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6
운명의 여신이 내린 시련을 통과한 이상 신들이 우리를 방해해올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운명을 담당하는 신이 우리의 선택을 용납한 것이다.
운명에 거스를 수 없는 다른 신들이 아무리 불만을 품어봐야 그저 지켜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정말로 모두 끝난 거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의 이터나를 이끌고서 활짝 열린 문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나는 이제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선택한 지금의 세상에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것이다.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침내 문 너머로 한 발자국 내딛자 세상이 일변하며 늘 상상만 해오던 공간이 현실로 펼쳐졌다.
“여기가···.”
순백의 신전.
이터나가 몇천 년 동안 줄곧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장소.
이곳은 아주 오래전 내가 크로였던 시절 이터나와 짧게 대화를 나눌 때 봤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는 이터나와의 추억을 떠올리지도 못해서 그녀가 날 그토록 아련하게 대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당시의 내게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었다.
또한 언니인 엘디나를 향한 적대감 역시 숨기지 않고 드러냈었다.
물론 지금은 당시와 전혀 다른 미래로 나아가버렸으니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과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나는 운명을 바꿔 예정된 미래를 부수어버렸다.
그 말은 즉 기존의 추억이 전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과 똑같다.
즉 어떤 의미로는 원래의 세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야 최선을 다해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선택한 세상이니까.
원래의 세상을 버렸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앞으로를 지금보다 더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이터나.”
엘디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저 멀리 보이는 새하얀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가만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던 이터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미소 지어 화답했다.
“어서 와. 두 사람 모두.”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 와락 끌어안는 언니.
그 품에 쏙 안겨 언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동생.
두 자매의 재회를 지켜보며 나는 아련한 감정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과거 창밖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과 비슷하게 두 사람이 재회하던 광경을 엿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동생은 천년 만에 만난 언니를 반갑게 맞이해주었지만 언니는 앞으로 동생을 배신해야 한다는 선택지 탓에 마음이 심란하여 제대로 기쁨을 표현하지조차 못했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오긴 했으나 결국 그날의 사건이 있었기에 현재의 재회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이미 지나온 길을 자꾸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미련을 갖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과거의 잘못을 깔끔히 인정하고 받아들인 다음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가까이 다가가서 이터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많이 변했구나.”
“그러게.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먼 옛날 숲속에서 처음 보는 여인에게 어찌할 줄 몰라 쭈뼛거리던 순박한 시골 소년.
그 시절의 나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확실히 오랜 시간이 흐르며 그때의 모습은 거의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나는 순박하고 어리숙한 소년이 아니라 잔꾀에 능통하고 약삭빠른 괴도였다.
이름조차 잊혀진 전생의 소년은 그 뒤로 끝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오며 이젠 레이븐이라는 이름만을 남겨두었다.
“아니. 더 남자답고 멋있어졌는걸. 또 한 번 반해버렸어.”
이터나가 능글맞게 속삭이며 내 가슴팍에 이마를 살짝 기대어왔다.
내가 변한 것처럼 그녀 역시도 이곳에 오랫동안 갇혀 지내며 적잖이 변화한 듯했다.
나쁜 의미로 달라졌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를 내려놓음으로써 전보다 훨씬 홀가분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난 수천 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양이의 눈을 통해 지상을 구경하는 것뿐이었어.”
하양이는 내게 시간의 힘을 모두 넘겨준 대가로 신성력마저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 오퍼레이터가 폭주해 지하 연구소를 습격한 하양이를 제압하여 거울 세계에 가두어두었다는 연락이 왔었다. 정확히는 보호를 위한 통제에 가까웠다.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현재 거울 세계에 갇혀있는 건 하양이가 지니고 있던 힘의 파편에 가깝다.
하양이의 실체는 지금도 바깥 현실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오퍼레이터가 신성력을 완전히 회수해버려 평범한 여우로 돌아가 버리긴 했지만.
아주 먼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는 그렇게 여우가 된 하양이와 어느 숲속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과거와 미래의 사건들이 뒤죽박죽 섞여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원작의 이야기로 따졌을 때 극초반부에서 스쳐 지나가듯 조우했던 것 같다.
“전부 지켜봤어. 레이븐이 지금까지 얼마나 최선을 다해왔는지.”
나를 쭉 지켜보겠다던 기억 속 이터나의 말이 겹쳐서 들려왔다.
“후후.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 엔딩인 거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장난스레 얘기하는 엘디나.
그 목소리가 어떤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더라도 끝까지 함께 가겠다던 기억 속 여신님의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은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당시의 발언과 연결되는 말을 꺼낸다.
율리아가 미술관의 추억을 무의식중에 간직하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이어져 있다.
마치 운명의 여신이 보여준 세상이 전혀 다른 별세계인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니 원래 세상과 이어져 있던 것처럼.
독립된 에피소드만 보았을 땐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만큼 뜬금없는 이야기도 다른 조각을 찾아 이어붙이면 하나의 큰 줄기가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한 가지.
“응. 우리가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은 의미가 있어.”
설령 운명이 뒤바뀌고 과거가 없었던 것이 되며 모두가 추억을 기억해내지 못할지라도.
그 모든 이야기에는 찬사를 던질 만큼의 숭고한 가치가 깃들어 있다.
나 혼자서 쌓아나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해 걸어온 길.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누구도 도달한 적 없던 운명의 수레바퀴에도 쓰여있지 않았던 미지의 가능성.
나는 이 순간 선언한다.
마침내 괴도는 운명을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어느샌가 다시 어둑해진 밤.
이곳은 구름 위에 지어진 신들의 신전이었기에 하늘 위를 가득 수놓은 별빛은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선명하게 떠오른 보름달의 달빛은 은은한 조명이 되어 우리를 무대의 주인공처럼 비춰주고 있었다.
그때 터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생각한다면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샌들과 아무 장식 없이 새하얀 천으로만 이루어진 복장.
하지만 그 깊은 눈매에 담긴 황금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노인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고요하게 날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에 주춤하자 엘디나가 딱딱한 표정으로 내 앞을 지키듯 막아주었다.
어느샌가 힘을 되찾은 것인지 엘디나에게서도 강대한 신성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찬란한 태양신께서 이런 한밤중에 무슨 볼일이신지요?”
“허허. 오랜만에 하늘에 밤의 시간이 되돌아온 것 같아서 확인하러 왔다네.”
저 남자가 바로 태양신인가···?
이 세상을 신의 시대로 회귀시키려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존재.
또한 신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주신으로 인정받는 존재.
“진정하게나. 운명의 여신이 인정한 이상 나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으니.”
“···그럼 순순히 발길을 돌려 떠나주시면 좋겠네요.”
이터나 역시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으며 앞으로 나서자 태양신은 머쓱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미움 받고 있는 것 같군.”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터나를 순백의 신전에 유배시키고 엘디나를 붙잡아 신성을 산산 조각내어 아스러진 신전에 봉인시킨 것도 전부 태양신의 주도 아래 벌어진 일이니까.
“물론 자네들에겐 내가 악역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이해해주게. 이 세상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서 이번에도 저희를 막겠다는 건가요?”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잖는가. 운명의 여신이 받아들인 이상 나로서도 방법은 없다네. 아무리 주신이라 인정받는 나라고 해도 다른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으니까.”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어 모두 경계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던 와중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너무 위험해. 한 인간의 손에 세상이 이만큼 뒤틀려버리면 전체 균형이 무너져 세계가 멸망할지도 몰라. 단순히 운명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린다네.”
그 장황한 설명 끝에 태양신은 시선을 돌려 그녀들 뒤에 서 있던 나를 정확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니 제안하겠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운명을 깨부순 자여. 그 위업을 칭송받아 신으로 거듭나지 않겠는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제 곧인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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