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
셜록은 가슴이 쿵쿵대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덜미를 드러내는구나.
물론 섣부르게 행동하다 판을 그르칠 순 없으니 우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함을 유지했다.
자연스럽게 동행해 방에 들어간 다음 그곳에 잠복 중인 경찰에게 신호를 보내면 된다. 어떻게 할지는 사전에 정해놨으니 문제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답잖은 잡담을 떠드는 두 사람.
“저번에 샀던 게 마음에 들었나 봐요? 또 이렇게 오는 거 보면.”
“확실히 나쁘지는 않았지.”
저 뻔뻔한 모습을 보아라. 누가 보더라도 선량한 신사처럼 보이는 저 남자가 사실은 브리타니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괴도 레이븐이라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이젠 저 가증스러운 짓도 여기까지다.
가면을 벗기고 그의 본모습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입장하시기 전에 먼저 신분증 확인부터 부탁드립니다.”
아직 눈앞의 신사가 괴도란 사실을 모르는 안내원은 친절한 미소로 얘기했다.
의외로 뤼팽은 순순히 품속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옆에서 슬쩍 보니 확실히 이름이나 나이 등의 정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역시 철저해.’
신분 위조까지 완벽하게 끝내놓은 치밀함.
하긴 저러니 지금까지 정체조차 들키지 않고 쭉 활동했던 거겠지.
아니 어쩌면 저게 레이븐의 진짜 신분일 가능성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범행 예고 장소에 본모습으로 다닐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녀석은 항상 상식의 선을 벗어나 움직여왔으니까.
신분증을 건네받은 안내원은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고작 안내원이 알아차릴 만큼 조잡한 가짜 신분증일 리가.
뒤이어 조앤 역시 신원 확인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셜록의 차례였다.
“···아.”
이렇게 되니 셜록 본인이 문제였다. 그녀는 단순히 겉모습만 위장했을 뿐 따로 가짜 신분 따위를 준비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녀가 신분증을 꺼내지 않고 머뭇거리자 곧 안내원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뒤따라 이미 신원 확인을 마친 두 사람 역시 뒤돌아 의아함을 드러냈다.
안 된다. 여기서 더 머뭇거리다간 역으로 자신이 의심받고 만다. 특히 레이븐은 곧바로 재빠르게 수상함을 감지하고 자리를 달아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의 진짜 신분을 노출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자신이 슬쩍 뤼팽의 신분증을 봤던 것처럼 상대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의 정보를 보고 기억할 테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찰나의 고민 끝에 셜록은 품속에서 카드를 재빠르게 꺼내 안내원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확인한 안내원의 눈동자가 커지며 경악의 기색을 품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반짝이는 황금의 빛.
바로 VIP 출입증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최선에 가까운 수.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해결법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평범한 신분증보다 훨씬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고 조앤은 눈을 비비적거리는 중이며 뤼팽은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다.
애써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옆에서 들리는 얄미운 목소리.
“있는 집 아가씨인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거물이었나 보군.”
“어···. 샬럿 님? 혹시 제가 아까 했던 말실수가 거슬린다거나···.”
걱정했던 반응이 정확히 펼쳐지자 셜록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냥 원래처럼 대해주세요. 저도 그게 편하니까요.”
“오 오케이! 난 진짜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야···!”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드리죠.”
어쩔 수 없었던 거라며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레이븐에게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비밀이 많은 카지노 VIP 아가씨가 훨씬 낫지 않은가.
아무튼 위기도 어찌어찌 잘 넘겼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
그가 방에 들어가는 즉시 경찰들과 함께 그를 체포하는 것뿐이다.
“마침 경매가 딱 시작할 타이밍이군.”
“가운데 방은 비공개 매물이네요. 오늘도 여기로 갈 거예요?”
조앤이 가리키는 비공개 매물이 바로 오늘 괴도가 훔치겠다고 예고한 보물이었다.
“흠···.”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잠긴 척하는 뤼팽.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앤이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사실 제가 정보를 좀 들었는데 저 매물이 장난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래?”
“저도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평범한 수준이 아니란 건 확실해요.”
그런 소문은 또 어디에서 듣는 건지.
어쨌거나 오히려 좋다. 그녀 덕분에 그럴듯한 명분도 생겼으니 이제 곧바로 본심을 드러내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뤼팽은 일정표를 손으로 짚으며 얘기했다.
“그런데 나는 이게 마음에 드는데.”
“···네?”
“제일 왼쪽 방으로 가는 건 어떤가?”
그의 얘기를 듣던 조앤은 물론 셜록 역시도 당황하고 말았다.
‘뭐지? 나를 떠보는 건가?’
자신을 의심하며 일부러 그러는 건가? 당연히 목표가 있는 방에 들어갈 줄 알았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내는 사내.
‘아니야. 침착하자. 결국에는 가운데 방으로 갈 거야.’
마치 그녀를 놀리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뤼팽은 즉시 왼쪽 방으로 성큼성큼 이동했다.
“잠깐만요.”
“음? 왜 그러는가?”
“가운데 방을 가지 않는 이유라도 있나요? 거기서 경매하는 매물은···.”
아동 도서 전집.
즉 쉽게 말해 동화책이었다.
바로 직전에 조앤이 떡밥을 뿌렸는데도 굳이 거절한다고? 그것도 대신 고르는 물건이 중년 신사와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동화책?
셜록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뤼팽은 소녀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말 조앤 양의 말대로 그리 귀한 물건이라면 경쟁이 치열하지 않겠나. 아쉽게도 내가 돈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런···.”
“게다가 여기서 경매하는 물품은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에게 꽤 도움이 될 거 같거든.”
여기서 뭐라고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당신이 괴도란 건 전부 알고 있으니 순순히 정체를 밝히라고?
오히려 셜록 자신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게 뻔했다.
“······.”
“아 혹시 옆에서 진행되는 경매가 궁금한 거라면 갔다 오시게. 굳이 꼭 같이 경매에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잖나. 그럼 나는 이만.”
그 말만을 남긴 채로 여유롭게 왼쪽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뤼팽.
자리에 남겨져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조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특이한 사람이네요. 그렇죠?”
“···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저 남자가 괴도가 맞든 아니든 일단 따라가서 끝까지 확인하는 수밖에.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에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당연했다. 카지노까지 와서 동화책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괴짜가 여기 한 명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같은 줄에 쪼르르 앉아 경매에 참여하게 된 세 사람. 사회자의 김 빠지는 느긋한 진행을 들으며 셜록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옆 방에선 목표물의 경매가 시작될 시간이다. 그런데 막상 범인이라 생각했던 뤼팽은 여유롭게 동화책이나 구경하고 있다.
‘내 직감이 틀린 건가?’
만약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옆방으로 뛰어가야 했다.
이렇게 바보처럼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 미련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다.
분명히 저 뤼팽이란 사내에게 뭐가 있는 거 같은데. 그는 왜 저리도 여유롭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의 예고장 해석이 잘못된 걸까.
셜록의 높은 자긍심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방 바깥으로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뒤이어 무대에 경매 관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올라와 사회자에게 무언가를 긴급히 알려주었다.
귓속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딱딱하게 변하는 사회자.
사건이 터졌다.
셜록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뛰어갔다.
“어? 샬럿? 어디 가?”
뒤에서 들려오는 물음조차 무시한 채 전력 질주하여 문제의 가운데 방으로 들어간 소녀.
그곳엔 이마를 부여잡으며 있는 대로 눈을 찌푸린 가젯이 있었다.
“또 당했군.”
“형사님! 레이븐은요!?”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려 셜록을 바라보는 가젯.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건이 사라졌다.”
“······.”
***
한편 왼쪽 방에 있던 조앤은 자꾸만 뒤를 힐끔거렸다.
“안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보지. 우리가 끼어든다고 해결이 되겠나.”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금의 기억.
확실히 VIP 출입증을 지닌 소녀를 자신들이 무슨 수로 돕겠는가.
주변의 분위기 자체가 뒤숭숭한 걸 보니 아무래도 카지노에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모양이다.
샬럿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유도 그 때문인가?
어쩌면 카지노 핵심 관련자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총지배인의 딸이라던가.
그때 손을 탁탁 털던 뤼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카지노 분위기가 영 이상하군.”
“그러게요···.”
“더 있어봤자 제대로 즐기기도 힘들어 보이니 나는 슬슬 가보도록 하겠네.”
조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벌써요? 그러면 동화책은···.”
“어쩌겠나. 사회자도 어디론가 급히 가버렸는데 주인이 없다고 훔칠 수도 없으니.”
그거야 물론 당연한 소리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조앤이 당황하는 사이 뤼팽은 여유롭게 뒤돌아 방을 나가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자고. 인연이 닿는다면 말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호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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