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집으로 돌아와 분장을 지우고 괴도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좀 살만하네요.”
[분장한 모습도 멋있지만 역시 지금이 제일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가요?”
하긴 나도 중년의 자선 사업가보단 낭만 넘치는 괴도가 훨씬 마음에 든다.
아무튼 낮에 할 일은 전부 끝냈다.
이제부턴 괴도로서 밤의 활동을 나설 차례였다.
시간이 지나며 경험이 쌓일수록 과정도 체계적으로 변해갔다.
가장 첫 단계는 무엇이냐?
바로 목표 설정이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훔칠지 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출발인 셈이다.
이번엔 이걸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모방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훔쳐야 할 물건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마침 그 목표물에 여신님의 힘도 깃들어 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었다.
그다음 두 번째 단계는 목표 조사와 트릭 설계.
어떻게 훔쳐야 할지 목표와 주변을 꼼꼼히 살핀 뒤에 트릭을 짜는 단계였다.
“일단 밖으로 나가죠.”
당연히 이 단계에선 주변에 직접 가서 살필 필요가 있다.
괴도라는 직업이 마냥 편한 것도 아니었다. 물건 하나 훔치는 데도 이렇게 신경 써야 할 게 많다니.
[날씨가 선선하니 좋구나.]
상쾌한 밤바람을 쐬며 만족스러워하는 여신님.
지팡이 안에 있으면서도 즐길 건 다 즐기는 모습이다.
펄럭.
마법을 통해 하늘을 날며 빠른 속도로 목적지까지 이동했다.
원래라면 이런 고급 마법 사용은 꿈도 못 꿨었다. 하지만 점차 보석의 힘을 흡수하며 능력이 성장한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비행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상당한 마력 소모를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도 사용할 수 있는 게 어디겠어.
“도착했네요.”
건물 옥상에 사뿐 착지하여 앞을 바라보았다.
요란하게 반짝이는 불빛과 쿵쿵대는 소리. 건너편에서도 느껴질 만큼 소란스러운 분위기.
한밤이라기엔 너무나 시끄러운 이 장소는 바로 대형 카지노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음···.”
지금 이런 옷차림으로 대놓고 들어갈 수는 없겠지.
당당하게 ‘나 괴도 레이븐이오’ 하고 광고하는 수준이니까.
몰래 잠입하는 게 맞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아예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숨어 들어가거나 아니면 변장을 통해 손님인 척 자연스레 입장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나름의 근거와 일장일단이 있는 상황.
그러니 이왕 하는 거 낭만을 챙기기로 하며 후자를 선택했다.
원래 이럴 때는 손님인 척 위장해서 들어가는 게 국룰 클리셰인 법이지.
게다가 오늘 만든 ‘아르센 뤼팽’ 신분을 이용하기도 딱 좋은 상황이었다.
“다시 분장해야 한다는 게 조금 귀찮긴 하지만···.”
무릇 예술이란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니.
잠깐의 불편함 정도야 기꺼이 감수하기로 하였다.
“흠흠.”
분장을 끝마친 뒤 거울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완벽하군. 순식간에 중년 신사로 변모한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당당히 카지노의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가드.
“어서 오십시오. 손님.”
“환영해줘서 고맙네.”
역시 내 분장에서 어떤 위화감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일부러 최대한 고풍스러운 인상으로 변장했다 보니 이런 고급 카지노에 방문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게 비쳤으리라.
가드가 열어주는 정문 입구를 통해 카지노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와···. 미쳤네요.’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감탄사.
그런 반응이 당연할 정도로 카지노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화려한 사치와 향락으로 가득한 세상. 그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공간 전체에 흩뿌려 놓은 느낌이었다. 사방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각지에서 몰려온 손님들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실 간단한 사전 조사를 진행하면서 이보다 더한 곳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애초에 여기는 아무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가드도 드레스 코드와 신분증 정도를 확인할 뿐 들어오는 손님을 제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당히 돈 좀 있는 중산층·상류층의 놀이터인 셈이다.
진짜 국가에서 내로라하는 극소수의 최상류층은 이곳에 없다. 선택받은 자들만 즐기는 카지노는 초대장이나 추천장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언젠가는 그런 곳에도 들어갈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처럼 무언가를 훔치기 위해서든 아니면 정말로 자격을 갖추게 되었든 간에.
그것보다 지금은 조사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손님인 척 자연스럽게 카지노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하하. 이번에도 내가 이긴 것 같군.”
카지노의 근본은 무엇인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이벤트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지만 결국 카지노의 근본은 당연히 도박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사람과 하는 도박이야말로 본인의 운과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승부사들의 게임.
그런 의미에서 한 여인은 오늘도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포커 게임에 베팅했고 그 결과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여자는 머리를 붙잡다 못해 테이블에 얼굴을 내리박았다.
“으악!! 딸 수 있었는데! 이번엔 진짜 한 끗 차이였어!!”
“하하. 물론 그러시겠지. 그래서 더 할 생각이야?”
“끄응. 이젠 남은 칩이···.”
자신의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칩은 어느새 어디론가 증발한 지 오래였다.
분명 오늘은 총알을 충분히 장전하고 왔었는데 카지노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 썼단 말이야?
맞은편의 남자는 여인의 반응을 보며 동정 섞인 비웃음을 내지었다.
“이봐. 돈이 없으면 돌아가서 집안 살림이나 신경 쓰라고. 도박 중독 아내라니 정말 끔찍하군.”
“감히 누굴 아줌마로 보는 거야? 아직 파릇파릇한 아가씨라고.”
“더 최악이잖아. 당신과 결혼하려는 남자가 있기나 할까.”
여인은 이를 바득 갈면서도 상대의 무시를 받아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저런 비웃음을 당할 리도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칩이 없다면 게임을 더 이어갈 수 없다. 본래 같았으면 순순히 결과에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겠지만 오늘은 유독 미련이 짙게 남았다.
저 건방진 사내의 커다란 코를 바짝 눌러주고 싶었다. 정말로 딱 한 게임만 더 진행할 칩만 있었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의 여신이 자신에게 입맞춤해줄 텐데.
“슬슬 다음 게임 시작하게 비켜주시죠.”
“판돈이 없으면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라.”
테이블에는 그 남자와 둘만 있던 게 아니었다. 결국 다른 사람의 눈초리에 그녀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이대로 떠날 수밖에 없는 건가. 여인이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테이블을 기웃거리자 그 모습을 포착한 딜러가 생긋 웃으면서 친절하게 얘기했다.
“칩이 없으시다면 소액 대출···.”
“히익! 됐어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기겁하며 거절하는 여인.
카지노 대출이 얼마나 악명이 높은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것만은 극구 사양이었다.
카지노에 대출을 받을 바엔 차라리 다른 손님한테 빌리고 말지.
‘···잠깐. 생각보다 괜찮은데?’
도박에 완전히 눈이 먼 여인은 그 허무맹랑한 계획이 생각보다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지경에 도달해버리고 말았다.
쓸데없이 좋은 실행력으로 곧장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 그녀.
“뭐? 미쳤어?”
“헛소리하지 말고 저리 나오세요.”
“얌전히 집에나 돌아가. 이 아줌마야.”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다.
‘왜 아까부터 자꾸 아줌마라는 거야!’
그녀는 마지막에 자신을 흉본 남성을 저주하며 카지노 내부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했다.
그러다 막 입구로 들어온 한 사내를 발견하게 되었다.
정갈한 옷차림에 기품이 고고하게 새어 나오는 외모.
심지어 걷는 동작 하나에도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고 품위가 가득 느껴졌다.
나름대로 번듯한 의사라는 직업을 지닌 여인은 제법 여러 손님을 상대해봤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신사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돈통이라는 것을.
고민은 짧고 행동은 신속히.
여인은 결론을 내리자마자 즉시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상대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멀리서는 느끼지 못했던 묵직한 위압감이 은은하게 자신을 짓눌렀다.
그녀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뒤에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멋진 신사분. 혹시 이름이 어떻게···.”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게.”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퇴짜를 맞은 여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제가 무슨 얘기를 꺼내실 줄 알고···.”
“아까 들어오면서 봤거든. 자네가 이곳저곳 구걸하는 모습을.”
“······.”
그 거리에서 모두 목격했다고?
무슨 까마귀라도 되나.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절로 나온 여인은 깔끔하게 포기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됐다 됐어! 내가 앞으로 한 번만 더 카지노에 기웃거리면 사람이 아니다!”
“돈을 전부 잃은 모양이군.”
“그러면 어쩌려고요. 제가 잃은 돈을 찾아주기라도 하려고요? 그게 쉬운 줄 아세요!”
초면인 사람에게 마구 진상을 부리는 여인.
남자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도박에서 돈을 따는 거야 쉽지 않나?”
“···하! 제가 최근에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긴 농담이었어요. 어디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시죠!”
그러자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카지노에 왔으니 잠깐 즐기는 것도 괜찮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도박 중독 아가씨는 누구일까용?
모두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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