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8
태양신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한 뒤 하늘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를 하늘 위에서 다시 만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평생 지상에 내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네.”
그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운명의 여신은 피식 웃으면서 차를 홀짝였다.
“하나의 이야기가 깔끔하게 끝맺었으니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 것뿐이다.”
“허허. 참 기묘한 취미로군. 그래. 그대는 언제나 ‘이야기’라는 것에 집착했었지.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어땠는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최고였어. 여태껏 읽어온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즐거웠었지.”
“호오. 그야말로 극찬이로군.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나?”
이번에는 잠시 텀을 두며 이야기를 한 차례 속으로 곱씹어 떠올린 운명의 여신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새겨 넣었다.
“한 소년이 여신과 만나 괴도로서 활동하다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사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기억 속에 선명히 자리 잡은 괴도의 눈빛을 떠올려냈다.
“사랑을 깨닫고 괴도라는 이름을 버리면서까지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마침내 운명을 깨부수고 원하는 미래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 신이 될 기회마저 붙잡았다.”
“음. 확실히 그 마지막 마무리는 고대 신화의 영웅담과 비견해도 손색없는 수준이긴 하다만···.”
태양신은 여신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말끝을 애매하게 흐렸다.
“결국 그는 신의 성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신화가 될 수 없지 않겠나.”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었기에 레이븐이 제안을 거절했을 때 태양신은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멍청한 선택이 어디 있을까.
인간을 무시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신과 인간의 격차는 하늘과 땅이나 다름없다. 한낱 날벌레가 인간이 되는 것보다도 기적적인 사건이다.
날벌레와 인간은 땅에서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필멸적 존재이지만 신으로 거듭나는 순간 그 존재는 불멸성을 가지게 된다.
무엇보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레이븐이 신이 되지 않는다면 운명의 비틀림을 안정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구 치솟은 인과율을 서둘러 바로잡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 우주가 멸망해버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는 자매 여신들과도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동등한 신격으로서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왜 일부러 마다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태양신은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반면 운명의 여신은 이 상황 자체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그치지 않고 대꾸하였다.
“바로 그거다. 가장 멋지게 끝날 수 있던 해피 엔딩을 시원하게 차버렸기 때문에 비로소 이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빛날 수 있는 거다.”
달아오른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살짝 움찔한 여신은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간신히 진정을 되찾고 얘기를 이어갔다.
“그는 신이 되기보다 괴도로서 남기를 선택했다. 깔끔한 끝맺음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이야기를 더 이끌어가려 하는 것이다!”
“난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네. 괴도로 활동하고 싶다면 일단 신의 성좌를 받은 다음에 그대처럼 인간으로서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신의 자리를 거부하느냐는 말일세.”
쉽게 납득하지 못한 태양신이 반론을 제기하자 여신은 깔깔 웃으면서 단 한마디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할 만큼 간단명료하게 외쳤다.
“그게 낭만이니까!!”
신전의 정원에서 그녀의 외침에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진다.
순간 말문이 틀어막혔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태양신은 이윽고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나로선 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군···. 뭐가 됐든 제안은 아직 유효하니 그가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 부탁하는 수밖에. 질리도록 얘기를 꺼내면 죽기 직전에는 받아주지 않겠나?”
“글쎄다. 아무튼 이 몸과는 상관없는 일 같으니 열심히 해보게.”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고 그대도 도와주게나···. 자매 여신들도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최대한 설득해봐야겠군.”
그 뒤로도 신전 정원에는 한동안 턱을 짚은 채 고민하는 태양신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홍차를 홀짝이는 운명의 여신 간의 기묘한 다과회가 이어졌다.
***
“아. 여기구나.”
율리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쌀쌀한 날씨의 밤.
하지만 앞으로 한 달만 지나면 추위도 물러나고 새싹이 피어나는 봄의 계절이 돌아오겠지.
봄은 곧 새로운 시작의 계절.
그 의미에 걸맞게 그녀 역시 다음 달이면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리라.
곧 있으면 아카데미 입학식이 열리게 된다.
그레이스 가문의 유일한 영애인 그녀는 꿈을 좇아 마법사가 되고자 지금껏 열심히 달려왔다.
아카데미 입학은 어떤 의미로선 여태껏 소녀를 속박하던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가문의 굴레나 귀족으로서의 책무 등을 집어 던지고 평범한 학생으로서 친구와 함께 청춘의 즐거운 추억을 잔뜩 쌓아나갈 것이다.
그 일환으로써 율리아는 본가에서 독립하여 런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평생 즐겨본 적 없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 소녀는 늦은 저녁에도 불구하고 굳이 밖으로 외출해 이곳을 찾아왔다.
브리타니아 국립 미술관.
평소 그림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이곳은 늘 꿈만 꿔오던 장소 중 하나.
그렇기에 들뜬 마음을 안고서 율리아는 관람료를 낸 뒤 미술관에 입장했다.
“우와···.”
책으로만 보았던 미술품을 실제로 감상할 수 있다는 건 기대한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율리아는 환한 표정으로 이 순간을 있는 힘껏 즐겼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녀도 잘 알지 못하는 작품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작품을 눈에 담으며 무슨 뜻을 담고 있을지 탐구하는 것도 빼먹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기묘한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마치 자신을 현혹하는 듯한 작품의 마성에 이끌려 율리아는 멍하니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엔 다소 음울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것 같으면서도 어째선지 마음을 안심시키게 해줌과 동시에 빛바랜 추억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오묘함.
자세히 볼수록 시시각각 달라지는 감정. 그 깊고 복잡한 마음을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소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어째선지 갑자기 눈물이 흘러버릴 것만 같아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멈춰서서는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옆에 선 소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 위 반짝이는 등대를 그린 거래. 몽환적이지 않아?”
데자뷰가 느껴지는 감상평과 함께 상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녀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
레이첼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뛰어난 마법적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까진 좋았다.
이 재능을 잘 살릴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어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순수하게 좋아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등록금을 구하기가 역력지 않은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선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니.
이 얼마나 지독하고 우스꽝스러운 아이러니란 말인가.
레이첼은 자신에게 닥쳐온 이 잔혹한 현실에 차마 울 수 없어 웃었다.
허탈하게 쓴웃음을 머금으며 괜히 테이블에 놓인 입학 통지서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언니는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애써 활기찬 척 밖으로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 언니는 매번 밤이 지나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귀가하고 있다.
분명 동분서주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부모 없이 두 자매끼리만 생활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언니의 직업인 하녀가 받는 봉급은 빈말로라도 많다고 하긴 어려웠다.
어떻게든 먹고 사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할 비용을 마련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입학식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도 되지 않는다.
그 시간 안에 등록금을 금방 마련하는 건 평범한 방법으론 불가능하다.
“제길···!”
괜히 자신 때문에 언니가 고생하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하는 편이 낫겠지만 그래서야 두 자매의 상황이 나아질 미래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걸까?
만약 언니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상한 놈의 저택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고민을 거듭하며 입술에 피가 날 만큼 세게 물어뜯고 있던 와중.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평소보다 일찍 언니인 레아가 귀가를 알렸다.
게다가 어째선지 굉장히 텐션이 높았다. 최근에는 등록금 문제로 애써 활기찬 척하면서도 표정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사라질 줄을 몰랐었는데.
혹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레이체엘~!! 언니 왔어! 엄청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혹시 술 마신 건 아니지?”
“헤헤. 들어 봐! 등록금 구할 방법을 찾았어!!”
뜻밖의 소식에 그녀는 놀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싹 트였다.
“갑자기 그만한 돈을 구했다고···? 무슨 사기당한 거 아니야? 모르는 아저씨가 사탕 준다고 졸졸 따라간 건 아니지!?”
“음. 일단 모르는 사람이긴 한데.”
맙소사.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사기를 당하다니.
이마를 짚으며 어지러움을 느끼던 레이첼에게 레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엄청 착한 사람이었어! 고민 상담도 먼저 들어주고 레이첼 얘기를 듣더니 장학금 지원을 해주고 싶대!”
“장학금 지원이라니···. 딱 봐도 사기잖아.”
“아니야! 정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레아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명함을 꺼내 동생에게 내밀어 보였다.
[뤼팽 복지 재단]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인데. 역시 수상해.”
레이첼이 명함을 보고서도 의심을 거두지 않자 레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팔을 허리에 대고서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히히. 그럴 줄 알고 데려왔어! 레이첼도 얘기를 직접 들으면 좋은 사람이란 거 믿게 될걸?”
“뭐!?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평소처럼 얼빵한 언니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면서도 레이첼은 겨우 분노를 삼켰다.
그래. 차라리 직접 얼굴을 맞대고서 따지는 편이 낫겠지.
순진무구한 사람을 속여먹으려는 사기꾼이 누구인지 확인이나 해볼 심정으로 레이첼은 불청객을 상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도 레이첼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뒤 말했다.
“안녕.”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화에 마지막화로 돌아올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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