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
이곳이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야 이때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문제는 왜 레이첼의 과거에 이 풍경이 등장하냐는 거다.
심술궂게 생긴 뚱뚱한 대머리 중년.
라파노란 이름의 부호에게서 ‘태양의 미소’라는 목걸이를 훔쳤던 사건.
셜록과의 첫 만남이었던 순간이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태양의 미소를 가져가겠다고?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역시 틀림없다. 심지어 기억 속의 대사와도 완벽히 일치했다.
대체 왜?
수정구슬은 내게 무슨 과거를 보여주고 싶은 거지?
내 의문과 별개로 과거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메이지 킬러로 변장한 내게 경비를 맡기고 밑으로 내려가는 라파노. 뒤이어 과거의 내가 변장을 잠시 벗고 금고에 있던 목걸이를 훔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저택의 정원에서 셜록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괴도 레이븐.
간단한 인사와 함께 태양의 미소를 들고서 도주에 성공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사건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 세상은 만화가 아닌 현실. 내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연극 같은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괴도를 놓친 라파노는 시뻘게진 얼굴로 분노를 터뜨렸다.
“저 망할 좀도둑 녀석이···! 감히 내 보물을 훔쳐 가!?”
그와 반대로 레이븐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미련 없이 저택을 떠나려 하는 셜록.
라파노는 그런 소녀의 발걸음을 불러세웠다.
“넌 어딜 가는 거냐!? 내 집에 함부로 무단침입해놓고 은근슬쩍 빠져나가려고!?”
“저는 당신을 도와 괴도를 잡으려 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그냥 넘어갈 거 같아?! 그 이상한 모자 벗어 던지고 얼른 정체나 밝혀!”
그에 셜록은 한숨을 내쉬며 신랄한 비난을 쏟아부었다.
“한심한 사람.”
“···뭐 뭐!?”
“당신이 조금만 덜 멍청했더라도 괴도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어쩜 그렇게 바보같이 멍청하신가요.”
“이런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라고! 네놈은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삿대질과 함께 악에 받친 경고를 내뱉는 라파노. 그러나 셜록은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오히려 싸늘한 눈빛만을 돌려주었다.
어둠 속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에 괜히 움찔하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마법을 쓰는 건가?’
확실하진 않지만 소녀의 주위로 넘실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저 번뜩이는 눈빛. 이전에 하수도에서 마주친 적 있던 초록빛은 사람을 섬칫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셜록의 눈빛 공격에 완전히 쫄아버린 라파노는 그녀가 저택을 떠날 때까지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수정구슬을 통해 봐도 참 한심한 남자였다. 결국 넓은 정원에 혼자 남겨진 그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혼자 막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이 망할 녀석들이 하나 같이 전부 나를 무시하다니···. 본때를 보여주겠어. 이 라파노 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겠다고···.”
아마 그 결심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듯하다. 실제로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라파노가 내게 무슨 영향을 준 기억은 전혀 없으니까. 아마도 셜록 역시 마찬가지겠지.
라파노의 중얼거림은 한참이 지나도 그칠 줄 몰랐다. 오히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갈수록 황당한 자기 합리화와 변명 의미 없는 투덜거림만이 이어졌다.
“젠장. 내 작전은 모두 완벽했는데 어디서 망가진 거지? 계획대로만 흘러갔다면 그 좀도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화가 나긴커녕 이젠 안쓰러울 지경이다.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궁상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그래! 이건 전부 그 메이지 킬러 녀석 때문이야! 놈이 의뢰를 받아놓고 한심하게 괴도랑 바꿔치기를 당하니까 완벽한 계획이 전부 망가진 거라고!”
대체 무슨 의식의 흐름인지 아예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저기서 남 탓의 각을 발견하다니. 저 정도면 그야말로 자기 합리화의 신이 아닐까?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파노의 계획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내가 짜놓았던 덫에 걸려 메이지 킬러로 위장했던 내게 의뢰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태양의 미소를 훔치겠다고 계획했을 때 미리 라파노의 동선에 메이지 킬러의 의뢰 광고를 자연스레 배치해 뒀었다. 그걸 자주 보면서 머릿속에 각인한 라파노가 내 예고장을 보고는 곧바로 메이지 킬러를 고용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내 손바닥에서 완전히 놀아난 셈이다.
그런데도 왜 라파노는 그런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가? 그것도 전부 염두에 두고 일부러 꽤 주변에서 꽤 유명한 메이지 킬러의 이름을 사칭해 뒀으니까.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적어도 이 수정구슬을 통해 그 사건의 뒷면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왜 이리도 안일했을까?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라파노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내 계획과 트릭은 무조건 완벽하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너무 굳게 확신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설마 라파노가 남 탓을 단순한 자기 합리화로 끝내지 않고 사칭한 메이지 킬러 본인에게 직접 찾아갔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대머리 중년의 뒷모습을 따라 공간이 자연스럽게 변하며 런던의 골목 깊고 어두운 곳에 숨겨져 있는 암시장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곳에서 라파노는 한 무뚝뚝하게 생긴 남성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내가 사칭했던 메이지 킬러 아슬란이었다.
“금시초문이군.”
“자꾸 발뺌해도 소용없어! 분명히 나와 거래를 맺었으면서 왜 그날 나오지 않은 거냐! 덕분에 내가 얼마나 큰 손해와 망신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
말도 안 되는 억지에도 상대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정확히는 과묵한 분노를 은은하게 드러냈다.
“몇 번을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의뢰 따위 받은 기억 없다. 이 의미 없는 말장난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지?”
“윽! 그러면 내 목걸이는 누가 배상하냔 말이냐?!”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 모르겠군. 도둑에게 빼앗겼으면 국가 경찰이나 집행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정상 아닌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음에 라파노가 처음으로 쭈뼛거리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그건···. 괜히 경찰을 부를 필요까진 없지 않나 싶어서···.”
“과연. 뒤가 구린 짓을 제법 많이 했나 보군.”
내가 라파노의 저택을 털기로 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가 악인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경찰이 목걸이를 되찾았다고 해도 그걸 라파노에게 돌려줄 확률은 매우 적으리라.
애초에 절도 수사 도중에 라파노가 감옥에 끌려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으니.
여태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던 아슬란이 처음으로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상당히 불길한 웃음을 말이다.
“라파노라 했나. 그러면 이건 어떤가?”
“뭐 뭐 말이냐? 드디어 내게 무릎 꿇고 사과할 생각이 든 거냐···?”
저놈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누가 봐도 주도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나 중얼거리고 있는 얼빠진 모습.
“내가 괜찮은 해결사를 하나 소개해주지.”
“해결사?”
“그래. 실력이 상당하니 그 괴도가 훔쳐 간 목걸이를 되찾아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오오···! 그건 나쁘지 않구먼!”
아슬란은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덧붙였다.
“아 물론 페이는 꽤 세지만 내가 알기로 자네는 꽤 넉넉하니 괜찮을 걸세.”
어느샌가 자연스레 말투가 훨씬 정중해진 상대.
하지만 라파노는 그런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건지 흡족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배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하지만 여전히 레이첼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아슬란의 말과 달리 내게서 목걸이를 되찾으려는 시도 또한 전혀 없었는데.
“좋아! 당장 그 해결사를 소개시켜주게!”
“역시 생긴 것답게 시원시원하니 통이 크시군. 그러면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겠나? 내가 바로 불러와서 자리를 마련해주지.”
“물론 당연히 되고말고. 그 얄미운 좀도둑 놈을 족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
그렇게 아슬란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얼마나 지났을까 곧 새로운 인물이 자리에 등장했다.
매우 개성적인 밝은 연두색의 머리.
강렬한 화장과 코트 위로도 드러나는 볼륨 넘치는 몸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검은 코트에 새겨진 용의 자수였다.
드라칸의 일원인 베로니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완전히 홀린 라파노.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올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해결사가 혹시···.”
“네. 제가 바로 그 해결사예요. 베라라고 불러주세요.”
눈웃음 한방에 라파노는 변태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예예. 베라 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나중에 시간 되시면···.”
“아슬란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도둑이 훔쳐 간 목걸이를 되찾고 싶으시다 하셨죠?”
“어 네. 맞습니다. 그건 맞는데···.”
“여기 계약서예요. 확인하시고 서명하시면 바로 시작할게요.”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상황에 결국 라파노도 집적대는 것을 멈추고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면서 외쳤다.
“이 이건 너무 비싸잖아···!”
“네? ‘태양의 미소’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할 텐데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차라리 내가 알아서 찾는 게 낫겠어!”
베로니카의 미인계도 먹혀들지 않을 만큼 가격이 말도 안 됐던 모양이다.
단호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라파노. 그러자 해결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얘기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떠세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 직감이 외쳤다.
앞으로 이어질 그녀의 말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PIA653005248999님 또 100코인 후원 넘무넘무 감사드립니당!!
50화 기념으로 100코인을 주셨다는 건 100화를 찍을 땐 200코인… 흠흠!
아무튼 나비효과는 무서운 거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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