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저 둘은 어디를 가고 있는 거지?
애초에 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왜 레이첼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작 빌런과 야심한 밤에 몰래 만나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둘의 뒤를 밟았다.
이러는 나 자신이 스토커 같다는 느낌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다.
멀리서 뒤통수만 보아선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다면 조금이나마 나을 거 같은데 그마저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니 추측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게오르크? 디트리히? 아니면 지크프리트?
모르겠다. 누구라고 확신하기엔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그나마 지금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사람이 딱히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
그저 앞만을 보고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향하는 레이첼과 드라칸 일원.
진짜 무슨 상황인지 아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굴려도 레이첼이 드라칸과 엮일 이유? 심지어 원작에 나오지도 않는 내용으로?
[이대로 끝까지 따라갈 셈이냐?]
‘지금 당장엔 그 방법밖에 없어 보여요.’
물론 제대로 대비도 하지 않고 무작정 뒤를 밟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다. 나도 그걸 몰라서 무턱대고 따라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놓치면 다시 기회가 올지 불투명했다. 당장 이 난해한 퍼즐을 풀 유일한 해답은 두 사람의 발길이 닿는 종착지를 직접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때 앞서가던 두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가?
[피해라!]
여신님의 경고와 함께 뒷목을 쭈뼛 세우게 하는 오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굴러 옆으로 회피했다.
불과 직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피어난 날카로운 고드름.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대로 가슴을 꿰뚫려 저 얼음과 하나가 되었으리라.
드라칸에서 냉기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녀석은 한 명밖에 없다.
지크프리트. 하필 드라칸에서도 가장 위험한 놈이 나를 죽이려 한다.
“이걸 피하다니. 솔직히 의외로군.”
앞에서 들려오는 여유로운 어투의 목소리.
나를 동등한 적수는커녕 한 마리의 날벌레로 여기는 듯한 어조였다.
“평범한 버러지는 아니라는 건가?”
날벌레가 아니라 버러지였구나.
취급이 더 안 좋아진 거 같은데.
소란이 일어나자 그의 옆에 있던 레이첼도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어서 아마 내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디 그래야만 한다. 지금 나는 괴도 레이븐도 아르센 뤼팽도 아닌 크로 모리스였으니까. 즉 레이첼의 옆자리 짝인 엑스트라. 만약 내 얼굴을 봤다면 단박에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말겠지.
“뭐하는 버러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죽어라.”
그 말은 살벌한 위협이나 경고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덤덤한 선언에 불과했다.
지금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서든 도망치자.
지금은 정보를 얻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지크프리트며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막말로 현재 시점에서 녀석과 싸운다면 백전백패다. 아무리 보석의 힘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한들 녀석은 지금 타이밍에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유가 궁금해도 결국 일단 살아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도망치겠다고 해서 상대가 가만히 지켜볼 리는 만무했다. 아마 등을 돌리자마자 얼음송곳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파고들어 뇌를 꿰뚫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사가 달린 극한의 상황에서 나는 최선의 수를 고민했다.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지크프리트는 손을 내밀며 마법을 시전하는 중이었다. 곧 주변을 얼어붙게 할 만큼의 지독한 냉기가 거리 전체에 흩뿌려졌다.
고민을 끝낸 나는 곧바로 품에서 카드를 꺼내 녀석에게 던졌다. 약한 상대에게도 방심하지 않겠다는 건지 그는 즉시 팔의 궤적을 수정해 나 대신 날아오는 카드를 겨냥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쏘아지는 얼음 화살. 그대로 카드를 꿰뚫자마자 펑! 하는 효과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시야를 방해했다.
“얄팍한 수를 쓰는군.”
이 정도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손을 휙 휘두르자 즉시 냉기 바람이 연기를 걷어내었다.
잠깐의 공방만으로도 격차가 여실히 느껴졌다. 마법의 활용 효율부터 아예 격이 다른 수준. 하지만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카드를 꺼냈다.
똑같이 날아드는 카드를 이젠 신경 쓰지도 않고 내게 공격하려는 지크프리트.
정확히 이 타이밍을 노렸다!
상대의 바로 앞까지 날아간 카드가 이번엔 밝은 빛을 내뿜으며 산화했다. 어두운 밤에 피어오른 일순의 섬광을 정면으로 목격하면 누구라도 잠시나마 눈이 멀게 된다.
“큭!”
역시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당황하는 녀석.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재빨리 남은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마법을 시전했다.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급히 도망치려 하는 순간.
“잠깐···!”
레이첼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멈칫했다. 만약 여기서 저 부름에 반응해버리면 지금 겨우 만들어낸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그랬다간 여기서 드라칸에게 무조건 죽고 말겠지.
어쩌면 레이첼이 막아주지 않을까? 둘이 아는 사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 내 목숨을 배팅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일 뿐 사실 시력을 회복한 지크프리트가 분노하여 나를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 버릴 확률이 훨씬 더 높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헉···! 허억···.”
얼마쯤 도망쳤을까. 숨이 턱 끝까지 닿을 만큼 죽어라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 딱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도 혹시나 모르기에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쳐 더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나는 겨우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녀석이 쫓아오는 거 같진 않다. 사실 상대가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했다면 이렇게 도망치기도 전에 진작 죽었을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굳이 나를 끝까지 쫓지 않은 이유는 아마 레이첼 때문이 아닐까.
그녀와 가던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레이첼이 직접 녀석을 말린 것이든 간에 말이다.
괜히 미행하다가 죽을 뻔했네.
뒤늦게 바로 직전까지 내가 얼마나 위험했던 건지 새삼 실감이 났다.
그 지크프리트한테서 살아남다니.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줬다고 감사해야 할 수준이다.
녀석이 얼마나 강하냐면 현재 세계관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강자다.
당장 주인공도 원작의 후반에 가서 동료들과 합공해서야 겨우 이겼던 상대이니.
[좀 괜찮으냐?]
“네···. 어찌어찌 목숨은 부지했네요.”
나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여신님께 감사를 구했다.
“처음에 경고해주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꼬챙이가 됐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너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니 당연한 거지 않겠느냐?]
“어···.”
갑자기 이렇게 낯부끄러운 고백을 받아버리면 좀 부끄러운데.
어차피 그래봤자 평소처럼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 분명하니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저랑 결혼하시면 100년 만에 과부가 될 텐데요.”
[훗. 여신을 뭐로 보는 거냐? 너를 되살릴 방법쯤은 널리고 널렸다.]
그거참 믿음직스럽네.
당장 본인 힘도 전부 잃어버려서 사혼의 구슬 조각이나 찾아 헤매는 주제에.
[정 안 되면 명계에서 같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진심이세요?”
[물론 농담이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이 여자도 분명 자신만의 하렘을 차리고 싶어 할 게 뻔하다. 심지어 여신이나 되는 존재가 한낱 인간이랑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찍을 리가.
카지노 작전부터 미행에 이은 목숨을 건 도주까지.
오늘 하루는 너무 다사다난하여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어. 진주 흡수도 시작해야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는 길.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으론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도대체 레이첼은 왜 지크프리트와 함께 있던 걸까.
둘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던 거였을까.
결국 미행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탓에 그 비밀은 영영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놓고 직접 물어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잠깐. 대놓고 물어본다고?”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당장 지금 나는 괴도 레이븐도 아니고 아르센 뤼팽도 아니잖아.
그냥 평상복을 입은 채로 밤 산책을 즐기던 아카데미 학생인 크로일 뿐이라고.
산책 도중에 같은 반 친구를 만나서 인사를 하려 했는데 그 친구가 어떤 수상한 남자랑 어디로 향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뒤를 쫓았던 거다.
그랬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얼음 폭격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간신히 도주에 성공.
다음 날 아카데미에서 그 친구를 만나면?
당연히 직접 묻고 마구 따져도 이상하지 않다.
바로 직전에 내가 카지노에서 진주를 훔쳤단 사실을 레이첼은 모르니까.
나는 그냥 길을 걷던 선량한 아카데미 엑스트라일 뿐이었다는 거지.
“좋아. 바로 내일 물어봐야지.”
[호오. 그건 또 궁금해지는구나.]
나도 정말로 궁금하다.
레이첼이 뭐라고 대답할지 내 귀로 똑똑히 들어야겠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결심했던 대로 반에서 레이첼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어젯밤에 그 남자는 누구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젯밤 그 남자는 누구에용!?
실망이에용! 우리 헤어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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