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
프랑크 왕국.
브리타니아와 가장 인접해있는 국가 중 하나로 모티브는 이름만 들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흡사하게 두 나라는 전통적인 라이벌로서 브리타니아가 세계 최강국으로 우뚝 솟아올라 있는 현재 시점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대항마로 손꼽히는 국가다.
물리적인 거리 자체는 하루 만에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우나 중요한 건 다른 나라인 만큼 입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거겠지.
아니 그 마녀 씨는 대체 왜 거기에 있대?
원작에서도 다른 국가가 배경으로 나오긴 하지만 주 배경은 당연히 아카데미가 있는 브리타니아로 한정된다.
당장 진주의 힘을 흡수할 동안 빠르게 처리하려 했는데 난데없이 해외여행이라니.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상황이라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음. 마녀 씨.”
“네. 무슨 일이신가요?”
어느샌가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녀.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약간의 희망을 품고 물어보았다.
“혹시 바로 이동할 방법은 없나요? 아니면 상대를 이쪽으로 부른다든지.”
“후후. 물론 어렵지 않게 가능하죠. 값만 제대로 지불하신다면요.”
“오 정말요?”
얼마냐고 묻자 마녀는 당당하게 손을 내밀며 가격을 제시했다.
“···너무 비싼데요.”
“그럼 당연히 비싸죠. 제가 특별히 괴도 씨라 할인까지 해준 거예요.”
정말 웬만하면 돈을 내려고 했는데 이건 웬만큼의 수준이 아니잖아.
당장 지금 내가 지닌 전재산을 탈탈 털어도 한참 모자란 금액이다.
“이거 말고 다른 상품은 없나요?”
“흠. 마녀 빗자루 여객 서비스를 거절하시다니.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닌데 말이죠.”
뭐야. 그거 직접 빗자루 타고 태워다 주는 거였어?
“그러면 살짝 저렴한 상품이 있긴 한데.”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내민 것은 고급스럽게 생긴 승차권이었다.
“기차? 프랑크 왕국에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지 않나요?”
내가 알기론 지구에선 해저 터널을 뚫어 런던-파리 기차가 있긴 하지만 지금 이 세계관은 산업 시대를 모티브로 한 만큼 아직 그 정도의 기술력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어머.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이건 평범한 기차 승차권이 아니에요.”
평범한 기차가 아니라고?
나는 카운터에 올려진 승차권을 집어 들고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 일반적인 승차권과 달리 날짜나 좌석 번호가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이어서 뒷면으로 뒤집은 순간 뒤늦게 이 특별한 기차의 정체를 짐작하였다.
황금색 기계 태엽이 마법진과 겹쳐진 특유의 상징.
“마도공학.”
“역시 알고 계시네요. 상당히 귀한 티켓이랍니다.”
원작에서 꽤 중요하게 등장하는 설정 중 하나다.
쉽게 설명하자면 마법과 과학이 충돌하는 시대에 둘을 하나로 합쳐 조화를 이루려 시도한 어느 천재의 결과물.
이 기술은 원작에서 다양한 순간에 등장하지만 마도 공학 기차는 아마도 언급만 슬쩍 되면서 넘어가는 것으로 기억한다.
설마 이 타이밍에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하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도 이름만 간간이 들어봤을 뿐 한 번도 실체를 보지 못한 ‘마도공학’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마주할 찬스였으니까.
“이 티켓은 얼만가요?”
“음. 한···. 이 정도?”
빗자루 서비스보단 저렴하지만 역시 비싸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궁금하잖아. 대체 무슨 수로 바다를 건너 프랑크까지 갈까?
[마도공학이라. 재밌겠구나.]
여신님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가 보다.
결국 짧은 고민 끝에 눈물을 머금고 거금을 들여 승차권을 구매했다.
돈을 벌어서 기쁜지 싱글벙글 웃으며 감사를 전하는 마녀.
“역시 괴도 씨다운 호방함이네요. 다시 한번 반해버렸어요.”
어떻게 사람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저리 뻔뻔하게 거짓말을 내뱉는대.
아 사람이 아니라 마녀였지.
“그래서 이 기차는 어디서 타면 되나요?”
“음. 그 정도는 특별히 서비스로 알려드릴게요.”
세상에. 원래라면 이 정보도 돈을 받고 팔려 했다는 거야?
참 직업 정신이 투철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돈벌레라고 고개를 내저어야 할지.
자본주의는 마녀마저 돈미새로 타락시키는구나.
나는 쪽지에 적힌 주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보니까 이거···.
표절 아니야?
***
우선 나는 집으로 돌아가 뤼팽으로 변장을 했다.
결국 마도공학 기차도 탑승을 위해선 신분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이럴 거면 그냥 합법적으로 갈까도 고민했지만 이미 티켓을 사버린 순간 다시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집을 나서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런던역이었다.
이곳에서 브리타니아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심장과도 같은 장소다.
중요한 건 여기가 마도공학 기차의 승강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런던역 안에 꼭꼭 숨겨져 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승강장의 입구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이게 과연 표절인지 아니면 오마주인지에 대해서.
뭐 이렇게까지 대놓고 따라 했다면 숨길 의도가 없다고 봐야겠지?
같은 영국 배경이기도 하고.
마법 아카데미인 것도 맞고.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벽 안으로 들어가 숨겨진 승강장에 도달했다.
“오···.”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었다. 기본적인 풍경 자체는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
특히 밖과 달리 아무도 없어 썰렁한 특유의 감성이 북적한 런던역과 이곳을 구별시켜주었다.
이렇게 장사가 안되니까 날짜 좌석에 상관없이 프리패스로 승차시켜주는 건가.
물론 푯값까지 고려하면 손님이 이만큼 없어도 돈은 꽤 버는 걸지도.
시답잖은 생각에 잠겨 기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으니 곧 멀리서부터 증기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등장했다.
일단 외형만 봤을 땐 일반 기차와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하지만 기차 옆면에 새겨진 태엽과 마법진이 겹쳐진 상징은 자신이 마도공학 기차임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기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올 때 슬쩍 바라보니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기관사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자율주행 기차야?
아무리 마법과 과학이 융합했대도 너무 오버 테크놀로지 같은데.
사실 마도공학의 원리는 원작에도 제대로 설명이 나오지 않기에 어떻게 작용하는진 나도 전혀 모른다. 애초에 판타지 만화 세계관에서 뭘 기대하겠냐마는.
곧 기차가 승강장에 들어서며 속도를 줄이다가 완전히 정차했다.
나는 습관처럼 살짝 뒤로 물러났다.
문이 열렸을 때 사람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건 물론 슬쩍 보이는 안쪽이 텅텅 빈 것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아직 나도 지구에서의 삶을 완전히 못 버렸구나.’
언제나 사람이 끊이질 않던 21세기 서울 지하철을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사실 그게 당연한 거겠지. 아직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반년도 되지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다.
혹시 기차가 떠나버릴까 헐레벌떡 위로 올라타면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풍경은 고급스러운 원목과 검게 도색된 강철이 조화를 이뤘다.
마치 기차가 아니라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진짜 아무도 없나?
일단 내가 들어간 열차 칸에는 빈자리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검수원도 없으면 애초에 승차권을 살 이유도 없는 거 아니야?
그냥 대충 자리에 앉을지 아니면 사람을 찾아 다른 칸으로 이동해볼지 잠시 고민했다.
사실 굳이 사람을 만날 필요야 없지만.
어차피 만나도 특별히 얘기를 나눌 거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기차 여행은 겸사겸사일 뿐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파리로 이동해 예언의 마녀를 만나는 것이었다.
바깥 구경이나 하자.
대충 창가 자리에 털썩 앉은 다음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승강장을 벗어나 이동하는 기차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이대로 국경을 넘어 파리까지 향한단 말이지? 대체 철로가 어떻게 깔렸나 궁금해 미치겠네.
전용 승강장이 런던역에 숨겨져 있던 걸 생각하면 분명 철로도 특별한 처리는 해놨을 텐데. 막상 창가로 보는 바깥 풍경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에이. 기대했는데 별거 없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익숙해지자 기대감도 줄어들었다.
그냥 일반 기차랑 크게 다를 것도 없네. 나중에 브리튼을 넘어갈 때나 잠깐 구경하면 될 거 같다.
그전까지 잠깐 잠이나 붙일까 생각하던 와중 앞쪽 칸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나는 즉시 그 사람의 행색을 살폈다.
카우보이모자와 새하얀 망토 굽 높은 승마 부츠와 얼굴을 전부 가린 시꺼먼 가면까지.
‘너무 수상하잖아!’
매우 개성적인 요소 덕분에 상대가 원작에 등장한 적 없다는 건 단박에 눈치챘지만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의문은 오히려 깊어졌다.
일단 체격을 보아하니 남자인 거 같은데.
상대도 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발견한 건지 고개를 이쪽으로 고정한 다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허락도 없이 옆자리에 착석하는 가면 쓴 카우보이.
“안녕하신가.”
인상과 달리 꽤 멀쩡하면서 밝은 톤의 남자 목소리.
일단 나도 답례로 마주 인사해주었다.
“반갑소.”
지금은 중년 신사 뤼팽의 모습이니 일부러 말투도 신경 써서 꾸며냈다.
그런데 내 인사를 듣더니 잠깐 침음성을 흘리는 상대방.
“흠.”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게 말했다.
“그 모습. 가짜로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헉! 표절이라니..!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