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대답했다.
“괜찮은데요?”
[후후. 그야 이 몸의 제안인데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상당히 오만한 태도이긴 한데 그렇게 말해도 넘어가줄 수 있을 만큼 꽤 괜찮게 들렸다.
“오케이. 이번에는 이걸로 가죠.”
결정을 내렸으면 굳이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괜히 뜸 들이지 말고 곧바로 여신님이 제안한 대로 예고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음···.”
[왜 그러느냐?]
“아니 이게 막상 하려니까 쉽지 않네요.”
사실 여신님의 제안은 매우 간단했다.
예고장을 암호로 해독하게 만들자는 게 전부였으니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예고 내용을 암호로 바꿔봤자 결국 달라질 건 없어 보였기에.
문제의 핵심은 예고를 확인한 카지노 측이 예정대로 경매를 진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과연 암호를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곧 내가 여신님의 얘기를 착각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말하는 암호는 ‘모스 부호’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완벽히 해독하면 정답을 찾아내는 그런 체계적인 암호와는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수수께끼를 내자는 것이다.
공간도 날짜도 훔치는 물건까지도 전부 뭉뚱그려 애매하게 흘리면 이걸 해석하는 사람은 굉장히 난감하겠지.
결국 어쩔 수 없이 여러 후보를 정해두고 동시에 지키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걱정하던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브리타니아 전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경매를 무기한 미룰 수도 없지 않은가?
다만 그만큼 예고장을 작성하는 나도 골머리를 앓았다. 원래 이런 건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이 더 힘들 수밖에 없다.
너무 억지스럽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해석하기 어렵게 난도를 맞추려다 보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여신님. 카지노를 뭐라고 비유하면 좋을까요?”
[글쎄다. 도박의 장?]
“그건 너무 쉬울 거 같은데요.”
[그러면 황금과 탐욕이 모이는 곳은 어떻겠느냐.]
“그렇게 내면 절대 못 맞히지 않을까요?”
내가 계속 반대 의견만 내자 여신님은 단단히 삐져버린 건지 작게 툴툴댔다.
[흥. 그러면 네가 알아서 해라. 모처럼 도와주려 했더니···.]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로 삐지려 하세요.”
그나저나 진짜 어렵네. 삐진 여신님을 달래주면서도 속으로 곰곰이 암호를 어떻게 짜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완벽한 예고장을 쓰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실패작이 점점 쌓여갔다.
“음. 아니야.”
너무 쉬워. 동네 3살짜리도 해석하겠잖아.
“이것도 아니야.”
이걸 누가 어떻게 풀어? 당장 답을 알고 있는 내가 봐도 뭔 헛소리인가 싶은데.
“으으···!”
쓸데없이 길고 복잡하잖아.
예고장 카드에 다 들어가지도 않겠어.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결국 예고장을 쓰다 말고 깊은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뒤쪽에 산처럼 수북이 쌓여있는 실패작 카드들.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여신님이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술의 혼을 불태우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정신을 차리고 내 모습을 돌아보자 완벽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는 시인이 앉아있었다.
현실과 타협해서 적당히 끝낼까도 많이 고민했지만.
괜히 그랬다가 설계한 트릭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그래도 계속 실패를 겪다 보니 슬슬 조금씩 감이 잡혀 오고 있다.
좋아. 여기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어느샌가 창가에 드리우던 어둠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따스한 여명의 빛이 채워갔다.
예고장 하나를 쓰느라 밤을 새워버렸다.
“좋아.”
잔뜩 무거워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채 예고장 카드를 들어 올렸다.
그 조그마한 공간에 쓰인 수수께끼 같은 문장은 그야말로 흠잡을 구석 하나 없이 완벽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고장을 내려놓았다.
비록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엔 칠흑 같은 다크서클이 새겨졌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영광스러운 명예 훈장처럼 느껴졌다.
침대에 몸을 뉘며 만족스레 눈을 감았다.
“이제 잠이나 자야지.”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그냥 푹 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그러자 귓가에 속삭여오는 감미로운 목소리.
[크로. 학교 갈 시간이다.]
“···아.”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차라리 나를 죽여주소서.
***
“크로. 괜찮아!?”
율리아의 걱정스러운 물음이 고막을 때렸다.
내 상태가 그만큼 심각해 보이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응.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확히 맞췄다. 사실 하나도 안 괜찮은 상태였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지금 눈만 한번 깜빡거려도 바로 기절하듯 잠들 자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있긴 한데 상당히 충격적으로 보이는지 율리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죽음을 앞둔 병자를 보는 눈빛이랄까.
단순히 동정심이나 안타까움보다 훨씬 짙은 슬픔이 느껴졌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 피곤해서 그래.”
“정말?”
“응. 조금만 자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말하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잘 테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였다.
“응. 그러면 조금이라도 쉬어!”
다행히 눈치가 빠른 율리아는 그런 내 의도를 간파하고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주었다.
역시 날개 없는 천사구나.
덕분에 꿀맛 같은 단잠을 청할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야 찐따.”
“······.”
“어이. 씹지 말고 일어나 봐. 안 자는 거 다 알거든?”
툭툭. 언제나 그렇듯 내 옆구리를 찌르는 레이첼의 손길.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왜 오늘은 이렇게도 짜증이 치솟는 걸까.
이 상태에선 잠들 수 없다.
잠들어도 2.5초 만에 다시 깨어나길 반복하자 결국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쭈. 지금 인상 쓰는 거냐?”
“나 피곤하니까 좀만 자자. 응?”
“어딜 신성한 교육의 장에서 건방지게 잠을 자려고.”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우리 반에서 수업 시간에 제일 많이 조는 애가 누군데.
그냥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될까?
“흡.”
“어때. 맛있지?”
내가 입을 벌리는 틈을 노려 무언가를 던져 넣은 레이첼.
즉시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함.
반사적으로 우물우물 씹으며 내 입안에 들어온 무언가가 초콜릿이란 걸 깨달았다.
“먹고 잠이나 깨. 찐따야.”
“···그래. 고맙다.”
그런데 굳이 초콜릿을 줄 필요 없이 그냥 자게 해주면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달콤한 초콜릿 덕분에 이전보다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각성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었다. 잠시 후 수업이 시작되니 다시 솔솔 몰려오는 잠기운. 결국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거기 조는 학생 깨워라.”
선생님의 지적에 정신을 차리는 것도 한두 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하다 결국.
“거기 학생. 밖에 나가서 세수라도 하고 오세요.”
“···네. 죄송합니다.”
모든 반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뒷문을 통해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신기한 건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레이첼은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거다.
무슨 은신 마법이라도 쓴 거냐고.
투덜거리면서 수업 중이라 고요한 복도를 걸어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비치는 내 얼굴은 여전히 다크서클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수업 시간에 조금씩 졸았던 덕분에 아까보다는 나아진 것 같지만.
“휴우···.”
그래도 세수를 한번 하고 나니 한결 정신이 또렷해졌다.
다시 돌아가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쏟아지려나?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좀 천천히 돌아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렇다고 다른 층에 내려가면 아예 땡땡이를 쳐버리는 느낌이니 그냥 화장실에서 시간이나 보내다 가야겠다.
“어이. 너도 수업 째는 거냐?”
그때 뒤에서 들리는 여유로운 목소리.
곧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뒤쪽에 있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백발에 붉은 눈동자.
상당히 여리여리한 체구에 곱상한 외모까지 합쳐지니 영락없는 병약 미소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지금 이곳은 다름 아닌 남자 화장실이란 것을.
그렇다. 저 녀석은 사내놈이다.
저렇게 여자처럼 생겨놓고선 심지어 목소리마저 중성적인 주제에 엄연한 남자 새끼다.
여러모로 특징적인 외모 덕에 단박에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진 그레인저.”
“나를 아나? 하긴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가.”
꽤 재수 없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중얼거림.
그렇지만 저 녀석은 저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원작에서도 여러모로 비중이 큰 캐릭터로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천재 라이벌.’
주인공과 부딪히고 협력하기도 하는 라이벌로서 재능과 실력은 또래 중 최강.
1학년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녀석의 실력을 설명한다.
외모도 곱상하고 실력도 최강.
그야말로 완벽해 보이는 존재지만 작가는 공평하게도 녀석에게 다른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
바로 싸가지다.
“근데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너 뭐하는 놈이냐?”
얘랑 엮여봤자 좋긴커녕 피곤해질 게 뻔했다.
아예 모르는 사이인 지금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편이 현명하겠지.
대충 얼버무리며 화장실을 떠나려던 찰나.
“아 네가 혹시 크로 모리스냐?”
“···어?”
쟤가 내 이름을 왜 알고 있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명찰에 쓰여있기 때문이랍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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