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어두운 밤. 건물의 옥상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이제 ‘태양의 미소’를 처분하고 생긴 돈을 처리해야 했다.
저번에 갔던 고아원은 일단 제외하자. 계속 똑같은 곳에 돈을 주면 순수한 기부가 아니라 커넥션이 있기 때문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어디 괜찮은 곳 없을까요?”
[정 어려우면 놔둬 놨다가 천천히 주면 되지 않겠느냐?]
물론 그런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아까 낮에 들었잖아요. 조금만 늦어져도 다들 저를 욕한다니까요.”
괴도가 아니라 한낱 도둑놈에 불과했다며. 그저 내 탐욕을 위해 훔치는 거라며 헐뜯는 사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괴도라는 직업은 환영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100번의 선행을 쌓아도 1번만 악행을 저지르면 사람들은 전부 나를 비난하겠지.
[그래서 괴도가 된 걸 후회하느냐?]
여신님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남의 시선 같은 건 딱히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나는 지금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아 괜찮은 곳이 한군데 떠올랐어요.”
[호오. 그곳이 어디더냐?]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교회요.”
교회는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도시 외곽 끝자락에 있는 교회는 생각보다 작고 한산했다.
[이곳으로 정한 이유가 있느냐?]
“네. 여기 수녀님이 착하신 분이거든요.”
비록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원작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은사님. 또한 원작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중 있는 선역 캐릭터이기도 했다.
나는 인기척을 죽인 채로 교회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슬그머니 확인해 보니 밤이 늦은 시간임에도 수녀님은 교회 안에서 혼자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흠. 나한테 기도하면 바로 이뤄줄 텐데 말이다.]
“여신님의 신도는 저 하나로 충분하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지. 후후.]
정확히 따지면 일반 평신도가 아니라 사도라는 직책이긴 하지만. 어차피 나 혼자만 믿는 종교이니 직책이야 대충 정하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돈다발을 입구 앞에 살포시 놔둔 다음 미리 작성한 소개장도 위에 올려두었다.
부디 좋은 곳에 써주시길.
-괴도 레이븐
“좋아.”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똑똑.
수녀님이 들을 수 있게 문을 두들긴 다음 재빨리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누구신가요?”
이윽고 교회 문이 열리더니 수녀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앞에 놓여있는 돈다발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녀님.
“어라?”
몸을 숙여 돈다발 위에 놓여있던 소개장을 읽고는 중얼거린다.
“괴도 레이븐···?”
[만약 그녀가 돈을 받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어···. 그건 생각 못 해 봤는데요.”
하긴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찌 됐든 도둑이 기부한 돈이니 성직자로선 받기 껄끄러울지도 모르지.
그렇게 따지면 나는 여신님의 부탁으로 괴도 짓을 하는 건데 말이야.
아무튼 여신님의 말씀대로 받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돈다발과 소개장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던 수녀님은 이내 허리를 굽혀 돈다발을 챙기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챙겨갔네요. 좋은 곳에 써주겠죠?”
[글쎄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돈을 주는 기준이 여자의 얼굴인 것이냐?]
“···네?”
[저번 고아원은 물론 이번 교회까지. 하나같이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운영하고 있잖느냐. 이 엉큼한 아이야.]
“오해에요. 전부 말씀드렸잖아요?”
내가 돈을 기부하는 기준은 오직 한 가지다. 그 사람 혹은 기관이 선량한가?
다만 그런 부면은 가볍게 조사한다고 알아낼 수 없으므로 자연스레 원작에 많이 등장하여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주게 된다.
그리고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선남선녀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 예쁜 여자에게만 기부한다는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이 몸은 딱히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무릇 괴도라면 카사노바 기질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건 전부 선입견이에요. 굳이 괴도라고 무조건 미녀에게 추파를 날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편이 더 괴도답다는 건 너도 인정하잖느냐.]
대체 어쩌다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 버린 걸까. 나는 교회에서 벗어나 이동하면서 일부러 주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했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어딘가요?”
[국립 박물관이다.]
“오. 드디어 박물관이군요.”
표현이 좀 이상할 수 있지만 본래 귀중품이나 보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바로 박물관이지 않은가. 여태까진 저택에서 개인의 소유물을 훔쳤는데 드디어 박물관에도 괴도가 출연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번이 진정한 데뷔전이라 보면 되겠지.]
“개인과 국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니까요.”
원작의 배경인 동시에 지금 내가 활동하는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브리타니아 제국’.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 현실 지구에 존재하는 특정 나라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국가였다.
국력은 실로 막강. 심지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란 신비의 힘까지 합쳐지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초강대국의 위치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국립 박물관의 보물을 훔친다는 건 그런 나라를 적으로 돌린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단순히 악독한 부자의 사유물을 훔치며 쌓은 악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흉악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겠지.
[각오는 됐느냐?]
“처음부터 한 지 오래예요.”
솔직히 전혀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두려움보다도 설레는 떨림이 더욱 강했다.
이렇게 보니까 나도 정상은 아니군.
하긴 정상적인 사람이 괴도 같은 직업을 선뜻 받아들일 리 없지.
[좋다. 그러면 자세히 설명해주마.]
이번 목표는 국립 박물관에 있는 사파이어 목걸이.
이름은 ‘천사가 머문 바다.’ 서정적인 이름에 걸맞게 보자마자 절로 감탄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워 명성이 자자하다고 한다.
그 사파이어 안에 여신님의 힘이 깃들어 있다.
“이번 보석은 마녀 씨에게 팔지 않고 다시 돌려놔야겠네요.”
[물론 그렇게 해도 브리타니아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야 그렇겠지. 돌려놓는 것과 별개로 도둑맞았다는 사실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브리튼은 실추된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나를 필사적으로 잡으려 하겠지.
“웬만한 방법은 통하지도 않겠네요.”
[물론 이전보다 경계가 훨씬 삼엄하겠지.]
“괜찮은 방법 없어요?”
[그건 괴도인 네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무 지당한 정론이라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렇다고 당장 가만히 앉아서 끙끙대봤자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박물관 근처로 가서 계획을 좀 세워봐야겠는데요?”
정해진 기한은 없으니 급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여유를 부리다간 괴도 레이븐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식어버릴 것이다.
일주일 안에 훔치는 걸 목표로 하자.
***
“쉽지 않네요···.”
나흘간 꼼꼼히 조사한 뒤 내린 결론이었다.
이번 목표는 정말로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철통 보안. 박물관은 어떤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철옹성의 요새와도 같았다.
어딜 둘러봐도 도무지 공략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정해둔 기한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사흘.
그 안에 과연 공략법을 찾아 ‘천사가 머문 바다’를 훔칠 수 있을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진 말려무나.]
“오늘 낮에 애들이 하는 얘기 들었잖아요! 벌써 사람들 머릿속에서 괴도 레이븐이 잊혀가고 있다니까요!?”
이건 정말로 문제다. 이번 주 안에 박물관을 털며 화려하게 복귀하지 않으면 그대로 은퇴 확정이다.
[그렇게 쫓기듯 서두르면 될 일도 실패할 거다. 정말 뛰어난 괴도가 되고 싶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거라.]
“···그렇죠. 고마워요. 여신님.”
여신님의 조언에 나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괴도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라니 뭔가 이상하지만 덕분에 이성을 되찾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았다.
“흠···.”
며칠 전에 입수해 닳도록 봐왔던 박물관 내부 안내도.
그리고 기억을 토대로 직접 그린 목걸이가 전시된 주변의 풍경.
목걸이는 전시대에 놓여있는데 덮여있는 유리는 마법이 부여되어 쉽게 깨지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면 박물관 전체에 알림이 울린다.
이 알림은 인근에 있는 경찰서에도 연결되어 있기에 사실상 유리는 건드려서도 안 된다고 보면 된다.
“혹시 손 안 대고 물체를 텔레포트 시키는 마법은···.”
[그런 걸 지금 네 수준에서 쓸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니요. 절대 무리겠죠.”
다른 건 다 어떻게 한다 치더라도 결국 유리 덮개가 문제였다. 사방을 둘러싼 유리 덮개를 건드리지 않고 안에 있는 목걸이를 빼내는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어? 잠깐.”
불현듯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
나는 황급히 옆에 치워뒀던 지도를 펼쳐 살펴보았다. 혹시나 해서 챙겨뒀던 박물관 주변의 지도였다.
있다. 정확히 박물관과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바로 옆을 지나는 시설.
지하 하수도.
유리 덮개로 사방이 막혔다고 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밑 부분은 유리가 아닌 전시대였다.
그러면 밑에서 훔치면 되는 거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브리타니아는 어느 나라일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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