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
“이제 이 모습도 익숙해졌네요.”
[확실히 그렇구나.]
최근 뤼팽으로 변장을 자주 하는 기분이다.
확실히 불편한 걸 감안해도 트릭 설계에 이보다 확실한 수단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일단 바깥에서 슥 둘러보기엔 저번과 별다른 차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방심할 생각은 없다. 저번처럼 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도 전부 염두에 두었다.
괜찮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암호를 해독했기를 바라는 중이다. 솔직히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만들었는데 누군가 풀어줘야 만든 보람이 있잖아? 아니면 차라리 끝까지 안 풀려서 모든 사람이 시도하는 난제가 되거나.
아무튼 그런 상반된 바람을 품은 채 당당하게 정문 입구로 다가갔다.
바로 엊그제 방문했던 탓인지 가드는 내 얼굴을 외워둔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음. 수고가 많군.”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카지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연히 안쪽에 있던 누군가와 시선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음?’
뭐지? 이 기묘한 익숙함은?
마치 빨려갈 듯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 외엔 더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특징은 머릿속에 한 인물을 떠오르게 했다.
‘셜록인가.’
다만 확신하기는 일렀다.
분명 머리 색이나 눈동자는 셜록의 특징과 일치하지만 사실 이 세계관에선 금발 녹안 정도야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요소였다.
당장 이 카지노 안에서만 찾아도 똑같은 특징을 지닌 여인이 꽤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특징이 너무나 달랐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큼 분위기부터 상당히 크게 차이 났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와인색 드레스. 거기다 하이힐에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카지노라는 공간을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드레스코드지만 셜록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복장이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선명하게 화장까지 한 상태.
내가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편인가? 막상 나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면 누구나 헷갈려 할 것 같은데.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면 그냥 물어보면 그만이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을 때 슬쩍 말을 건네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뤼팽으로 변장해서 카지노를 털려고 하는 지금 눈앞의 여인에게 가서 대뜸 ‘혹시 셜록 아닌가요?’하고 물어볼 수는 없단 말이지.
‘여신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글쎄다.]
그나마 기대를 품어 보았던 여신님 찬스마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아 순간 너무 깊게 생각하다 보니 계속 쳐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왜 상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따라 노려보는 걸까.
어쩌다 보니 시작된 기묘한 눈싸움.
그러던 와중 상대의 옆에 있던 여자가 이쪽으로 가까이 오면서 얘기했다.
응? 저 여자는 분명···.
“뤼팽 씨! 오랜만이네요!”
“이틀 전에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오랜만인 거죠. 저는 매일 카지노에 들르거든요.”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튼 예상치 못한 조앤의 등장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이번에도 카지노에 죽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둘이 방금 뭐예요? 되게 애틋한 눈길을 주고받던데.”
“착각이라네. 처음 보는 사람일 뿐이니.”
“흠···. 카지노에서의 운명적 만남이란 거네요! 낭만적이어라~.”
역시 이 여자는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껄끄러운 괴짜다.
얼른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하지만 내 바람도 무색하게 그녀는 내 발길을 붙잡고서 억지로 중매를 섰다.
“자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인사나 나누죠. 이쪽은 아르센 뤼팽!”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아가씨는 샬럿!”
샬럿? 셜록이 아니라 샬럿이라고?
이름까지 비슷하니 수상함은 더더욱 가중될 뿐이었다.
귀족 영애 같은 모습의 소녀는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샬럿이라고 해요.”
셜록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와는 정반대의 사근사근한 말투.
다만 목소리나 체구 등의 외형적인 특징은 셜록과 상당히 유사한 듯했다.
‘재밌네.’
오히려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다.
과연 그녀가 정말로 셜록인지 더 나아가 동급생인 샤론인지 의심하며 눈치 싸움을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런 심리전도 또 하나의 낭만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 거 셋이서 동행하는 건 어때요?”
때마침 가운데 끼인 중재자 역할의 조앤이 기가 막히게 제안을 꺼냈다.
나는 너무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한 박자 쉰 다음 여유를 가지고 대답했다.
“나야 환영이네만.”
뒷말을 일부러 툭 끊으며 샬럿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 너는 어떻게 나올 셈이지?
***
‘레이븐인가?’
카지노로 들어오는 중년 신사를 보자마자 떠올린 소녀의 첫 생각이었다.
나이대 복장 외모 등등 무엇 하나 공통점이 없는데도 그런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도 저 사내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리라.
마치 모든 것이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듯한 여유로움. 분명 성격도 괴도처럼 매우 괴팍하겠지.
그녀가 신사를 볼 때 상대 역시 영애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상반된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옆에서 신나게 떠들던 조앤의 말에 따르면 저자는 아르센 뤼팽이란 특이한 이름의 사내다.
불과 이틀 전에 처음으로 카지노를 방문했다고 말했던가.
그게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까? 아니면 물건을 훔치기 위해 일부러 사전 조사를 왔던 걸까.
셜록은 우선 상대의 모든 세세한 요소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레이븐보다 키가 살짝 더 큰 느낌이지만 그거야 구두의 굽을 높이면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간단한 트릭이다.
무엇보다 괴도는 변장의 대가. 단순히 외형적 특징이 다르다고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서로서로 지긋이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두 사람.
그 모습이 제삼자인 조앤의 시선에서 어떻게 비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어머 어머! 이거 뭐야!’
아줌마 같은 감탄사를 속으로 내지른 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뤼팽에게 다가가 얘기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셜록.
둘의 시답잖은 잡담에선 그가 괴도라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자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인사나 나누죠. 이쪽은 아르센 뤼팽!”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아가씨는 샬럿!”
분명 셜록이라고 한번 정정해줬는데도 굳이 샬럿이라 이름을 틀려 말하는 조앤.
아니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반강제이긴 했으나 지금 자신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인 상태.
설령 상대가 레이븐이라 할지라도 소녀의 모습을 보고 평소의 탐정을 떠올리긴 쉽지 않으리라.
눈앞의 남성이 괴도가 아니란 확증을 찾기 전까진 마찬가지로 정체를 숨기자.
괜히 셜록이란 이름을 상대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 그녀는 즉시 자연스레 지금의 모습에 맞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샬럿이라고 해요.”
그렇게 기묘한 눈치 싸움이 막을 내린 상황에서 전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던 조앤이 속으로 큐피드를 자처하며 상황을 이끌었다.
“이렇게 된 거 셋이서 동행하는 건 어때요?”
동행이라. 셜록은 잠깐 고민했다.
만약 이 남자가 괴도가 아니라면 그런 시간 낭비를 할 여유는 없었다.
언제 물건이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땐 둘과 떨어져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자신의 직감은 자꾸만 저 수상한 남자를 콕콕 가리키고 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면 안 된다고. 예의주시하며 계속 노려봐야 한다고 소리친다.
이성과 직감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나야 환영이네만.”
뤼팽의 은근한 눈길에 싸움의 승패는 갈리고 말았다.
“저도 괜찮아요.”
그렇게 세 사람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룰렛의 앞에서.
“으으···. 또 잃었어···.”
“오. 이게 잭팟이라는 건가.”
“말도 안 돼!”
테이블에서.
“으악! 이건 사기야!”
“이번에도 땄군.”
“말도 안 돼!”
셋은 카지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유희를 즐겼다.
다만 그렇게 신나게 게임을 즐겨도 그들 일행이 지닌 자본의 총량은 유지되었다.
한쪽에서 잃으면 그만큼 한쪽에서 땄으며 한쪽에서 파산하면 한쪽에서 잭팟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한편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셜록은 점차 초조함에 젖어갔다.
‘이 남자가 아닌 건가···?’
여유롭게 카지노의 모든 요소를 즐기면서도 막상 경매장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다.
괴도의 예고장에 따르면 오늘 밤이 예고일일 뿐 구체적인 시간까지 적혀있진 않으나 결국 언젠가 레이븐은 범행을 저지를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특별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은 듯하지만.
결국 지금의 평온함도 폭풍전야에 불과하단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셜록이 추측하기엔 아마 레이븐은 목표물이 경매에서 매물로 등장할 때 대놓고 훔치려들 것이다. 원래 녀석은 그런 관심을 좋아하는 괴짜였으니까.
그 추측이 맞다면 이제 시간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저 뤼팽이란 남자가 정말 괴도라면 아마 지금쯤···.
“슬슬 놀이터를 옮겨볼까.”
“···흐에. 내 돈이···.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가려고요?”
“흠. 저기는 어떤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셜록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확히 자신이 예측한 타이밍에 경매장을 가자고 제안하다니.
이건 확증이나 다름없다.
‘드디어···!’
괴도 레이븐.
잡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렇게 괴도는 셜록에게 잡히고 말았네용…
지금까지 작품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당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