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솔직하게 말해. 어젯밤에 그 남자는 누구야?”
내 질문에 레이첼은 말없이 잠시 나를 쳐다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뭔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네 옆에 있던 남자가 날 죽이려 했었잖아!”
“찐따 네가 뭔 개꿈을 꾼 건지는 모르겠는데 난 어젯밤에 나가지도 않았거든?”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내가 잘못 보고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분명히 레이첼이 확실했으며 마지막에 들렸던 목소리도 그녀와 똑같았다. 애초에 셜록 때처럼 헷갈릴 여자 자체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부정하며 아예 모르는 일이라 잡아떼니 답답한 노릇이다.
“진짜 이럴 거야?”
“증거 있어? 네가 봤다던 여자가 나라는 증거 있냐고.”
애초에 저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 스스로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로 내가 착각한 것뿐이고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죽을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부터 했겠지. 멀쩡히 도망치는 모습을 봤었으니까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봤자 끝까지 잡아떼면서 아니라고 우기면 별달리 방법이 없다. 어쨌든 발뺌할 수 없을 확실한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면 차라리 조금 더 신중하게 기회를 엿봤어야 했는데. 이미 후회해봤자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죽을 뻔했던 게 억울해서가 아니다. 왜 레이첼이 드라칸과 접촉했는지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면 이후의 원작 전개도 전부 무너질지 모르기에.
지금이라도 어떻게서든 원인을 밝혀내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레이첼.”
“뭐.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 꽤 친한 친구.”
“······.”
내가 진지하게 얘기를 시작하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쳐다보는 레이첼.
“그러니까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네가 아니었어?”
“······그건.”
한참이 지난 뒤 그녀가 입을 떼고 머뭇머뭇 얘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너희 거기 구석에서 뭘 속닥거리고 있냐? 수업 종 쳤으니까 빨리 반으로 들어가.”
옆 반 선생님이 불쑥 다가와 대화를 방해해버렸다.
그러자 레이첼도 곧바로 자리를 도망치듯 뒤돌며 얘기했다.
“들어가자. 시답잖은 얘기는 그만하고.”
결국 그렇게 도망치는 거냐?
나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
점심시간.
아이들이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떠들고 있다.
우리 자리에도 율리아가 다가와 평소보다 들뜬 모습으로 속사포를 쏟아냈다.
얘기의 주제는 다름 아닌 괴도 레이븐. 어제의 카지노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진짜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진주를 훔친 걸까?”
“그러게.”
“게다가 이번엔 예고장을 수수께끼처럼 암호로 적었었대!”
“그렇구나.”
“경찰들이 수사하고 있는데 아마 공범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하고 있다던데?”
“그럴 수도 있겠네.”
대충 영혼 없이 호응해주고 있으려니 율리아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한 어투로 꼬집었다.
“뭐야. 오늘따라 둘 다 왜 그래?”
“응? 뭐가.”
“이상하잖아! 크로는 넋이 나가 있고 레이첼은 아예 말도 한마디 안 하고!”
딱히 넋이 나가 있지는 않은데.
그냥 속으로 생각할 게 많다 보니까 율리아의 얘기에 집중을 잘 못 했던 거 같다.
그나저나 경찰이 공범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다 했나?
생각보다 감이 예리하잖아? 아니면 무슨 증거라도 찾은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셜록이 찾아낸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아 설마 둘이 싸운 거야?”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싸우기는 뭘.”
“반응 보니까 맞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까지 간 거야?”
싸운 건 아니었다. 아까 얘기를 나눌 때 고성이 오가거나 하지도 않았고.
그냥 말하자면 서먹해져 버린 거지. 특히 항상 먼저 장난을 걸던 레이첼이 조용하니 그게 더 부각되는 것뿐이다.
율리아는 눈가를 가늘게 뜨며 우리를 번갈아 보다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크로. 네가 먼저 용서해줘. 원래 어른스러운 사람이 져주는 거야.”
“아니 정말로 싸운 게 아니라니까.”
“응응. 그러니까 용서해도 괜찮잖아?”
아예 들어먹을 생각이 없구나. 그렇다고 이 상황을 설명해줄 수도 없고.
뒤이어 반대로 가서 레이첼의 귓가에도 뭐라 속닥이는 율리아. 나한테 한 것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나 보다.
그것조차 별 관심이 없던 건지 레이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정말···. 샤론. 너도 와서 뭐라고 좀 해봐.”
살짝 옆에 떨어져 있던 샤론을 부르는 율리아.
그녀는 원래 조용조용한 성격이다 보니 우리의 미묘한 분위기를 보고서도 딱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까 새삼 느끼는 건데 우리 그룹에선 율리아와 레이첼의 비중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던 레이첼의 툭툭 던지는 농담이 사라지자 분위기가 훨씬 휑하고 썰렁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옆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야.”
“···뭐.”
한 박자 늦게 돌아오는 퉁명스러운 대답.
얘 설마 진짜로 삐진 건 아니겠지? 삐질 거면 내가 삐져야지 자기가 뭘 잘못했다고 삐진대?
“알았어. 믿어줄 테니까 그만해.”
“···그만 하라니. 뭐를.”
“평소처럼 하라고. 애들이 괜히 오해하잖아.”
싱글벙글 이쪽을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율리아. 마치 유치원생을 바라보는 선생님 같은 미소였다.
레이첼도 그 시선을 의식한 건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흥. 찐따 주제에.”
이게 말로만 듣던 츤데레인가?
그렇다기엔 딱히 나를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러면 그냥 싸가지 없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 뒤로 시간이 흐르자 녀석은 서서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잡지에서 레이븐을 뭐라고 말했냐면···.”
“그만. 레이븐 레이븐 아주 귀에 딱지가 붙겠다. 좀 다른 얘기 없어?”
“응? 그러면 레이븐한테 교육 당한 국세청 직원의 인터뷰는 어때?”
레이첼은 기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저 시선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도 지금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까.
“조장. 너 설마 진짜 괴도 추종자는 아니지?”
“그냥 그런 주제가 유행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뭉친 것도 괴도 주제로 발표했던 것 때문이기도 하고···.”
“흠. 뭔가 의심스러운데.”
그러다 갑자기 화살이 나에게로 향했다.
“야 찐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어? 뭐···.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에이. 재미없기는.”
그보다 나는 네가 더 의심스럽거든? 말로는 믿어준다고 얘기했지만 여전히 어젯밤에 마주했던 여자는 레이첼이 확실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당장 율리아가 괴도 추종자라고 해도 딱히 놀랄 거 같진 않다. 따지자면 우리 넷 중에서 가장 정상적이고 멀쩡하지 않은가?
일단 나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괴도 레이븐 본인이고.
과묵한 샤론은 알고 보니 탐정 셜록으로 활동하며 나를 증오하는 중이라 의심 중이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제 레이첼은 빌런 조직과 밤에 밀회하는 매우 수상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세상에. 놓고 보니 진짜 가관이다.
어쩜 이렇게 하나 같이 수상하고 위험해 보일까.
이러다 알고 보면 율리아도 엄청난 비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닐 거야. 그래도 원작의 메인 히로인인데 설마 그러겠어.
시간은 흘러 어느새 하교 시간이 가까워졌다.
결국 레이첼은 마지막까지 사실대로 말해주긴커녕 아예 관련 주제 자체를 입에 담지도 않았다.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줄 생각이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아까도 말했듯 이건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확실한 진상 조사를 통해 원인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당사자인 레이첼이 협조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진상을 파헤치냐는 건데.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미행이지만 쉽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한번 들킨 시점에서 훨씬 더 조심할 게 뻔한데다 어제처럼 지크프리트라도 마주치는 순간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따로 뒷조사를 해봐?
하지만 어떻게···.
“아.”
괜찮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이유로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결론을 내렸다면 행동은 최대한 신속하게 가야겠지.
마침 진주의 힘을 흡수하는 데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동안 괴도 활동은 잠시 쉬면서 이걸 조사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아카데미를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서 목적지로 이동했다.
내 발걸음의 종착지는 바로 마녀의 가게였다.
“어머. 어서 오세요. 괴도 씨.”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네요.”
이제는 사업 파트너라는 느낌이 강해질 정도로 마녀가 친근해졌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매혹적인 미소로 나를 반겨주며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드디어 제 마음을 받아주시려고···.”
또 시작되는 짓궂은 장난을 단칼에 자르며 본론을 꺼냈다.
“혹시 저를 마녀의 마을로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어머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벌써 상견례를… 진도가 너무 빨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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