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런던에 비가 내렸다.
런던은 언제나 그랬다. 우중충한 먹구름에 휩싸여 환한 햇빛을 구경하기 힘든 도시.
런던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신비의 시대를 저물게 하고 철과 문명의 시대를 끌어냈다.
런던의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메케한 스모그가 섞인 것도 그때부터였으리라.
“······.”
소녀는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진동을 느꼈다.
쌀쌀한 밤공기가 우중충한 날씨와 만나며 도시를 얼어붙게 하였다.
아직 겨울이 찾아오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벌써 새하얀 입김이 튀어나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옷매무새를 단장한 소녀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밝히는 별빛은 먹구름에 드리워 보이지 않지만 도시를 빛내는 거리의 조명은 꺼지지 않고 세상을 비췄다.
그중 한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는 소녀.
입구 옆의 문패엔 ‘홈스 사무소’라고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내부.
셜록은 잠시 현관 앞에 멈춰 서서 어둠을 가만히 응시하다 조명을 켰다.
우산을 우산꽂이에 넣어두고 걸음을 내딛는 소녀.
불이 켜져 밝아진 내부의 풍경은 일반 가정집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기본적인 구조부터 생활하기 위한 공간과는 괴리감이 느껴졌으며 사무실 내부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각종 스크랩된 기사들이 그것을 더욱 상기시켰다.
소녀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안쪽 방으로 향했다. 서재인가 싶은 공간의 책상 앞에 앉고서는 곧장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조용한 적막이 이어졌다.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건지 셜록은 혼잣말은커녕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가 읽는 내용을 바꾸면서 잠깐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한 인물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괴도 레이븐.
최근 런던을 넘어 브리튼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화제의 인물.
그의 범행은 이제 단순한 범죄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세히 보면 소녀의 책상뿐 아니라 사무실 곳곳에 붙어있고 널브러진 내용 대부분이 전부 레이븐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가.
밤이 깊어감에도 셜록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료들을 분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
정적을 깨트리는 가벼운 노크 소리.
소녀는 고개를 들고 입구 방향을 응시했다.
이 시간에 이곳을 찾아올 손님이 있던가?
굳이 지금 같은 야심한 시각이 아니더라도 최근 홈스 사무실에는 어떤 손님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셜록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시죠?”
“접니다. 셜록.”
익숙한 목소리.
곧 누구인지를 깨달은 셜록이 살짝 눈가를 좁혔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여인이 어두운 코트를 걸친 채로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어깨를 툭툭 털면서 능청스럽게 말을 붙이는 가젯.
“최근엔 안 오더니 또 비가 내리네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경찰이니까요.”
잠시 미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열어 얘기한 사람은 가젯 쪽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죄송하지만 지금은 바빠서요.”
“그래요? 괴도에 관한 얘기인데 어쩔 수 없군요.”
어차피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뻔하다는 듯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소녀는 떠나려던 손님을 붙잡았다.
“들어오세요.”
“오. 감사합니다.”
사무실에 입성한 가젯은 주변을 살짝씩 흘겨보았다. 온갖 곳에 놓여있는 무수한 양의 자료들이 얼마나 세세한지 깨닫고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그냥 천재인 줄 알았더니···.’
이 정도 노력이면 인정해줄 수밖에 없겠군.
적어도 셜록은 단순히 재능이나 마법만 믿고 설치는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랐다.
사무실 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테이블은 아까 소녀가 앉아있던 서재 책상밖에 없었다.
그곳에 의자를 하나 더 놓고 커피를 대접하는 셜록.
“미안하지만 커피는 못 마셔서.”
“의외네요.”
가젯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자신의 인상이 커피를 달고 살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
실제로 담배는 아무렇지 않게 피면서 커피는 쓰다고 싫어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커피 말고 다른 음료는 아예 없는지 맹물이 잔에 담겨 턱 나왔다.
그렇다고 불쑥 찾아온 손님이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대접하는 시늉을 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판에.
물을 들이켜는 여형사를 향해 소녀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말했듯이 괴도와 관련된 일 때문에.”
“저번에는 저한테 맡길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죠. 저도 압니다.”
사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일개 탐정 한 명의 능력에만 의존해서 과연 그 녀석을 잡을 수 있을까?
가젯은 여전히 그 질문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괴도는 또다시 등장하여 이번엔 훨씬 골치 아픈 수수께끼를 던졌으며 수사에서 자신의 팀은 내쫓기고 집행자가 담당하게 될 위기에 놓여있으니.
그래.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집행자는 쉽게 말해 ‘신비 범죄’ 전담 경찰들이다.
즉 마법과 같은 기이한 불가사의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국가 소속 무장 단체. 같은 경찰이란 겉껍데기로 포장되어 있더라도 실상은 천지 차이다.
집행자는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최대한 도시의 이면에 숨어서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며 그 사실이 일반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려 한다.
여태껏 괴도 레이븐을 집행자가 담당하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너무 눈에 띄게 행동했으니까. 이미 런던을 넘어 브리튼 전체의 이목이 그에게 쏠려 있는 상황이니.
그럼에도 수사가 계속 지지부진하니 정부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설령 집행자의 정체를 들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이븐을 잡아내겠다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졌습니다. 셜록 홈스.”
“······.”
“이 사무실의 주소를 들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왜 당신의 이름이 그토록 익숙하게 느껴졌는지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었다.
‘셜록’이란 특이한 이름을 분명 언젠가 한 번 들었던 것 같았기에.
“제퍼슨 호프를 체포했던 현상금 사냥꾼. 그게 바로 당신이었군요.”
소녀는 탐정이 아니었다.
흉악한 범죄자들을 직접 잡아 체포하는 현상금 사냥꾼.
가젯의 얘기에 셜록은 무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평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어요.”
“물론 지금 사건에선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가 얼마나 악명높은 현상금 사냥꾼인지와 별개로 괴도 레이븐을 잡는 데 있어서 셜록은 탐정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 추리력은 진짜 탐정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같은 순간에 이 가짜 탐정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
가젯은 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오늘 새벽에 경찰청 우편함에 꽂혀 있던 예고장이에요.”
“경찰청? 이번에는 경찰을 털겠다는 건가요?”
“···그건 저희도 모르겠군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서 말이죠.”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그렇게 얘기하며 카드를 건네자 셜록은 잽싸게 받아 내용을 눈으로 읽어갔다.
내용을 전부 확인한 소녀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수수께끼 같네요.”
“풀 수 있겠습니까?”
“어렴풋하게 감은 잡히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솔직한 대답에 가젯은 작게 실망하며 축 늘어졌다.
“그렇습니까···. 후우.”
하긴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으면 한참 전에 자신이 밝혀냈겠지.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깐 밖에 나가서 담배나 태우고 올까 고민하던 와중.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는 맞은편의 소녀.
깜짝 놀란 가젯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디 갑니까?”
“잠시 찾을 게 있어서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서재를 비롯해 사무실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무언가를 하나씩 챙기기 시작하는 셜록.
마침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챙겨온 것들을 책상에 내려놓을 땐.
쿵! 하는 묵직한 울림과 함께 책상이 살짝 내려앉았다.
거의 산을 쌓다 싶을 정도의 다채로운 종이들.
책 서류 신문 사진이나 그림까지.
온갖 종류의 종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게 다 뭡니까?”
“자료요.”
태연하게 대답한 셜록이 손을 톡톡 털며 얘기했다.
“이제 한번 찾아보죠. 과연 저 수수께끼의 답이 뭘지.”
“···이걸 전부요?”
“네. 무슨 문제라도?”
“······.”
그 순간 셜록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을 냈다.
***
예고한 날이 되었다.
밤바람이 상쾌한 게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네.
“과연 암호를 풀었을까요?”
[글쎄다. 그래도 풀어야 재미있지 않겠느냐?]
“하긴 그건 그렇죠.”
만약 풀었다고 해도 완벽한 정답을 맞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2곳 정도의 예상 후보지를 정해두고 동시에 막으려 하지 않을까.
“그러면 슬슬 시작해보죠.”
또 새로운 공연의 시작이다.
과연 성공적으로 무대를 끝마칠 수 있을지.
내 자랑스러운 라이벌 탐정님께서 어떻게 나올 것인지.
조금은 기대해볼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라이벌이 탐정이 아니라 현상금 사냥꾼이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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