 세상을 버리고 선택한 지금의 인생을 더욱더 소중히 여겨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그대는 놀랍다! 설마 이렇게까지 내 기대 이상의 ‘선택’을 내리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품위조차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양팔을 활짝 펼쳐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면서 외친다.
“운명을 거스르는 위대한 힘을 지닌 소년이여! 그대는 이 몸이 내린 최후의 시련을 멋지게 돌파했다!!”
불확정성의 능력이 지닌 의의는 무엇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해 깊이 고민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희미하게나마 정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이 내린 선택에 확신을 품길 두려워하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발걸음을 망설인다.
그건 설령 위대한 신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는 자연스레 뒤를 살피게 된다.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이 올바른지 확신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앞서 걸어간 길을 안전하게 뒤따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뜻 보기엔 합리적인 선택 같아 보여도 결국 그렇게 걸어가는 길은 남들이 먼저 도달했던 결과를 똑같이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운명. 태초부터 이 세상을 지배해왔던 법칙의 존재.
이미 정해진 결말. 예정된 도착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운명의 수레바퀴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로부터 비롯된다.
불확정성이란 후회하지 않는 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모두 받아들이며 인정할 수 있는 능력.
누구에게나 운명을 거스를 ‘가능성’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운명에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체념하며 받아들여 버린다.
자신이 운명을 깨부술 수 있는 길 앞에 서 있으면서도 정말 이쪽으로 나아가도 될지 망설이다 결국 앞사람이 닦아놓은 안전한 길로 걸어가길 택한다.
그런 행동을 잘못이라고 속 편히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조차도 내가 걸어왔던 길에 대해 끝없이 망설이고 후회해왔다.
줄리엣을 비롯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며 후회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로 올바른 선택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줄리엣을 고통 속에 내버려 둔 이유는 미래의 그녀가 스스로 그 계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길을 걷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다.
줄리엣도 함께 걷고 있었다. 설령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괜찮다며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혼자서 멋대로 후회하고 반성하며 길을 되돌아왔다.
나와 함께 길을 걷던 사람들도 모두 내 독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길을 빙 둘러오게 되었다.
무엇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그때 내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건지는 사실 지금도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운명은 존재하지만 그건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걸었을 때만 나오는 도착지다.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길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장소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선택하는 것.
그렇게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운명은 부수어지며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이상향’에 도달하게 되겠지.
“부디 즐거운 마지막 여행이 되기를.”
운명의 여신은 우아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선 서서히 사라져갔다.
희미해지는 그녀의 몸 뒤편으로 어느샌가 허공에 생겨난 하나의 문.
나는 멍하니 서 있던 엘디나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가자. 이터나를 만나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뮹뮹의 개똥철학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그냥 재미로 봐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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